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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아버지]의 인


야후와[아버지]의 인 = 신적 보호

야후와[아버지]의 인은 전에 이해되어져 온 것보다 훨씬 더 범위가 넓다. 그것은 신성의 율법에 따라 살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영적인 보호를 제공해준다. 이것은 제칠일 안식일, 초하루, 연간 절기들에 예배 드리는 것을 포함한다.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주는가?

진지하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주려 하는가?

당신이 아무리 최고라 여기는 어떤 그림이나 조각품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가지고 미켈란젤로에게 도전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당신은 줄리아 차일드에게 한판의 초콜릿 칩을 가지고 가서 겨루고자 하지 않을 것이고, 크리스챤 디오르에게 가서 당신의 셔츠 만드는 기술을 자랑하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말들이 충분치 않다면, 사랑에 충만한 마음은 그 사랑을 어떤 행동을 통해 보여주기를 갈망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선물을 드리기를 원한다면 문제는 훨씬 더 커진다. 당신이 창조주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떤 말도 충분치 않으며, 어떤 선물도 풍족하지 않고, 사랑으로 넘치는 마음이 그 사랑을 표현하고자 할 때, 딱 한가지만 남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유전과 전통이 남겨져 있을 때, 창조주께서 실제로 그의 피조물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많은 것들은 아니다. “사람아, 그분이 너에게 무엇이 선한 것인지 보이셨나니; 야후와[아버지]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야후와[아버지]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겠느냐? (미가 6:8)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위한 오직 한가지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부터 오는 순종이다.

순종의 선물

슬프게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만든 유전과 전통에 묶여 있다. 너무도 자주 바리새인적인 규칙들과 의무들을 요구한다. 그것들로 자신들이 자긍심을 느끼려 하고 자신들이 무엇인가 뛰어난 사람으로 느끼고자 한다. 그들은 마치, 선지자 엘리사가 그에게 그저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고 했을 때 화가 난 나아만 장군과 같다.

나아만은 실망하고, 떠나가며, 말했다.. 보라 나는 생각하기를 그가 내게 와서 야후와[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환부에 손을 얹고 나병을 치료할 줄 알았도다.

다마스쿠스강 아바나와 바르발이 이스라엘의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그가 분노하며 몸을 돌려 떠나니 (왕하 5:11-12)

경배하는 방법으로, 창조주의 간단한 요구가 주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뒤로 물러가기에 빠르며, 불평한다. 나아만의 종들의 대답이 그에게 다시 고려해볼 곳을 간곡히 부탁했다. “만일 선지자가 당신에게 더 큰 일을 요구했을지라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13절)

창조주를 경배하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은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흥미로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내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야후와[아버지]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야후와[아버지]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계 7:1-4

야후와[아버지]의 인은 지구상에 사는 모든 영혼들에게 필요한 가장 중요한 영적 선물이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 위에 자비가 섞이지 않은 야후와[아버지]의 진노가 쏟아질 때, 야후와[아버지]의 인만이 영원한 삶과 영적 보호를 제공한다.

야후와[아버지]의 심판은 그의 백성을 압제하고 괴롭힌 자들에게 내릴 것이다. 그분이 죄로 물든 악한 사람들을 오래 참으심으로 자비를 베풀고 계시지만, 심판이 지연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형벌은 끔직한 것이다. 야후와[아버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나훔 1:3]

공의로움 속에 무서운 일은, 그분께서 그분의 짓밟힌 율법의 권위를 되찾으실 것이라는 것이다. 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보복의 중대함은, 공의를 집행하시기를 참고 계시는 그분의 자비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분이 오래 참고 계신 그 나라들은, 야후와[아버지]께서 계산하시기에 불법의 정도가 꽉 차기까지 진멸치 않고 계신데, 결국은 자비가 섞이지 않은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1 

짐승의 표는 숙고되어져 왔고, 여러 세대 동안 설교되었으며 논쟁을 거쳐 왔다. 그러나, 당신을 짐승의 표로부터 보호해 줄 한가지가 있는데, 소수의 사람들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WLC의 글 중에 기술한대로, 야후와[아버지]의 인은 창조주를 그분의 거룩한 제칠일 안식일에 경배하는 회개한 믿음의 사람들에게 내려진다. 그 제칠일 안식일은 그분의 태음력 달력에 의해 계산된 것이어야 한다. 성경을 부지런히 연구한 결과, WLC팀은 야후와[아버지]의 인은 제칠일 안식일뿐만 아니고 야후와[아버지]의 모든 거룩한 날들을 포함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순종하는 마음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만드신 분에게 경배하도록 초청받은 때인 거룩한 날들의 세가지 범주는 아래와 같다:

1. 매주 제칠일 안식일

2. 매달 초하루

3. 매년 절기들

매주 안식일

성경은 매주 제칠일 안식일에 예배드릴 것을 명하고 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야후와[아버지] 야후와[아버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야후와[아버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야후와[아버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8-10)

매달마다 4번의 안식일이 있다 (태음력 달력에 있는 달)

창조주의 달력 

매달 초하루

각각의 새로운 달의 시작이 되고, 새로운 달을 위해 매주 싸이클이 다시 시작이 되는 지점이 되는 초하루는 거룩한 날이다. 시간을 지키는 수단으로서 야후와[아버지]의 정확성, 곧 달은, 그것이 왜 충성된 증인이라 불리는지 알려준다. “궁창의 확실한 증인 달 같이 영원히 견고하게 되리라 하셨도다” 시편 89:37 매해 12번 또는 13번의 월령이 있으며, 매달은 초하루 예배 드리는 날로 시작됩니다.

매년 절기들

야후와[아버지]의 연간 절기들은 레위기 23장에 모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그 절기들은 영영한 언약으로서 반복적으로 지켜져야 할 것이 명하여졌습니다. 그 절기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유월절

2. 무교절

3. 초실절

4. 오순절

5. 나팔절

6. 대속죄일

7. 장막절

사람들은 이러한 간단한 요구들에 순종하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들을 불편하게 여기며, 심지어 그 절기들을 지키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에게 그것은 유대인의 절기들이야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멸망을 위해 익어가고 있습니다. 야후와[아버지]는 단지 조금만 더 죄인들을 참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자비가 섞이지 않은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야후와[아버지]의 상속자들과 기름부음 받은 야후슈아[아들]의 공동 상속자들이 될 자들은 특별한 자들일 것입니다. 야후와[아버지]가 받으실 특별한 자들은, 세상과 섞이지 않고, 야후와[아버지]의 편에 선 자들이며 야후슈아[아들]의 이름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자들입니다. 불신자들 앞에서 세상의 유행을 버리고 [구주]의 자기 부정의 삶을 본 받고 자신의 입장을 양심적으로 나타낼 용기가 없는 사람은, 그분을 부끄러워하며 그분의 본을 사랑하지 않는다.2

그래서, 당신은 모든 것을 가진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려 합니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찬 의지의 순종. 현명한 부모는 자녀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사랑과 신뢰를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야후와[아버지]는 그분의 피조물들이 그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갖는다는 것이 필요함을 아셨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될 수 있는 한 방법을 사랑으로 제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배 드리는 거룩한 날들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woman worshiping

사탄은 많은 이들로 하여금 예배 드리는 날을 천국에 들어가는 보증 티켓으로 여기도록 유혹하였습니다. 어떤 것도 진리로부터 떠나 존재할 수 없습니다!  “야후와[아버지]는 영이니시; 그에게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의무로 생각되는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가장 높은 단계는 즐겨드리는 순종입니다.

사전은 예배를 활동으로 정의한다: “높은 존중과 존경을 가지고 경배하는 것, 신성의 경의를 표하는 것, 찬양하는 것 … 각별한 사랑과 극진한 순으로 경의를 표하는 것….3

진정한 예배는 사랑의 마음으로부터만 나옵니다. 즐겨 순종하는 것은 예배의 가장 높은 단계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야후와[아버지]의 인을 받습니다.

산 위에서 그분의 설교에서, 마지막에 버림 당할 자와 구원 받을 자의 차이점을 설명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내게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내어 쫓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들을 행했잖아요?

그 때 내가 그들에게 밝히 공언하기를, 내가 너희를 전혀 알지 못했다: 내게서 떠나라, 너희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마 7:21-23)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자들이, 종교로서일해 왔고, (천국에 들어 가게 보장해 주는) 수단으로서 “예배 드렸던” 사람들은, 결국 버림 당할 것이다. 야후와[아버지]의 인을 받는 자는 구속주와 그분의 아버지와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던 자이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했기 때문에 창조주의 뜻을 행하여 왔다. 야후와[아버지]를 아는 것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다. 당신이 그분을 안다면, 당신을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당신이 그분을 사랑한다면, 당신은 모든 것들에 있어서 그분께 복종하기 원할 것이다.

사랑 받은 제자 요한은 이것을 이해했다: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아는 것을 아나니.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으니라.

