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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안식일

(창 2:1) 이같이 하늘들과 땅과 그것들의 모든 군대가 완성되니라. (창 2:2) 그리고 일곱째 날에 엘로힘께서 그분의 지으신 그분의 일을 완성하셨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루신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쉬셨다. (창 2:3) 그리고 엘로힘께서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시고 그 날을 구별되게 하셨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그 날에 그분의 모든 일로부터 쉬셨기 때문이다.

안식 (Sabbath) 이라는 단어가 영어 문장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것이 히브리 본문에서는 두 번 나타나며, 그것은 “그분께서 쉬셨다” 라고 번역된다. 그 단어의 본래의, 초기의 의미는 창세기 8:22 에서와 같이, 멈추는 것이다. 그 단어의 문맥상의 용법은 또한 “안식일을 지키다 (sabbatize)” 나 “안식 (Sabbath) 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한다.

히브리 성경을 공정하게 읽는다면, 그 안식 (Sabbath) 이 창조 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이 매우 명확해진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치우친 번역 안에서 그것이 명확하든지 그러지 않든지 그러하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에서 안식일이 처음 언급된 것은 여전히 율법이 시내산에서 주어지기 전이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시내산에서 유대인들과의 언약으로 처음 주어졌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안식일과 만나

(출 16:23)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야후와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러하니라. 곧, 내일은 안식하는 날로서 야후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니라. 너희가 구울 것은 오늘 굽고 끓일 것도 끓이고 남는 것은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하셨느니라. (출 16:24) 그들이 모세가 명령한 대로 아침까지 그것을 모아 두었으나 거기서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그 안에 벌레도 생기지 아니하였으므로 (출 16: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야후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찾지 못하리라. (출 16: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 하니라. (출 16: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몇 사람이 거두러 나갔다가 찾지 못하니라. (출 16:28) 야후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내 명령들과 내 법들 지키기를 거부하느냐? (출 16:29) 보라, 야후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으므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분의 빵을 너희에게 주노니 일곱째 날에는 너희 각 사람이 자기 처소에 머물며 아무도 자기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안식일 준비 – 만나를 모으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구절들로부터 우리는 다음 사항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1) 야후와께서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다; 2) 야후와께서 만나와 관련된 네 가지 기적을 행하심으로써 안식의 날을 구별하셨다: 만나는 여섯째 날에 두 배의 양으로 주어졌다, 그 두 배의 양이 상하지 않았다, 일곱째 날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첫째날부터 다섯째날까지 보관한 만나는 상했다; 3) 일부 백성들이 안식일을 무시함으로 비난을 받았다; 4) 백성들은 안식일에 만나를 모으기 위해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되었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다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만나가 여섯째날에 두 배의 양으로 왔다는 사실, 일곱째 날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 다른 날에 보관하면 만나가 상하지만, 일곱째 날에는 만나가 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안식일이 그 주의 특정한 날이지, 개인이나 “교회” 에 의해 칠일 중 한 날로 선택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2) 야후와께서 안식일-준수와 관련하여 순종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히브리 성경 기록에 기초한 안식일 준수에 반하는 현저한 논쟁 네 가지가 있다. 그 네 가지는 1) 그것은 일곱 중 한 날을 말한다는 것, 2) 그것은 선택 가능하다는 것, 3) 그것은 일시적 예법이라는 것, 4) 그것은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위의 구절들은 이 네 가지 중 첫 두 가지 주장을 명확하게 뒤엎는다.

안식일과 십계 (십계명)

(출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 20:9)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출 20:10) 일곱째 날은 야후와 네 엘로아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네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11) 엿새 동안에 야후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야후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들은 십계명을 구성하는 부분을 이룬다. 그 십계명은 이집트를 떠났던 수 백만의 백성들 전체에게 야후와에 의해 친히, 직접, 공개적으로 선포되며 기술되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다음 사항들에 대해 확신할 수 있다: 1) 그 계명은 주간 순환을 말하는 것이지, 그 중 한 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그 계명은 일을 위한 여섯 날과 일하지 않는 안식일을 만나의 출현을 통해 명확하게 구별한다; 3) 그 계명은 안식일에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의무를 지우는 것을 금한다; 4) 하급자는 자녀, 고용인, 외국인, 가축 등, 안식일에 의무를 면제 받을, 타협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니는 모든 자로 규정된다; 5) 안식일은 앞선 엿새 동안 기억되어서, 안식일에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을 처리해야 하는 시험을 방지하기 위해, 업무는 그 주간 내내 조율되고 처리되어야 한다; 6) 부동산을 소유한 자는 자신의 부동산에 들어오는 모든 자들에 의해 안식일이 지켜진다는 것을 확인할 의무가 있다; 7) 안식일을 시행하는 신성의 권리는, 그 날을 창조 시로부터 성별하고 구별하고 복되게 한 창조 주권에 함축된 신성의 통치권에 기초한다. 

이 구절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1) 안식일의 의무와 축복은 만나가 주어졌던 상황 이후에까지 적용된다; 2) 가족, 고용인과의 사회적 계약, 외국인과의 관계, 노동을 위한 가축의 사용은 유효하다; 3) 안식일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과 동물들에게도 적용된다; 4) 안식일은 생계의 기본적 과정과 관련이 있다; 5) 안식일은 하급자에 대한 상급자의 권위를 제한한다.

이 문장은 히브리 성경 기록에 기초한 안식일에 반하여 나머지 두 주장을 무효화 시킨다. 그것은 예식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 사회적, 도덕적 제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급자의 권리를 지지하고 상급자의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유대인의 권리를 넘어 일반적인 사람들의 권리에까지 확대된다. 그것은 사람의 권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물의 권리도 위한 것이다. 생계를 위한 일이 한 종족이나 한 민족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한 것임을 고려할 때, 안식일에 함축된 그 타협할 수 없는 권리를 비-유대인에게 적용치 않는 것은 너무도 편향된 것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분명 보편적인 것이며, 그것은 시간 상에서 그 확대를 위해서도 설명될 수 있다. 안식일은 인류가 식량을 얻기 위해 제한 받는 한 필연적으로 폐지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마쳐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인류의 식량 수급에 대한 의무를 없애지 않았기에, 그것은 본질적으로 인류로 하여금 그러한 노동으로부터 쉴 필요성을 없앨 수 없다.

안식일: 영속적 언약

(출 31:13)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야후와인 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 (출 31:14) 그러므로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그것은 너희에게 거룩하니라.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는 다 반드시 죽일지니 누구든지 그 날에 일하면 그 영혼은 자기 백성 가운데서 끊어지리라. (출 31: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야후와께 거룩하니라. 누구든지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출 31:1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키되 그들의 대대로 안식일을 준수하여 영속하는 언약으로 삼을 것이니라.

안식일은 창조 시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이나 초기 기록들로 이미 확립되어왔다. 그것은 모든 시대의 모든 인류를 위해 제정된 것으로 의식적 제도라기 보다는 사회적 제도이며, 필요한 의무로서 그 주간의 특정한 날로서 확립되었다. 이 문장은 안식일에 완전히 새로운 범위를 제공한다. 이 구절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사항들은 1) 안식일은 야후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이라는 것; 2) 안식일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야후와께서 그들을 성별하셨으며 구별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것; 3)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하여 사망의 형벌이 주어져야 한다; 4) 안식일은 이스라엘과의 영속적인 언약이다; 5) 여기에서 주어진 안식일과 관련된 새로운 세부 사항들은 특별히 이스라엘과 관련된다. 십계명에서 언급된 대로, 외국인들과 동물들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보에 기초하여, 십계명에 언급된 대로 안식일의 보편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과, 특별히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안식일의 측면도 있다고 우리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그 세부 사항은 영속적일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이는 또한 그 일반적인 사항들도 역시 영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안식일에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측면과 동시에 일시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은 혼돈을 일으켜왔다. 크리스챤들은 종종 그 특정하며 일시적인 측면에 기초하여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측면을 무심코 폐하여 왔다.

