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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 순종의 중요성

성경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은 바울의 로마서를 먼저 생각한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의로움에 대하여 온전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종과 구원과의 관계에 대하여 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우리는 그곳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킹제임스 성경에서 순종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으며, 순종이라는 단어가 성경의 다른 어떤 곳에서 보다 더 로마서에서 많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다. 모두 다섯 번 나온다. 바울은 이 놀라운 주제를 단순하게 전개해서, 우리는 그것을 다섯 손가락과 같이 기억할 수 있다.

순종이라는 주제가 로마서의 맨 첫 단어부터 마지막까지 사랑으로 그 토대를 이룬 가운데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야후슈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야후와의 복음을 위해 구별되었는데, (이 복음은 그분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성경 기록들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분의 아들 야후슈아 우리의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야후와의 아들로 권능 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 그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믿음에 순종하게 하였나니 너희도 그들 가운데서 야후슈아의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로마서 1:1-6.

바울은 믿음에 대하여 순종으로 시작한다. 이것이 맨 처음 단계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수하는 곳이지만, 이것이 옳은 출발이다. 그들은 순종과 믿음이 마치 분리될 수 있는 것처럼, 심지어 상호 배타적인 것처럼, 그 둘을 구별한다. 바울에 따르면, 복음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는 한 편에서 순종을 가르치고 다른 편에서 믿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는 믿음의 순종을 가르친다. 세상 교회들은 야후슈아를 믿는 것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헛된 신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이 아는 믿음은 믿음의 순종이다.

구주의 손바울은 어떤 믿음의 순종에 관하여 말하는 것인가? 그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규명하진 않지만, 우리에게 큰 힌트를 주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들 가운데의 믿음의 순종이 그가 목표하는 바였고 그리스도의 초청을 전하기 위해 사도로서 나아가는 것이 그가 원하는 바였다. 구원의 첫째 요지는 우리가 행해야 하거나 믿어야 하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해, 우리에게 행해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받는 초청이다. 믿음의 순종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초청을 나타낸다.

복음서에 묘사된 대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맨 처음으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구원의 첫 단계를 이루고 계셨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분께서 제자들을 차례로 부르셨다. 믿음의 순종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거나 구원을 찾기 위해 연구하고 시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듣는 것이다.  

순종에 의한 의

구원 – 지성소에 있는 십계명“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로운 자가 되리라.” 로마서 5:19.

설교자들뿐만 아니라 회중들도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받는 것이 아님을 깨닫기 때문에, 순종에 의해 의가 이르러 온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 종종 실패한다. 야후와와 함께 의롭게 여김을 받는 모든 자는 다른 무엇이 아닌 순종에 의해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 온전하시고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에 의해 그들은 의롭게 여김을 받는다. 바울의 순종의 다섯 단계 중, 이것이 구원의 계획의 둘째 단계이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그것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죄인이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는 정죄 받지 않은 채로 [야후와] . . . 앞에 선다. 이는 그리스도의 의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이 그에게 전가된다.”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429쪽.

총체적 타락이나 원죄의 개념을 거절하는 데에는 각기 이유가 있지만, 바울은 여기에서 논리적 균형을 나타낸다. 죄와 사망은 한 사람의 행위에 의해 세상에 들어왔다. 우리가 오늘날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해도, 우리 자신의 잘못을 통하지 않고도 우리는 여전히 사망의 운명 앞에 놓인다. 따라서, 문제가 그렇게 이르러온 방식대로 그 치유법도 이르러 오는 것이 옳고 정당하다. 한 사람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우리의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구원에 필요한 순종을 위한 논리적 토대가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있다.

순종에서 의로움으로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너희를 지배하지 못하리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를 지으리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누구에게 종으로 내주어 순종하게 하면 너희가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나 야후와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되었느니라.” 로마서 6:14-18

움켜쥔 손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중재, 속죄에 대한 깨달음이 사람의 품성을 변화시킨다. 한 때는 죄만을 짓던 사람에게, 사랑은 순종의 신실한 종이 되고자 하는 소망을 일깨운다.

엘렌 화잇은 이 경험을 명확하게 묘사한다. “신약의 복음은 죄인을 만나고 그의 죄에서 그를 구원하기 위해 구약의 기준이 낮춰진 것이 아니다. [야후와] 께서는 . . . 그분의 백성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분의 모든 계명에 전적으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께서는 하늘에 적합한 온전한 의로움을 요구하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이며 우리의 피난처다. 그분의 의로움은 순종하는 자에게만 전가된다.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죄를 발견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거룩한 율법을 짓밟는 자들은 그 의로움을 주장할 권리가 없을 것이다. 오, 우리의 속죄 희생 [야후슈아] 를 통하여 . . . 우리가 [야후와] 와 평화를 누린다는 것을 믿으며, [야후와의] 모든 요구사항들에 . . . 순종하는 자녀로서 구원의 계획의 거대함을 우리가 볼 수 있다면!”  리뷰 & 헤럴드, 1886년 9월 21일.

