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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언약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신성의 계약

새언약의 조건은 옛 언약의 조건과 같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집을 구매하는 일에 있어서, 매리와 제임스 허드는 미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허드 부부는 1944년 5월 9일에 집을 한 채 구매했는데, 그들의 이웃인 레나와 프레데릭 핫지는 허드 부부를 상대로 그 집을 구매하거나 그 집에 살지 못하게 하고자 소송을 걸었다. 이유인 즉, 흑인이 자신들의 집 옆에 살면 자신들의 집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 집이 1905년에 지어졌을 때, “흑인에게는 이 집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다”1라는 계약 조건이 있었다. 결국 이 분쟁이 미국 대법원까지 갔다.

16 Bryant St., NW, Washington, DC

이 집이 미국의 법을 바꿨다: 16 Bryant St., NW, 워싱턴 DC.

아이러니하게도, 수석재판관들 중 두 명이 그들 스스로 회피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어느 특정 인종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들의 집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조건이 적용되고 있는 지역에 살았기 때문이다. 거의 4년 간의 많은 논쟁 끝에,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허드 부부의 손을 들어주며, 흑인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과 심지어 일부 종교인들에게 까지도 재산 매각을 금지했던 여러 다른 계약 조건들을 폐지하는 길을 열게 되었다.

주택 소유주 연맹들이 외부 페인팅 계획들, 조경 등에 관한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미국에서, 위와 같은 법적 분쟁들이 더 일반화되었다.   법률적 계약은 명료하다. “어떤 것을 하거나, 하지 않기로 하는 두 개체 사이의 동의, 계약 또는 기록된 약속.”2

성경 또한 법률적 언약 관계를 제시한다. 그것은 모든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법적 계약이다. 그것은 지극히 높으신 분과 영혼의 구원을 위해 사는 모든 개인 사이의 계약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확히 그 동의가 무엇이며 그 동의로부터 혜택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혼돈스러워 한다. 성경은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에 대해 언급한다. “옛”이라는 용어와 “새”라는 용어 자체가, 그 두 언약 사이에서 차이가 있다고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오해는 많은 오류들로 인한 것이다. 오류가 생긴 주된 원인은 “새 언약” 하에서는, “율법이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신념 때문이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야후슈아의 죽음과 함께 모든 사람은 신성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 졌으며 더 이상 그것들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야후와의 율법은 그분의 사랑이라는 품성이 새겨진 것이다. 요한은 기록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야후와를 알지 못하나니; 야후와는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요한일서 4:8) 창조주께서 그분의 말씀을 통해 선포하신다: “나는 야후와라, 나는 변함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라기 3:6)  죄를 짓고 있는 자녀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품성 때문이다. 만약 인류가 신성의 율법을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었다면, 죄인들이 “소멸되는 것”을 막고 계시는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의 품성을 그분께서 말씀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법률은 필요하다

“야후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은 진리니이다.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 --시편 119:151-152

이 세상 어떤 나라도 법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늘 나라도 마찬가지다. 만약 법이 없어진다면, 모든 나라는 무정부 상태가 될 것이다. 신성의 율법을 범하여 이 땅에 죄라는 혼돈이 생겨났다. 신성의 율법은 행복과 거룩함을 위한 것이기에, 그것은 완벽하며 영원에 걸쳐 굳게 설 것이다. 새 언약의 약속을 받는 조건은 옛 언약의 유업을 받는 조건과 동일하다: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언약”으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 beriyth (#1285)에서 왔다. 이 단어의 의미는:

(단절의 의미에서) . . . (육체의 부분들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 언약, 리그, 연합, . . . 첫 언약이 창세기 6:18에 나온다 . . . 언약의 많은 부분은 사람과 맺은 [야후와의] “언약들”이다. . . [야후와의] “언약”은 사랑이라는 관계이며 [그분과] 그분의 택한 백성 사이의 충성의 관계이다 . . . (출 19:5-6)3

아브람 (그리고 그의 씨) 와 야후와와 그분의 씨 (야후슈아) 사이의 언약 동의는 아브람이 그 희생 제사들을 나누고 야후와께서 그들 사이를 지나가셨을 때 비준되었다. 고대에 법적 계약을 비준하는 방식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이 계약이 내게 이루어질 것이며, 만약 내가 이 계약을 어긴다면, 더 심한 대가를 내가 치를 것이다.” 할례 의식이 그들의 언약 동의에 대한 표징으로 그 때에 주어졌다.