십계명 – 안식일십계는 신명기 5 장에서 모세의 설교를 통해 표현되지만, 그 경우에 그것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경험에 대해 적용된다. 안식일의 그 측면이 다음 구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전개된다.

(출 35:2)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요, 야후와께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누구든지 그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 (출 35:3) 너희는 안식일에 너희 모든 처소에서 불을 피우지 말지니라.

이 구절에서 새로운 정보는 안식일에 집에서 불을 붙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의 일반적인 측면인지 특정한 측면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사망 선고와 관련하여, 또한 그 앞선 언급과 같이 그 동일한 문맥에 포함된 것은 이것이 특별히 이스라엘에게 적용됨을 암시한다.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내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야후와 너희 엘로아니라.

이것은 십계에서 긍정 명령들 중 한 반복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부정 명령으로 표현된다. 안식일의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측면이 여기에서 다시 확인된다.

(레 19:30)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존중히 여기라. 나는 야후와니라.

이 구절은 애매모호하다. 이것이 연간 절기들, 주간 안식일 중 어떤 하나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둘 다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주간 안식일에 대한 확언으로 고려될 수 있다.

(레 23:3)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로되 오직 일곱째 날은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곧 거룩한 집회 날이니라. 너희는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 그것은 너희 모든 처소에서 야후와의 안식일이니라.

여기에서 안식일의 새로운 측면은 거룩한 집회다. 언급된 다른 모든 것은 이 구절을 십계의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측면으로서 같은 범주에 놓는다. 반면, 그 집회는 예식적인 조치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모세의 언약에만 적용되는지 아니면 모든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안식일에 모이는 것은 분명 그 시대의 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날에 생계를 위해 일하지 말아야 된다고 명확하게 지시를 받는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유용하게 된다. 우리는 예배를 위해 모이기 위해 자유함을 얻는다.

모세의 언약 중 안식일과 다른 연간 절기들에 관한 예식적 의무들은 레위기 23 장과 민수기 28:9, 10 에 언급되어 있다. 그것들에는 동물 희생 제사, 음식과 음료 예물이 포함된다. 그러한 예식적 의무들이 이 구절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기술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초기 에클레시아에서 논쟁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연간 절기들이 여기에서 안식일과 같이 언급된다. 레위기 16 장에서 속죄일이 그러한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들은 주간 안식일과는 구별된다. 안식일의 또 다른 예식적 측면은 성소의 상 위에 빵을 올려 놓는 것이었다. (레 24:8) 그는 계속해서 안식일마다 그 빵을 야후와 앞에 진열할지니 그것은 영존하는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취한 것이니라.

약속된 땅의 분할은 레위기 25 장에 기술된 대로, 일곱째 해에 그 땅의 안식의 쉼을 포함했다. 이것은 주간 안식일과 관련이 없다. 이와 같은 사항이 다음 장에서도 계속되지만, 주간 안식일은 2 절에서 다시 확언된다. (레 26:2) 너희는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존중히 여기라. 나는 야후와니라.

모세의 책 중 마지막 글은 비극적인 이야기다. (민 15:32)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있을 때에 안식일에 나무 거두는 자를 발견하고.

안식일을 범한 것에 대한 사망 선고는 신성의 계시에 의해 확언되었고 이 사건에 있어서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안식일의 엄숙한 의무가 그 가장 강력한 경우에 의해 보여졌다. 야후와께서는 안식일에 관하여 진지하셨으니, 그것이 모세의 책에 계시된 것과 같이 그러하셨다.

요컨대, 우리는 모세의 책들이 안식일은 창조 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성경적 주간의 특정한, 변동되지 않는 날, 일곱째 날이라는 것, 의무적이라는 것, 사람과 동물의 권리를 위해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 보편적이며 영구적이라는 것, 일상적 업무들을 내려 놓고 예배를 위해 모일 수 있도록 일상의 업무들로부터 백성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정기적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보편적이고 영구적인 측면들 외에, 그것은 또한 이스라엘에게 특정하게, 일시적으로 적용되어, 특별히 이스라엘과 맺어진 언약의 징표로서, 그것에 의해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한 사망 선고가 성막의 진설병을 교체하고, 추가적인 동물 희생 제사, 음식과 음료 예물에 있어서의 예식적 측면에 더하여 제정되었다.

안식일: 열왕기서의 역사

스크롤역사의 책들에서 안식일은 단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한 경우가 수넴 여인의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왕하 4:23) 그가 이르되, 월삭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거늘 그대가 어찌하여 오늘 그에게 가고자 하느냐? 하매 그녀가 이르되, 잘 되리이다, 하고.

열왕기하 11 장에 요아스의 대관식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 클라크는 그의 성경 주석에서 이 장에 나오는 안식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여호야다가 그 어린 왕을 선포하기 위해 안식일을 택했다는 것이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 날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 비밀스런 일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임이 주목을 받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는 역대하 23 장에서 반복된다.

열왕기서에 나오는 안식일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왕하 16:18) 이다. 또 안식일을 위해 그들이 그 집에 건축한 숨는 장소와 밖에 있던 왕의 출입구를 아시리아 왕으로 인하여 야후와의 집으로부터 돌려 놓으니라.

역대기는 모세의 책들에 있는 법들에 대하여 더 많이 언급한다. 그 첫 언급이 안식일의 진설병에 관한 것이다. (역대상 9:32) 또 그들의 형제들 중에서, 곧 고핫 족속의 아들들 중에서, 다른 이들은 보여 주는 빵을 맡아 안식일마다 그것을 예비하였더라.

안식일을 위한 특별한 예물들 또한 언급되어 있다. 또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명절들에 모든 번제 헌물을 야후와께 드리되 자기들이 명령 받은 규례에 따라 수효대로 항상 야후와 앞에 드렸더라. (역대하 2:4) 보소서, 내가 야후와 나의 엘로아의 이름을 위해 집을 건축하여 그분께 봉헌하고 그분 앞에서 향기로운 향을 태우며 항상 드리는 보여 주는 빵을 차려 놓고 안식일과 월삭과 야후와 우리의 엘로아의 엄숙한 명절들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 헌물을 드리려 하나니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영원한 규례이니이다. (역대하 8:13) 모세의 명령에 따라 날마다 정한 비율로 안식일과 월삭과 한 해에 세 번 지키는 엄숙한 명절들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드렸더라. (역대하 31:3) 또 야후와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자기 재산 중에서 번제 헌물 곧 아침과 저녁의 번제 헌물과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명절들에 드리는 번제 헌물로 쓸 왕의 몫을 지정하고.

역대기는 후에 보여질 선지자들에게서 안식과 관련된 도덕적 메시지의 한 힌트만을 제공할 뿐이다. (역대하 36:21) 이로써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야후와의 말씀이 성취되어 마침내 그 땅이 자기의 안식을 누렸으니 칠십 년을 성취하기 위해 그 땅이 황폐한 동안 안식을 지켰더라.

안식 기간의 땅 규정과 함께 안식일을 소홀히 여긴 이런 사고 방식은, 느혜미아의 책, 특히 13 장의 끝에 있는 안식일의 모든 언급에 영향을 끼친 바벨론 포로에 대한 이유였다. 안식일을 소홀히 함으로써 그와 동일한, 또는 더 심한 재앙을 불러오지 않고자 하는, 최우선시되는 염려가 있었다. 느혜미야는 안식일이 모세의 적용이 아닌, 신성의 직접적 계시임을 인지한다. (느 9:14) 또 주의 거룩한 안식일을 그들에게 알려 주시며 주의 종 모세의 손으로 훈계와 법규와 법들을 그들에게 명령하시고. 그러나 느혜미야는 안식일의 예식적 측면을 무시하지 않았다. (느 10:33) 곧 보여 주는 빵과 항상 드리는 음식 헌물과 항상 드리는 번제 헌물과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명절들에 드릴 것과 거룩한 것들과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하는 죄 헌물과 우리 야후와의 집의 모든 일을 위해 쓰게 하였고.