그 기준이 높다고 해서 누구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 희생의 척도가 최대의 구원을 베푸시는 야후와의 능력에 대한 보증이다. 회개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라는 축복을 받으며 그것은 계명의 순종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계명을 지킬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사탄이다. 엘렌 화잇은 기록했다, “[야후와의] 계명을 . . . 범하는 모든 자는 율법이 의롭지 않으며, 순종할 수 없다는 사탄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원수의 기만을 후원하며 . . . [야후와] 께 모욕을 안긴다.” 얼마나 많은 설교자들이 매주마다 그러한 설교를 하고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을 베푸신, 야후와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는 계명을 지킨다.” 라는 설교가 근래에 강대상에서 설교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교가, 야후와께서 어쨌든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므로, 우리의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께 불순종할 수 있다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의 칭의의 개념은 다른 것이다. 진정한 칭의는 계명에 순종하는 열매를 맺는다.

불순종을 통한 연합

“형제들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리에 역행하여 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족하게 하는 자들을 주목하고 그들을 피하라. 그런 자들은 우리 주 야후슈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 배를 섬기며 좋은 말과 빼어난 말솜씨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속이느니라. 너희의 순종이 모든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으므로 내가 너희로 인해 기뻐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선한 것에 대해서는 지혜롭고 악에 관해서는 순진하기를 내가 여전히 원하노라. 평강의 야후와께서 곧 사탄을 너희 발 밑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야후슈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로마서 16:17-20.

바울의 순종에 대한 연구 중 넷째 단계는 교리 안에서의 연합이다. 이것은 놀라울 수도 있으나, 매우 논리적인 사실에 있어서 그러하다. 분파, 특히 교리적 분파를 만드는 것은 외관상, 논리적 사고나 기질에서의 차이가 아니다. 분열은 사실 단순한 불순종, 야후와의 명확한 말씀에 대항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 초래된다. 순종의 정신은 실제로 교리의 연합을 가져온다.

사람들이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모든 변명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순종의 정신이 있느냐 없느냐 에서 비롯된다. 계명이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하다, 야후슈아께서 우리의 안식이시다, 와 같은 모든 변명들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자 하는 단순한 바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 질문에 접근했더라면, 그들은 그 구절들의 다른 의미를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불순종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니라 안식일 준수에 대한 타당한 이유를 찾고자 바라며 그것들을 읽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교리적 분열의 모든 질문들과 함께 그러하다. 그것들 중 일부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로서, 야후와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로부터 마음을 분산시키고자 제기된 것들이다.

온전한 순환: 믿음의 순종

"나의 복음과 야후슈아를 선포함에 따라 권능으로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즉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은밀히 간직되어 왔으나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엘로아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해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곧 홀로 지혜로우신 야후와께 야후슈아를 통해 영광이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로마서 16:25-27.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며 사용했던 거의 동일한 말로 그 서신서를 마무리한다. 그는 믿음의 순종이라는 주제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번에, 믿음의 순종은 그리스도의 초청이 아니다. 시작이 아니라, 그 초청에서, 우리는 마지막, 목표를 발견한다. 믿음의 순종은 이제, 다섯째 단계로서, “당신을 굳게 세우는 능력” 이다. 끝에서는, 처음과 같이, 그것은 사람의 성취가 아닌, 야후와께서 하시는 어떤 것이다. 우리를 세우는 것은 야후와의 능력이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의 순종은 인간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야후와의 일이다.

기도하는 사람들신도 개인의 삶에서 계명들에 따라 행해지며 나타나는 순종은, 시작과 마지막 단계인 신성의 은혜에 의해 울타리가 쳐지고 보호된다. 편지지 앞에 있는 자녀 뒤에서 보이지 않게 서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두 팔로 그를 안고, 펜을 움켜쥔 그 서투른 자녀의 손을 인도하신다. 그 결과는 십계명에 대한 반응으로서, 그 십계명은 야후와로부터의 약속들로 채워진 달콤한 사랑의 편지다. 그 결과는 생명으로서, 그 생명은 야후와를 향한 사랑의 편지다.

그리스도의 초청은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이끈다. 그것은 은혜에 의해 신도에게 주어진다. 그 사랑의 선물을 깨달으면 신도는 은혜의 능력에 의해 야후와의 율법에 순종하게 된다. 그런 순종은 신도들 간에 교리를 연합시켜주고 분열을 없애준다. 그 모든 것의 끝은 야후와의 능력이 복음 안에서 우리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을 향한 순종의 중요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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