그러나 그의 말을 지키는 자는, 야후와[아버지]의 온전케 된 사랑이 그 안에 거하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 분 안에 거하는 줄 아느니라. 그 안에 거한다고 말하는 자는, 그가 행하신 것처럼 자신도 행해야 하느니라.  (요일 2:3-6)

예배일: 감사를 표현할 기회

감사와 사랑이 보류되거나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들이 기울여 지지 않을 때, 친밀하고 사랑스런 관계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야후와[아버지]는 이것을 알고 계셨다. 그분은 당신의 예배가 필요치 않았다. 그분은 당신의 감사도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드릴 필요가 있다. 인간의 마음에 그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창조주께서 창조 때부터 일곱째 날과 월삭4 을 쉼과 휴식의 날로 따로 정해 놓으셨다: “일곱째 날에 엘로힘께서 그가 하신 일을 마치셨고; 그가 만드신 모든 일로부터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엘로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는 엘로힘께서 창조하시고 만드신 모든 일로부터 그 날에 안식하셨기 때문이라.” (창 2:2 and 3.)

boy giving mom a rose죄가 들어오면서, 타락한 죄인들과 거룩한 신성의 아버지 사이에 큰 구렁이 놓아졌다. 타락한 자가 그분과 가깝게 교제하기 위해서는 이 구렁을 건너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연간 절기들을 제정하셨다. 사람들이 연중 정해진 때에 모여, 그분의 축복들과 보호에 감사와 사랑을 가지고 기억하게 끔 하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다.  

좋은 부모는 아이들이 부모에게 돌려 주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런 환경들을 마련할 것이다. 아빠는 또 다른 넥타이가 꼭 필요친 않다. 엄마는 또 다른 방석이나 편케익이 꼭 필요친 않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을 경험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현명한 부모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할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의 선물, 일상적인 식사, 물 한 잔을 포함해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라고 아이들이 말하게 함으로, 부모는 사랑을 주는 자라는 인식을 아이들이 하게 되고 그 마음 속에 사랑을 키워 가게 된다. 받는 자로서, 아이들은 감사하는 마음을 발전시키게 되고 차례차례 사랑도 발전시키게 된다. 이것이 예배의 진정한 가치이며 매주 매달 연중 예배 드리는 때를 신실하게 구별해 놓으신 목적이다: 감사를 사랑을 낳는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 일에 우리들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시기 위해서 거룩한 날들을 지키는 법을 만드셨다. 농경 사회에서 이것은 매우 분명하였다. “그분이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태양을 비추시고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비를 내리시기.” (마 5:45) 때문에 농작물은 자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이 가게나 시장에서 음식물을 구입할 때, 우리의 축복들이 어디서 온 것인지 생각하고 공급하신 분의 선하심과 관대함을 인정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믿는 자의 마음에 감사가 일깨워질 때, 사랑이 일깨워지고 믿음이 깊어진다. 이것이 각 개인이 구주와 친밀하고 밀접한 우정 관계로 들어가는 방법이다. 그리하여 결국 그분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분이 그들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표면상으로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지식을 나타낸다.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임신하고 출산했다…” (창 4:1) 주여! 주여! 부르짖는 자는 그분을 표면상으로 아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과 친밀한 자들만이 그분께서 진정으로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그분을 알기 때문이다.

야후와[아버지]의 거룩한 날에 예배 드린 적 없이도 구원 받는 것이 가능한가요? 물론입니다. 야후와[아버지]는 알지 못하고 지은 죄들을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무지의 시대는 야후와[아버지]께서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든지 모든 사람에게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행 17:30) 옳은 것을 진심으로 행하기 바라는 자에게는 알지 못하고 지은 죄들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야후와[아버지]의 요구들을 아는 자는 그 누구도, 처벌 없이, 계속해서 그 요구들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공공연한 반란의 삶이다.

야후와[아버지]의 친밀한 친구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자들로, 모든 세대를 걸쳐 그분이 지정한 달력으로 정한 때에 모일 것이다. “야후와[아버지]가 말하노니, 모든 육체가 매 월삭과 매 안식일에 내 앞에 경배하러 나오리라.” (사66:23)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게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분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지금 당신에게 주어졌다. 그분의 본래 달력에 의해 계산된 그분의 거룩한 날에 그분을 경배하겠다고 다짐하라. 당신을 만드신 분과 친밀한 우정을 나눈 것에 대한 보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영원히 주어질 것이다.


, The Great Controversy, p. 627.

2 Ellen G. White, Spiritual Gifts, Vol. 4b, p. 77.

3 Noah Webster,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1828 ed.

4 월삭이 창조 시에 제정됐다는 사실은, 태음력 달력이 세상의 창조 시부터 시간 측정 방법으로 야후와[아버지]께서 정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다. 창 1:14-15는 말한다: “엘로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궁창에 빛들이 있어 밤으로부터 낮을 나누라 하시고; 그 빛들로 징조절기와 날과 해를 이루라 하셨다: 하늘의 궁창에 빛들이 있어 땅에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징조”라고 번역된 단어는 ôwth, #226로부터 왔다. 그것은 신호, 징후의 기념물을 뜻한다. “절기”라고 번역된 단어는 mô’êd, #4150로부터 왔다. 그것은 야후와[아버지]의 백성들의 예배 집회를 말하며 연간 절기들을 설명하기 위해 레위기 23장에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