모세의 책들에 있는 안식일은 주로 음식을 얻는 활동과 관련된다. 그 예식적 측면과 대조되는 것으로, 안식일의 이 보편적인 측면이 느혜미야에 의해 인정된다. 그는 안식일에 음식을 수확 하는 일, 모으는 일, 준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음식을 사는 일 또한 금지된다고 기록한다. (느 10:31) 혹시 이 땅의 백성이 안식일에 제품이나 양식을 가져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거룩한 날에는 그들에게서 그것을 사지 아니하고 제 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징수하는 것을 삼가리라는 것이라.

안식일: 야후와를 신뢰하는 것

안식일에 음식 얻는 것을 중단 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깊은 심리적 이슈가 포함된다. 그것은 창조 이야기와 만나 이야기 둘 다에서 분명하지만, 느헤미야에서도 나타난다. 안식일의 주 목적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위에 의해 그들 스스로를 부양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타고난 성향에 대항하는 것이었다. 안식일 재평가를 위한 중단은 사람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창조주에게 의존해야 한다는 현실을 강화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밀안식일과 관련되어 음식을 얻는 것의 이 측면이 13 장에서 매우 강하게 거론된다. (느 13:15) 그때에 내가 보니 유다에서 어떤 사람들이 안식일에 포도즙 틀을 밟고 곡식 단을 가져와 나귀에 실으며 또 그들이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들여온 포도즙과 포도와 무화과와 온갖 종류의 짐을 실으므로 이에 내가 그들이 양식을 팔던 그 날에 그들에게 증언하였고 (느 13:16) 또 두로 사람들이 그 안에 거하며 물고기와 온갖 종류의 제품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예루살렘에서 유다 자손에게 팔기에 (느 13:17) 그때에 내가 유다의 고귀한 자들을 꾸짖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한 일을 행하여 안식일을 더럽히느냐? (느 13:18) 너희 조상들이 이같이 행하였으므로 우리 엘로아께서 이 모든 재앙을 우리와 이 도시에 내리지 아니하셨느냐? 그런데도 너희가 안식일을 더럽혀서 더 많은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임하게 하는도다, 하고 (느 13:19) 안식일 전에 예루살렘 성문들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때에 내가 명령하여 성문들을 닫게 하고 안식일이 지나기 전에는 그것들을 열지 못하게 하며 또 내 종들 중에서 몇 사람을 성문들에 세워 안식일에 어떤 짐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라. (느 13:20) 이에 장사꾼들과 온갖 종류의 제품을 파는 자들이 한두 번 예루살렘 밖에서 머물므로 (느 13:21)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증언하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벽 주위에서 머무느냐? 너희가 다시 이같이 하면 내가 너희를 붙잡으리라, 하였더니 그때부터는 안식일에 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 (느 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에게 명령하여 그들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와서 성문들을 지켜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게 하였노라. 오 나의 엘로아여, 이 일에 관해서도 나를 기억하옵시고 주의 크신 긍휼에 따라 나를 아껴 주시옵소서.

안식일에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것을 피하는 것에 관한 실제적인 측면은 모세의 책들에서는 잘 전개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만나 이야기가 있고, 요리를 위해 장작을 모으지 말 것에 대한 세부적 내용은 있으나, 그것을 제외하고 다른 세부 사항은 희박하다. 느헤미야의 이 구절은 식량을 나르거나 사고 파는 것 또한 금지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컨대, 이 역사 책들은 안식일의 예식적 측면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더해주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책들은 그 날에 우리가 왜 우리의 일상의 노동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강화시켜 준다. 무엇보다도, 식량을 운반하거나 사거나 파는 것에 관한 구체적인 것들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모세의 책들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음식을 얻는 과정과 관련한 안식일의 믿음은 더욱 정확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자신의 노동에 의해 우리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존하는 실제적인 한 방식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데에 있어,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그 노동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신성의 축복과 섭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일하는 엿새 동안에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과 생명과 음식물을 위해 야후와께 끊임없이 의존하는 것의 실체에 대한 관계를 안식일이 실제적인 방식으로 밝혀주는 것이다. 안식일이 야후와께 대한 우리의 온전한 의존에 관한 실제적 계시임을 크리스챤들이 깨닫는 데에 실패하는 것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준비함에 있어 은혜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 크리스챤들이 실패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안식일과 시편

시편은 제 이 성전의 기도책이지만, 안식일에 그 예배 행사와 유대교의 다른 성일들과 함께, 안식일 그 자체가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그것은 시편에서 단지 그 중 하나의 첫 부분에서만 언급되어 있다. (시 92:1) 안식일을 위한 시 또는 노래. 오 지극히 높으신 이여, 야후와께 감사를 드리고 노래로 주의 이름을 찬양함이 좋사오며.

시편의 넷째 책 전체는, 시편 92 편을 포함하는 부분으로, 안식일 예배의 목적을 위해 엮어졌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다.

안식일과 선지자들

선지자들은, 충분히 예상한 대로, 안식일과 관련하여 도덕적 이슈들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이 율법의 다른 많은 측면들과 관련하여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우리는 이사야의 시작 부분에서 그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사야

(이사야 1:13) 다시는 헛된 봉헌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하는 것은 내게 가증한 것이요, 월삭과 안식일과 집회로 모이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니 곧 엄숙한 모임 그 자체가 불법이니라.

여기에서 야후와께서는 불의를 덮기 위해 종교적 형태를 유지하는 위선에 관하여 이사야를 통해 책망하신다. 다른 사항들도 분명하지만, 이것이 그 선지서 대부분의 주된 주제다. 이사야서의 이 구절은 특별히 안식일 준수의 예식적 측면에 관해 말하고 있다.

계시를 기록하고 있는 이사야그러나, 이사야는 안식일의 도덕적 측면 또한 인정한다. 여기에서 이사야는 의로움을 발전시키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의 역할을 인정하고, 백성들을 악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그 효과를 인정한다. (이사야 56:2) 이것을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으며 그것을 굳게 붙잡는 사람의 아들은 복이 있나니 곧 안식일을 지켜 그 날을 더럽히지 아니하며 자기 손을 지켜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사야는 참되신 엘로아, 야후와의 예배로 전향한 이방인들 또한 안식일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인정한다. 그는 자신과 이스라엘 사이에 구별을 두지 말 것이다. (이사야 56:3) 스스로 야후와께 연합한 타국인의 아들은 말하여 이르기를, 야후와께서 나를 자신의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셨다,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보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유대인과 중동 문화권 전체는 후손을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긴다. 이사야는 그 중요성을 중동에서 자녀를 갖는 것과 연결시키며 그것을 안식일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는 안식일 준수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으로서, 자녀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사야 56:4) 안식일을 지키고 내가 기뻐하는 것들을 택하며 내 언약을 굳게 붙드는 고자들에게 야후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이사야 56:5) 곧 그들에게 내가 내 집에서 또 내 성벽 안에서 아들딸들의 것보다 더 좋은 처소와 이름을 주리라. 내가 그들에게 끊어지지 아니할 영존하는 이름을 주리라. (이사야 56:6) 또 스스로 야후와에게 연합하여 그를 섬기고 야후와의 이름을 사랑하여 그의 종이 되려는 타국인의 아들들 즉 안식일을 지켜 그 날을 더럽히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굳게 붙드는 모든 자.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안식일의 법적, 예식적 의무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결코 하급자의 타협할 수 없는 권리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야후와의 손에 대한 의지를 지지하는, 그 진정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와 동일한 징표에 의해, 그들은 결코 안식일이 의무만이 아니며, 인간과 동물의 권리에 대한 단순한 보호막만이 아니라, 또한 기쁨이라는 사실을 논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모든 자는 그러한 기쁨을 경험한다. 이사야 또한 안식일 준수의 그러한 측면에 대해 말한다. (이사야 58:13) 네가 만일 네 발을 돌이켜 안식일을 범하지 아니하고 내 거룩한 날에 네 쾌락을 행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야후와의 거룩한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하고 그를 공경하며 네 자신의 길들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아니하며 네 자신의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미래에도 안식일이 지켜질 것에 대해 언급한다. 이 예언에 대한 개인의 관점에 따라, 유대인들의 부분에서나 다가올 회복된 새 땅에서 안식일은 포로로부터 돌아온 것의 기쁨의 중심이 될 것이다. (이사야 66:23) 야후와가 말하노라. 월삭부터 다음 월삭까지, 안식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 모든 육체가 내 앞에 나아와 경배할 것이요.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이사야가 한 것보다 더욱 제한된 문맥으로 안식일을 언급한다. 그는 느헤미야에서 언급된 안식일 준수의 원칙들을 다시 확인할 뿐이다. 예레미야는 실제로 느헤미야 전에 기록했으며, 의심의 여지 없이 느헤미야의 행동과 글에 영향을 강하게 끼쳤다. (렘 17:21) 야후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스스로 주의하여 안식일에 짐을 나르거나 예루살렘의 문들로 그것을 들여오지 말고 (렘 17: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꺼내어 옮기지도 말며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어다. (렘 17:24) 야후와가 말하노라. 만일 너희가 부지런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안식일에 이 도시의 문들을 통해 짐을 들여오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여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아니하면…. (렘 17:27) 그러나 만일 너희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여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에 짐을 나르고 예루살렘 문들로 들여오면 내가 그것의 문들에 불을 놓으리니 그 불이 예루살렘의 궁궐들을 삼키고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시니라.

느헤미야가 안식일을 소홀히 한 것이 바벨론 포로됨을 촉발시켰음을 깨달았다는 것이 예레미야의 글에도 또한 나온다. (애 1:7) 예루살렘이 자기의 고난과 불행을 당하던 날에 곧 그녀의 백성이 원수의 손에 넘어가고 아무도 그녀를 돕지 아니하며 대적들도 그녀를 보고 그녀의 안식일들을 조롱하던 때에 자기가 옛날에 가졌던 것 즉 자기가 기뻐하던 모든 것을 기억하였도다. 그분께서 자신의 장막을 동산의 장막같이 격렬히 치워 버리시며 자신의 집회 처소들을 멸하셨도다. 야후와께서 시온에서 엄숙한 명절들과 안식일들을 잊어버리게 하시며 친히 분노하시고 격노하사 왕과 제사장을 멸시하셨도다.

에스겔

계시 중의 에스겔에스겔은 전혀 다른 측면에 대하여 언급한다. 그는 안식일에 관한 그의 언급을 출애굽기 31:13-16 에 기초한다. 그리하여 그는 안식일을 야후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표징으로 강조한다 (겔 20:12)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 야후와인 줄 그들이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겔 20:13)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판단의 법도를 멸시하고 내 안식일도 크게 더럽혔으므로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부어 그들을 소멸시키리라, 하였느니라…. (겔 20:16) 이는 그들이 마음으로 자기들의 우상들을 따라가며 내 판단의 법도를 멸시하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혔기 때문이라…. (겔 20:20) 내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것은 내가 야후와 너희 엘로아인 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노라.

에스겔이 안식일을 야후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로 강조할 때, 그는 또한 안식일과 관련된 다른 이슈들을 인정한다. 그는 특별히 우상 숭배에 관해 초점을 맞추며, 안식일이 야후와에 대한 지식을 가져 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우리는 이미 안식일이 어떻게 야후와에 대한 지식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불러 일으키는지 보아왔다. 그것은 인류가 생명과 음식물을 위해 야후와께 끊임없이 의존한다는 것과 상급자들이 그들의 하급자들에 대하여 제한된 권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이루어진다. 에스겔은 그러한 지식이 우상 숭배를 피하는 데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의 우상 숭배는 안식일 준수를 소홀히 한 것과 연관되었다. 기독교의 초기 세기들에 있어서 안식일을 더욱 소홀히 한 것과 야후와와 삼위일체에 대한 잘못된 이론의 등극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이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진행되었고, 그 시대의 같은 기간에 발생하였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가운데 안식일을 범하며 우상 숭배한 결과를 기술하는 것을 빠트리지 않는다. 그들의 우상 숭배는 후대의 크리스챤들 사이에 동일한 현상에 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겔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들이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판단의 법도를 지켜 행하지도 아니하고 내 안식일을 더럽히므로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내 격노를 부으며 그들에게 내 분노를 이루리라, 하였노라.

에스겔서에서 안식일을 범하는 우상 숭배는 분쟁의 경우들에 있어서 신성의 판단을 수행하는 공의를 소홀히 한 것과도 연관된다. (에스겔 20:24) 이는 그들이 내 판단의 법도를 집행하지 아니하고 내 법규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자기 눈으로 자기 조상들의 우상들을 따랐기 때문이라.

이 장 뒤에서, 에스겔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지각에 영향을 끼쳐 그 사람이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 사이에 관한 분별을 할 수 없게 되는지 설명하고 있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불결한 것과 기독교계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과 연동되어 진행된다. 우상 숭배, 안식일을 범하는 것, 거리낌 없이 혐오스러운 것을 먹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든 주변에서 보여진다. 이것은 에스겔이 그의 시대에 본 것이 반복되는 것일 뿐이다. (겔 22:8) 네가 내 거룩한 것들을 멸시하고 내 안식일을 더럽혔느니라… (겔 22:26) 그녀의 제사장들이 내 율법을 범하고 내 거룩한 것들을 더럽히며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전혀 구분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의 차이를 보이지 아니하며 자기 눈을 가려 내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서 더럽혀졌느니라. (겔 23:38) 이 외에도 그들이 내게 이 일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같은 날에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안식일을 더럽혔도다.

에스겔은 사회적 정의와 안식일 이슈로 돌아온다. 그것이 20 장에서 개략적으로 언급된 채 남겨졌었다. 정의의 도래에 대한 그의 마지막 예측에서, 그는 율법 전의 공의와 함께 안식일 준수의 회복에 대하여 언급한다. (겔 44:24) 또 그들은 시비가 있을 때에 일어나 재판하되 내 판단대로 그것을 재판하고 내 모든 집회에서 내 법들과 내 법규를 지키며 또 내 안식일들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둘째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예견은 결코 세부적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식일의 예식적 측면들에 대한 복원이 어느 정도까지 그 봉사로 반영되었다. (겔 45:17) 명절과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의 집의 모든 엄숙한 날에 번제 헌물과 음식 헌물과 음료 헌물을 드리는 것은 통치자의 몫이 되리니 그는 죄 헌물과 음식 헌물과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하여 이스라엘의 집을 위해 화해를 이룰지니라. (겔 46:1) 주권자 야후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일하는 엿새 동안에는 동쪽을 바라보는 안뜰의 문을 닫되 안식일에는 그것을 열며 월삭인 날에도 열지니라. (겔 46:3) 그 땅의 백성도 그와 같이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의 입구에서 야후와 앞에 경배할지니라. (겔 46:4) 안식일에 통치자가 야후와께 드릴 번제 헌물은 흠 없는 어린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가 될지니라. (겔 46:12) 이제 통치자가 자원하여 번제 헌물을 예비하거나 자원하여 화평 헌물을 야후와께 예비할 때에는 한 사람이 그를 위해 동쪽을 바라보는 문을 열어 줄 것이요, 그는 안식일에 예비한 것 같이 자기의 번제 헌물과 화평 헌물을 예비한 뒤에 나아갈 것이며 그가 나아간 뒤에 한 사람이 문을 닫을지니라.

이렇게 에스겔은 한 편에서 안식일의 사회적 측면과 도덕적 측면 사이를 구별하였고, 또 한 편에서 그 예식적 측면과 신호적 측면을 구별하였다. 그는 둘 다에 관해 기록했지만, 서로 다른 구절에서 기록했다.

호세아

두 명의 소 선지자가 안식일 메시지에 대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합쳤다. 호세아는 그 예식적 행위들의 중단에 대해 말한다. (호세아 2:11) 내가 또한 그녀의 모든 희락과 명절날과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엄숙한 명절이 그치게 하며.

호세아의 메시지는 이사야 1:13 의 그것을 보완한다. 그 믿음의 의식들이 도덕적, 사회적 불의를 덮기 위해 사용되었으므로, 그것들이 그 형벌로 중단되어야 했고, 이스라엘은 그들의 신실치 못함으로 인해 헐벗고, 취약하게 될 것이었다. 안식일이 이 사안에 있어서 중심 이슈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도덕적, 사회적 요소들과 예식적 요소들 둘 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다시, 오늘날과 놀라운 유사점이 나타난다. 언제나 희생 제사와 예식들을 유지하며, 고대 이스라엘이 안식일이 내포하고 있는 사회적 정의를 명심하는 데에 실패한 것과 같이,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고 있는 자들 또한 순종의 표징으로서 그 특정한 날과 안식일을 위해 담대하게 애쓰고 있지만, 안식일을 생명과 음식물을 위한 야후와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의존에 대한 증거, 상급자의 권한을 제한함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권리에 대한 실제적인 보호막으로 인식하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실패하고 있다.

아모스

안식일에 대한 이 사회적, 도덕적 측면은, 고대 안식일 준수자들에 의해 무시되었던 것으로서, 또한 아모스에 의해 언급되고 있다. (아모스 8:5) 너희가 말하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가서 우리가 곡식을 팔까?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가서 우리가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며 속임수로 저울을 틀리게 하고 밀을 내놓을까?

이 선지자는 안식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크게 향상시킨다. 이 선지자가 접근하는 첫째 이슈는 안식일의 예식적 준수에 관한 것으로, 사회적 불의를 은폐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했던 자들의 위선에 관해 언급한다. 이사야, 호세아, 아모스가 그 점을 강조한다. 예레미야는 안식일을 야후와와 이스라엘의 언약의 징표로 강조한다. 예레미야는 올바른 안식일 준수에 관해 더욱 자세하게 말하며 그것을 무시함으로 인해 그것이 어떻게 바벨론 포로됨에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준다. 에스겔은 야후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언약의 징표로서 안식일의 역할을 강조한다. 동시에, 그는 안식일을 소홀히 한 것이 어떻게 우상 숭배,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 정결한 것과 불결한 것의 차이, 율법 앞에서 사회적 불의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는지에 관해 보여준다. 그는 둘째 성전에서의 안식일 준수의 예식적 측면의 복원을 예언한다. 이사야는 계속하여 안식일 축복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개종한 이방인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것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중동 사람들의 사상 속에 가장 큰 축복인 후손보다도 더 큰 보물인지를 보여준다. 이사야는 안식일이 짐이 아니라, 기쁨임을 설명한다. 또한 그는 포로 생활 후와, 새롭게 만들어진 땅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 그것이 복원될 것을 예언한다.

안식일과 복음서

안식일은 모세의 책에서보다 복음서에서 더 자주 언급된다. 만약 안식일을 폐하는 것이 야후슈아의 의도였었더라면, 그분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며, 굳이 올바른 안식일 준수의 세부 사항들에 대한 그렇게도 많은 논쟁에 참여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과 관련된, 복음서의 목적은 그것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 수 있는지에 관해 가르치는 것이었다.

율법과 복음 표출은 오래된 것이며 종종 들려진다. 그러나, 그 둘을 하나로 함께 유지하기 보다는 그 둘을 분리하며 대조하는 방식으로 더 자주 언급된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복음서가 그 율법을 대체하거나 폐한다면, 소위 구약은 성경에서 전혀 보존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야후와께서 크리스챤들 가운데 그 성경, 구약과 신약 둘 다를 보존하셨다는 것이다. 그 사실은 복음으로부터 율법을 분리하는 오류를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 하나는 다른 것의 토대이며, 그 둘째는 그 전자의 반영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마태복음 5:17.

안식일은 마태복음 12 장에서 복음서 중 처음 언급된다. (마 12:1) 그때에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에 곡식 밭 사이로 지나가시는데 그분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곡식 이삭을 따서 먹기 시작하니라. (마 12:2) 그러나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그분께 이르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행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나이다, 하거늘 (마 12:3)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또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4) 어찌 그가 야후와의 집에 들어가 보여 주는 빵 곧 오직 제사장들 외에 자기나 자기와 함께한 자들이 먹으면 율법에 어긋나는 빵을 먹었느냐? (마 12:5) 또한 안식일에 성전 안의 제사장들이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마 12: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이곳에 있느니라. (마 12:7) 그러나, 내가 긍휼을 원하고 희생물을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니 (마 12:8) 인자는 곧 안식일의 주니라, 하시니라.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 2:23-28 과 누가복음 6:1-5 에서 반복된다. 많은 사안들이 고려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율법의 한 해석에 의해, 곡식이 들에서 옮겨지지 않았던 한, 그것을 거두어 먹는 것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랍비적 방식에 의해, 안식일을 범한다는 고소는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비난을 일으킨 바로 그 사람들 편에 환대를 하지 않은 것은 율법을 범하는 것이었다. 제자들은 금식을 함으로써 안식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음식을 거둘 수 밖에 없었다. 비난했던 그들 스스로가 적대적 목적으로 인해 그 제자들을 그러한 곤경의 상황으로 몰았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야후슈아께서는 그 비난하는 자들을 비난하지 않으시지만, 안식일에 행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성경적 선례, 다윗의 예를 제시하신다. 그 성경 기록을 그러한 방식으로 해석하심으로써, 야후슈아께서 다윗의 아들로서의 자신의 메시야적 권위와 그 해석으로 인한 자신의 신성의 정해진 역할과 성경의 성취를 확인할 기회를 가지셨다. 그리하여 그분께서 랍비적 방식의 권위를 부인하시고, 그것을 메시야의 권위로 대체시키신다. 그분의 해석은 특별히 랍비적 해석의 원칙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신, 그분의 해석은 권위가 있다.

야후슈아 편에서의 이러한 메시야적 권위에 대한 확언은 마지막 구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이 구절은 진정으로 그러한 관점에서의 안식일 준수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의 주제는 메시야의 권위에 관한 것이다. 여전히, 막 2:28 의 문장이 주저하게 만든다. (막 2:2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라.

그 문장이 일차적으로, 안식일은 그 자체로 사람의 행위에 의해 섬겨져야 한다는 바리새적 사고로 인한 그 결과를 비난하지만, 또 다른 개념이 그 문장의 초반부로부터 떠 오른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다. 즉, 안식일은 유대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해 만들어졌다. 게다가, 안식일은 인류를 위한 신성의 작품, 은혜의 선물이다. 사람이 그 선물을 대하는 방식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준다.

두번째 이야기가 마태복음 12:9-14 에 나타난다. (마 12:9) 그분께서 거기를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라. (마 12:10) 보라, 거기에 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으므로 그들이 그분을 고소하기 위해 그분께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나이까? 하니, 이는 그들이 그분을 책잡기 위함이었다. (마 12:11)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에게 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것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지면 그가 그것을 붙잡아 올리지 아니하겠느냐? (마 12:12) 그러하거든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잘 행하는 것은 율법에 맞느니라, 하시고 (마 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앞으로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니라. (마 12:14) 이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그분을 대적하여 어떻게 자기들이 그분을 죽일까 협의하니라.

이 이야기가 마가복음 3:1-6 과 누가복음 6:6-11 에서 반복된다. 그것은 그 전 것과는 그 성격에 있어서 크게 다르다. 여기에서 야후슈아께서는 랍비적 평결을 인용하시면서 치유가 합법적인 것이라고 확언하신다. 웅덩이에 빠진 동물을 구하는 것에 관하여 안식일을 범하는 것인지에 대한 랍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어떤 랍비들은 그것이 합법적이라고 말했다. 야후슈아의 대답은 그 랍비들의 상황 내에서 온전한 것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암시하는 것은 야후슈아께서 안식일 율법의 유효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식일을 폐하고자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죽음을 통해 그것이 폐하여진 것이라고 믿지만, 그들은 여전히 그 폐함을 주장하기 위해 십자가 이전 시대를 언급하며 복음서의 구절들에 종종 호소한다. 이것은 분명 해석상의 오류다. 만일 안식일이 십자가 사건 전에 폐하여지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면, 다가올 것의 그림자로서 그 폐함을 주장하는 크리스챤의 논법 또한 성사되지 못한다.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에게, 이 이야기는 중요하다. 이것은 자비의 행위들이 안식일에 적합하다는 것을 확언한다.

고려할 다음 문장은 마태복음 24:20 이다. 그러나 너희의 도피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너희는 기도하라.

안식일 준수자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의도는 그의 부활 후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임을 확언하시는 것에 대한 입증으로 인용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이것을 안식일이 다가올 것의 그림자로서 폐해지고, 십자가에서 성취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에 대한 반응은 그 명령은 단지, 서기 70 년 예루살렘의 멸망 직전 유대인이 지배하는 팔레스타인의 그 상황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안식일 준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간주되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이 도망가기 어렵게 만들 것이었다. 이 논쟁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 당시 그리스도의 추종자들 가운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모츠나와 바키오키에 따르면, 이 세기 초반쯤 일요일 준수의 등극 후에도, 안식일은 여전히 모든 크리스챤들에 의해 지켜졌다 (사무엘 바키오키, 안식일에서 주일로: 초기 기독교계에서 일요일 준수의 등극에 관한 역사적 연구, Biblical Perspectives, 1977). 그러므로, 그 예언은 안식일을 지키는 공동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만일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죽음이 안식일 준수를 폐해야 함을 의도하셨던 것이라면, 그것이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주를 가능하게 하는 대로, 그분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멈추라고 말할 기회를 잃으시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로, 그분께서는 그들의 안식일 준수를 지지하셨다.

그 명령이 후 세대들과 연관이 있든지 없든지, 서기 70 년까지도 그분의 제자들이 안식일을 준수할 것이라는 확언은 안식일이 그분의 죽음에 의해 폐해졌다는 주장을 해석상의 오류와 관련된 모든 문맥상의 증거들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수준으로 감소시킨다. 마태복음 24:20 은 야후슈아께서 안식일 준수가 십자가에서 끝날 것이라는 사상을 수용하지 않으셨다는 좋은 증거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골로새서 2:16, 17 에 대한 조화로운 해석을 발견하도록 요구하는 선례를 이루며 골로새서의 정전 자격을 부인하지 못하게 만든다. 안식일 준수를 수용하고 적어도 골로새서를 마태복음과 조화롭게 해석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

첫 복음서에서 안식일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마태복음 28:1 이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일부 성경 독자들은 이것과 또한 유사한 구절들에서 그리스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킹제임스 성경 번역이 본질적으로 옳다. 주 (week) 에 대한 그 단어는 실제적으로 그 문맥 상과 동이 트는 것에 대한 그 단어의 주 (week) 를 의미하지만, 그것은 해석되며, 그 안식일이 지나가는 말로 언급되고 확언되었다는 사실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제자들이 부활을 아직 모르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이것이 십자가 사건 후에 안식일을 지지한다는 안식일 준수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유사한 구절이 마가복음에서 발견된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났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그분께 기름을 바르려고 이미 향품을 사 두었더라.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서 반영되지 않은 안식일을 다루는 몇 개의 구절들이 있다. 그 첫째는 (막 1:21) 이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즉시 안식일에 그분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막 1:22) 그들이 그분의 교리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권위를 가진 자로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서기관들같이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1:23) 그들의 회당에 부정한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막 1:24) 이르되, 나사렛의 야후슈아여, 우리를 홀로 두소서.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오셨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아노니 야후와의 거룩하신 이시니이다, 하매 (막 1:25) 야후슈아께서 그를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막 1:26) 그 부정한 영이 그 사람을 쥐어뜯고 큰 소리를 지르며 그에게서 나오므로 (막 1:27) 그들이 다 놀라며 자기들끼리 물어 이르되, 이것이 무슨 일이냐? 이것이 무슨 새로운 교리냐? 그가 권위를 가지고 심지어 부정한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들이 그에게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안식일은 이 구절에서 지나가는 말로 언급되었을 뿐이다. 이 구절의 초점은 야후슈아의 메시야적 권위에 관한 것이다. 마태복음의 안식일에 관한 첫 구절에서와 같은 방식이다. 야후슈아께서 앞으로 가져오시는 안식일 개혁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둘 다에서 보여지는 데, 메시야로서의 그분의 역할과 위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그 암시는 안식일에 대한 거절이 메시야 그분에 대한 거절이라는 점이다. 사실, 우리는 실제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기독교계가 종종 야후슈아를 부인하는 것을 본다. 적어도 그분을 야후와의 독생자나 그리스도라기 보다는 삼위 중 둘째 분으로 만듦으로써 그러하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누가복음 4:31-37 에서 반영된다.

마가복음 6:1-5 은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에 그분의 고향에 방문하시는 것에 관해 말한다. 마태보다도 더욱, 마가는 안식일과 연관되어 야후슈아의 메시야적 권위에 초점을 맞춘다. 이 구절에서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그분의 권능을 나타내신다. (마가복음 6:2) 안식일이 되어 그분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얻었느냐? 그가 받은 지혜가 어떠하기에 그가 자기 손으로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느냐?

그러나 그분께서는 지인들의 불신을 만나게 되신다. 이런 이유로 그분께서는 거기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고, 동시에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에 관한 대치 국면을 피하셨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누가복음 4:16 에 기록된 것과 같은 경우에 관해 말한다. 그분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사렛에 가사 자기의 관례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읽으려고 서시니.

자신의 사역에 관한 예언으로서 그 구절을 읽으며 베푼 야후슈아의 해석은 그러한 반응을 가져올 것이었다. 

안식일은 마가복음에서 오직 한 번만 더 언급된다.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야후슈아의 시체를 요구할 때이다. (막 15:42) 그 날은 예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이제 저녁이 되었을 때에.

그 저녁이 누가복음에서 언급된다. (눅 23:54) 그 날은 예비일이며 안식일이 다가오더라. (눅 23:56) 돌아가서 향품과 기름을 예비한 뒤 명령에 따라 안식일에 안식하더라.

안식일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이상한 것이 아닌 것으로서 복음서에 그것이 언급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어떤 부분들에서 요한의 표현들은 조금 더 거리가 있음을 나타낸다.

마태의 초점은 안식일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에 관한 유대인의 해석의 의논에 관한 것이고, 마가의 초점은 야후슈아의 메시야적 권위에 관한 지표로서의 안식일에 관한 것이며, 누가의 초점은 또 다르다. 오직 누가복음에 있어서만 우리는 야후슈아께서, 치료해달라는 요청을 받지 않으신 상태에서도, 자신을 나타내기 시작하시며 보고되는 치유의 기적 모두가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야후슈아의 자비의 행위와 연관된다. 공관복음서에 있는 이러한 차이들은 그 세 복음서 가운데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차이점들을 반영한다. 마태복음은 그 복음서들 중 가장 유대인적이며, 마가는 권세와 권위에 초점을 맞추고, 누가는 자비와 사회적 이유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안식일에 관련되어서도 반영되어야 함이 예상된다.

안식일에 야후슈아에 의해 시행된 이러한 치유들 중 일부는 오직 누가에 의해서만 언급되어 있다. 그러한 것 중 첫째가 (눅 13:10) 이다. 그분께서 안식일에 회당들 중의 하나에서 가르치시더라. (눅 13:11) 보라, 열여덟 해 동안이나 병약하게 하는 영에 붙잡혀 몸이 다 구부러지고 전혀 몸을 들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눅 13:12) 야후슈아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러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너의 병약한 것에서 풀려났느니라, 하시며 (눅 13:13) 그녀에게 안수하시매 그녀가 즉시 몸을 곧게 펴고 야후와께 영광을 돌리더라. (눅 13:14) 그런데 회당의 치리자는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으므로 분을 내어 응답하며 사람들에게 이르되, 사람들이 마땅히 일할 여섯 날이 있으니 그러므로 그 날들에 와서 병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눅 13:15) 주께서 그때에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 위선자여, 너희 각 사람이 안식일에 자기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 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눅 13:16) 그러면, 보라,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여 있었으니 안식일에 이 결박에서 그녀를 풀어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니라. (눅 13:17) 그분께서 이것들을 말씀하시매 그분의 모든 대적들은 부끄러워하고 모든 사람들은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영광스러운 일로 인하여 기뻐하니라.

여기에서 야후슈아께서는 탈무드 미시나, 제 4 권, Qama Bava 3:10 에 반영된, 웅덩이의 소 논쟁으로 돌아오신다. 이것은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에 병 고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신 가장 중요한 랍비적 논쟁으로 보인다. 주목할 것은 그분께서 그러한 토론에 참여하셨다는 것이다. 이는 안식일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에 관해 토론하심으로써 안식일의 의무를 확언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또한 그분께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을 바로 그들의 땅에서, 바로 그들의 방식으로 대처하고 계시다는 것을 주목할만하다.  

이와 같은 논쟁이 다음 장에서 또 강조된다. 야후슈아께서 또 다른 사람을 치료하시며 안식일을 자비의 상징으로 나타내신다. (눅 14:1) 안식일에 그분께서 빵을 잡수시러 우두머리 바리새인들 중의 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시니 그들이 그분을 지켜보더라. (눅 14:2) 보라, 그분 앞에 수종이 있는 어떤 남자가 있더라. (눅 14:3) 야후슈아께서 응답하며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율법에 맞느냐? 하시니 (눅 14:4) 그들이 잠잠하거늘 그분께서 그를 데려다가 고친 뒤 가게 하시고 (눅 14:5) 또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나귀나 소가 있는데 그것이 구덩이에 빠지면 안식일에 그것을 즉시 끌어내지 아니하겠느냐? 하신즉 (눅 14:6) 그들이 이것들에 대하여 다시 그분께 대답하지 못하니라.

요한복음에 나오는 안식일 이슈는 공관복음서 중 야후와의 아들이라는 용어의 용법에서의 그 차이점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차이를 보인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야후와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그리스도나 메시야에 상응하는 용어일뿐이다. 요한복음에서 이 개념은 생명을 주신 분으로서 야후슈아께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확대된다. 요한복음에서 발견된 신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고소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에 대한 고소와 연관된다. 그와 같이, 생명을 주신 분으로서의 야후슈아에 대한 개념이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과 연관된다.

개념들에 관한 이 연관성이 이미 요한복음 첫 사건에서 나타난다. (요 5:9) 그 사람이 곧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바로 그 날은 안식일이더라.... (요 5:10)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네 자리를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야후와가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야후와와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

그 문장은 신성에 대한 주장과 안식일을 범했다고 주장하는 두 고소가 전혀 옳지 않다고 말한다. 이상하게도, 생명을 불어 넣으시고 죽음을 정복하시는 그분의 역할을 안식일에 나타내시는, 야후슈아의 사역과 메시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 대부분의 크리스챤 논평가들은 실제로 야후슈아를 대적하는 그 고소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안식일을 범하며 야후와, 전능자라고 주장하는 자라고 제시한다. 보통 사람은 요한복음에 의해 표현된 야후슈아의 메시지를 통찰하는 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이것을 중상 모략과 신성 모독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밖에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적대적 증인들의 주장이 다른 문맥들에서가 아니라 그 해석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지 미스테리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에 치유의 자비 활동을 정당화 하시기 위해 다른 논법을 사용하신다. (요 7:22)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조상들에게서 났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 (요 7:23)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 할례를 받거늘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온전하게 하였다고 너희가 내게 화를 내느냐?

랍비적 논쟁에 기초한 웅덩이에 빠진 소라는 주제 대신에, 그분께서는 토라의 율법을 조화시키는 것에 직접 호소하신다. 이것은 실제로 구전 법을 부정했던 사두개인들을 직접적으로 향하는 논법을 이룬다. 그리하여 복음서들은 야후슈아를 바리새적 랍비 논쟁들과 사두개인 방식의 토라 논쟁 둘 다를 사용함으로써 그분의 안식일 활동들을 옹호하시는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요한은 야후슈아 편에서의 또 다른 안식일 활동을 기민하게 제시해 낸다. (요 9:14) 야후슈아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을 열어 주신 날은 안식일이더라.... (요 9:16) 그러므로 바리새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이르되, 이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야후와에게서 오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다른 이들은 이르되, 죄인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적들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가운데 분열이 생기니라.

많은 복음서 이야기들은 야후슈아를 궤변으로 책잡고자 하는 비난자들을 보여준다. 야후슈아께서는 언제나 통찰력 있는 대답으로 그 국면을 변화시키신다. 요한복음 9 장은 그분을 비난하는 자들 가운데 분열을 일으키기 위해 안식일을 사용하시는 야후슈아를 나타낸다. 다시, 배려심 없는 지도자는 야후슈아를 적대시하는 적의적 고소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유혹을 받는다. 그리하여 그는 야후슈아와 그분의 비난자들 사이의 갈등의 요지와 또한 야후슈아께서 그들을 다룸에 있어서 얼마나 지혜로우셨는지를 놓친다.

복음서 중 안식일에 관한 마지막 언급은 십자가 사건에 관한 요한의 언급이다. (요 19:31) 그런즉 그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

요컨대, 복음서들은 안식일 이슈에 관해 상호 교통하시는 야후슈아를 나타낸다. 그분께서는 결코 안식일을 폐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안식일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에 관해 그분의 비난자들과 자세한 토론을 하셨다. 그분께서는 랍비적 방식과 사두개인적 방식 둘 다를 사용하심으로써 안식일에 그분의 자비의 행위를 하시는 것을 정당화 하시며, 그 고소자들과의 국면을 바꾸셨다. 그분께서는 그분의 안식일 행위를 통해 가르침과 치료 둘 다에 관한 그분의 메시야적 권위를 확립하셨고, 결국 그분의 안식일 개혁을 통해 생명을 주신 분으로서의 그분의 메시야적 역할을 확인하셨다.

안식일: 사도행전과 서신서들

복음서와는 대조적으로, 사도행전은 안식일을 단지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하며, 안식일 신학과 관행이라는 이슈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에서 안식일은 단지 인수일 뿐이다. 히브리 성경 기록과 복음서에서 제시된 대로 안식일의 복잡한 구조로 인해 더욱 더, 복잡한 토론이 그것을 해체하기 위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이 복음 그 자체의 중심 이슈들과 뒤엉키어 그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복음 체계의 고안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사실, 바로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크리스챤들이 하는 일이다.

그 첫 언급은 (행 1:12) 에 나온다. 그때에 그들이 올리벳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는데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안식일에도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더라.

그 둘째 언급은 (행 13:14) 이다. 그러나 그들은 버가를 떠나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이 문장은 애매모호하며, 이 기간에 사도들의 편에서 안식일 준수를 지지하거나 부인하기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오절은 “유대인들의 회당” 이라는 표현에 의해 회당이라는 언급만으로 유대인 기관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모임의 장소와 반대되는 곳으로 시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들은 그것을 유대인들이 모이는 장소로 규명하며 바울과 그의 동료가 거기에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안식일에 율법을 읽는 일에 참여하였든지 하지 않았든지, 적어도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그 곳의 유대인들에게 전할 목적을 위해 그곳에 왔음을 보여준다. 그 상황은 안식일 준수를 지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안식일 – 대중에게 설교하는 바울바울은 이 경우에 그의 담화에서 안식일에 관한 언급을 포함시킨다. 그 언급의 일반적인 음조가 긍정적이며, 그것은 특별히 유대인 관습의 맥락 속에 있으며 사도적 공동체에 의한 안식일 준수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언으로 취해질 수 없다. (행 13:27) 예루살렘에 거하는 자들과 그들의 치리자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고 심지어 안식일마다 읽는 대언자들의 목소리들도 알지 못하였으므로 그분을 정죄하여 그 목소리들을 성취하였도다.

그러나 이방인 관습으로서의 안식일에 관한 음조는 그 장 후반에 어느 정도 올라간다. 이 문장은 이방인 신자들을 위한 일요일 모임이 그 당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들 또한 안식일에 모였다. (행 13:42) 유대인들이 회당을 나갈 때에 이방인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들을 자기들에게 선포해 줄 것을 간청하더라… (행 13:44) 그 다음 안식일에는 거의 온 도시가 야후와의 말씀을 들으려고 함께 나아왔으나.

이방인 신도들이 안식일에 율법의 낭독을 듣기 위해 참석하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사도행전 15 장에서 나타난다. 우상 숭배에 바쳐진 것, 간음,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피하는 것 외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논쟁에 관한 장이다. 21 절 초반의 “for” (gar) 라는 단어의 명확한 암시는 만일 그들이 율법 낭독을 듣고 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것들이 그들에게 부과되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서 회당이라는 단어는 “옛 시대” 와 관련된 유대인의 기관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언급될 때의 그 시대와 관련해서는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을 위한 모임의 장소를 포함할 수도 있다. 그 경우에 우리는 그 시대의 예배에는 토라 교훈을 읽는 것이 포함되었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아마도 그리스어나 팔레스타인 풍이나, 각 절에 대한 번역이나 “탈굼” 과 함께 히브리어로 낭독되었을 것이다. (행 15:21) 옛적부터 모세에게는 각 도시에서 그를 선포하는 자들이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들에서 모세의 글을 읽느니라, 하더라.

안식일 준수자들은 때때로 안식일이 유대인 기관 밖에서 지켜졌다는 증거로 다음 구절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회당이라는 단어가 언제나 유대인 기관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렇지 않다. 둘째로,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던 유대인들이 언제나 안식일에 모이기 위한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는 잘못된 추정에 기초한다. 그것 또한 분명히 그렇지 않다. 이 구절은 평범한 유대인들이 모이는 평범한 장소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이방인들 사이에서의 안식일 준수를 지지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행 16:13) 안식일에 도시에서 나가 사람들이 늘 기도 드리는 강가에 앉아서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니라.

그 다음 구절 또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안식일에 그들과 함께하는 그의 관습에 대한 단순한 증거로 고려될 수 있다. (행 17:2) 바울이 자기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 기록들을 인용하여 그들과 토론하며.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은 안식일에 그 모임의 장소에 이방인들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행 18:4) 그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토론하며 유대인들과 그리스인들을 설득하니라. 사도행전 대부분은 안식일을 유대인의 맥락에서 취할 뿐이다. 오직 몇 개의 구절만이 이방인 편에서의 안식일 준수를 나타낸다.

서신서들은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오직 한 문장에서만 언급한다. (골 2:16)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골 2:17)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이 구절이 주간 안식일이 폐해졌다는 것으로 많이 이용되어 왔다. 그 선행 구절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힌” 것으로 가정되었기 때문이다. 이 해석은 그 주제가 언급하는 것에 관해 히브리어 구절들을 살펴보라는 신약의 글들에 관한 해석적 원칙을 등한시한다. 신약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 기록에 관해 대단한 해설 책이다. 심히 연약한 해석이 이 필수적인 요인을 고려하는 데에 실패하는 결과다. 16 절에서 언급된 다섯 가지 주제들이 오직 한 곳에 모두 모여있다: 레위기 23 장. 주간 안식일, 매 월의 첫 날, 연간 절기들에 합당한 동물 제사와 음식과 음료 예물이 그 장에서 제시되어 있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해석하는 데에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그 당시에 살았고 그 환경들을 알았던 베드로도 그것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 중에 가장 노련하고 지식이 있는 사람도 우리가 바울에 관하여 연구할 때 잘못된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독단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바울의 서신서들은 일반적으로 세부적으로 서술되지 않은 특정 문제들의 관점으로 특정 에클레시아에 관해 언급되며 단지 암시만을 줄 뿐이다. 우리 모두는 필수적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문제들의 힌트로서 히브리어 성경 기록 언급들을 취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잠정적 가정을 세울 수 있다. 세 종류의 날들에 드려질 음식과 음료 예물에 관하여 그 에클레시아 내에 갈등이 있었다. 그것들이 다가올 것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이미 성취된 경우에 있기에, 바울의 반응은 그러한 예물을 드릴 것인지 말 것인지 또한 어떻게 드릴 것인지에 관한 그 이슈를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가르침의 정도이며,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그 문장에 각 개인의 성향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 문장은 동물 제사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그것들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드려질 수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어떤 이들은 그 음식과 음료 제사에 대해 같은 것을 말하고 있었고, 다른 이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 문장은 또한 그 에클레시아의 사람들이 안식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언급된 모든 절기들을 준수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울의 언급은 그러한 준수가 옳은지, 대체되었는지, 그른지 또는 필요한지에 관한 암시를 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이슈에 관해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오직 그 시대의 음식과 음료 예물에 관한 이슈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그것들이 갈등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비록 일부 언급들이 날들에 관하여 관련이 있기는 하나, 안식일이라는 단어가 서신서들의 다른 곳에서 나타나지는 않는다. 안식에 대한 언급으로, 일곱째 날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남아 있는 것으로 히브리서 4 장에서 호소된다. 그 구절은 실제적 안식일 준수에 관해,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요컨대,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은 안식일에 관해 새로운 정보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 책들은 변화를 보장하는 논의를 제공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만약 그것들이 안식일이 폐지되었거나 폐하여졌다고 가르쳤다면, 무엇이 그것을 입증하겠는가? 그것은 단지 그 서신서들이 율법과 복음과 함께 충돌 중에 있음을 입증할 뿐일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는 그것들을 정전 외의 것과 거짓된 것, 신성의 계시가 전혀 아닌 것으로 거절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들이 견고히 서는 바와 같이, 그것들은 안식일과 관련하여 율법에 대한 필수적이고 영적인 이해를 제공하는 복음과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다.

안식일: 그것에 관해 생각하라…

불합리하고 이상한 전개에 의해,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자들은 종종 율법주의라며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 율법의 다른 모든 도덕적 원칙들을 모두에게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간음, 살인, 도적질과 그와 같은 것을 피할 것을 기대한다. 어떤 도덕적 관습에는 율법주의를 적용하고 다른 것에는 적용하지 않는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안식일에 관련된 모든 것이 예식적인 것이며 다가올 것의 그림자라는 편견이나 오해에 기초한 것이다. 그들에게 안식일은 동물 희생 제사, 음식과 음료 예물, 사망 선고, 진설병을 새로 교체하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것이며,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십계명에 제시된 안식일의 도덕적, 사회적 측면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며, 복음서에 제시된 대로 신성의 자비의 매개체로서의 안식일도 인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이 안식일과 관련하여 율법주의자들이다.

안식일 준수는 간음과 살인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이,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에 관해 설명한 바울의 교훈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율법과 믿음에 관한 그와 같은 견해가 일부일처주의자와 비폭력주의자에 의한 것과 같이 안식일 준수자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성경에서 보여진 대로 안식일은 은혜와 믿음에 의한 구원의 경험과 그 개념을 발전시킨다.

크리스챤들에 의해 제기되는 안식일 준수를 반대하는 네 가지 논쟁이 다음과 같다. 1) 신약 성경에는 십계명의 다른 모든 계명들에 관한 직접적 명령들이 있으나, 안식일에 대하여는 없다; 2) 야후슈아께서 안식일을 범하셨으며, 그로 인해 그것이 폐해진 것임을 나타내셨다; 3) 안식일은 그 전체가 다가올 것의 그림자이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식적 의무로만 구성된다; 4) 신약 성경의 문장은 초기 에클레시아가 안식일을 준수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구약 성경에 기초한 네 가지 주요 논쟁들 모두 여기에서 충분히 자세하게 다루어졌다.

요컨대, 안식일과 관련된 구절들의 성경적 조화는 어려운 것도 아니며 복음서와 충돌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복음 그 자체를 더 잘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은 신성의 주권에 대한 인지를 긴밀하게 통합시킨다. 그것은 야후와를 창조주와 공급하신 분으로 비춰준다. 그것은 도덕적 명령들 가운데 존재하는 강력한 그 권능이 정글의 법칙 하에 인간 사회 내에서 단순한 정의와 질서 차원으로 변형되는 것을 막아준다. 안식일은 생명과 자비의 복음이 세상에 침투될 수 있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것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 끼쳐야 할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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