옛 언약은 십자가에서의 야후슈아의 죽음을 바라보게 했다. 그것은 메시야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을 위한 용서와 정결케 함을 약속했다. 피 희생 제사들은 위대한 예표인 야후와의 어린양으로 성취될 원형을 가르쳤다. 그러므로, 구주께서 오시기 전에 살고 죽었던 모든 사람들도 여전히 그들을 위해 흘리신 그분의 피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있었다.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동일한 조건들을 많이 지니고 있다. 새 언약은 옛 언약에 있는 것들을 폐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경에 있는 새 언약의 법칙이다. 새 언약은 십자가에서의 야후슈아의 죽음을 되돌아보게 한다. 옛 언약처럼, 새 언약은 그들을 위해 이루어진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을 위한 용서와 정결케 함을 약속한다. 메시야의 죽음 전에 살았던 사람이던, 그 후에 살았던 사람이던 계약의 조건은 동일하다. 모든 개인은 자신을 위해 이루어진 그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너희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구원 받았으니,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엘로아의 선물이라.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니, 사람으로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2:8-9) 야후슈아의 죽음은, 두 언약 하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하다.

일반적인 실수

Under the Law? Or Under Grace?

율법 아래인가? 은혜 아래인가?

오류가 발생하는 것은 사람들이 메시야의 죽음으로 인해 “옛 언약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가정하며, “우리는 이제 은혜 아래 있기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거절한다: “나는 야후와라, 나는 변함이 없느니라.” (말라기 3:6) “야후슈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히브리서 13:8)

야후슈아의 죽음은 옛 언약의 신성의 조건들을 성취했다. 창조주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그분의 독생자가 죽도록 내어 주셨다. 그러나, 야후슈아의 죽음이 옛 언약의 인간의 의무사항들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조건들은 새로 태어난 모든 세대에게도 여전히 적용된다. 그 조건들은 명쾌하다: 구주의 희생의 죽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 순종하면 살고, 불순종하면 죽는다. 순종할 것인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은 인간의 몫이다. 당신이 순종하면, 당신은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당신이 불순종하면, 당신은 언약을 범하는 것이다.

첫 언약이 “실패”했던 것은 신성의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인간이 할 부분에서, 인간이 야후와의 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이다. 야후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의 포로 생활에서 구원하시자 마자, 그분께서는 그들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자 하셨다. 신성/인성의 언약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성경 구절들 중 하나가 이것이다:

모세가 야후와께 올라갔을 때, 야후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이르시기를, . . .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야후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야후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출애굽기 19:3-8)

“야후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신성의 율법이 선하고 필요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치가 않았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 신성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자신의 힘으로 지키려고 하는 모든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실패하게 된다. 6 주도 안 되어, 이스라엘 자손들은 타락하여 금 송아지를 만들며 신성 모독의 말들을 했다: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은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이니라.” (출애굽기 32:4)  이런 행동은 야후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그들의 언약을 분명히 범한 것이었다. 야후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너는 내려가라. 네가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온 네 백성이 스스로 부패하였느니라.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에서 속히 떠나 자기들을 위해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에게 경배하며 그것에게 희생물을 드리고 말하기를, 오 이스라엘아, 이것들은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이니라, 하였도다.” (출애굽기 32:7-8)

이스라엘이 야후와와의 언약 동의를 깨트렸을 때, 그분께서는 그 언약 중 그분의 부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였다. “야후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아 왔는데, 보라, 그 백성은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이제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에게 맹렬히 진노하여 그들을 소멸시키고 너로부터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니.” (출애굽기 32:9-10) 야후와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하셨으나, 그들은 결코 그들 자신의 힘으로 그 언약의 조건들을 지킬 수 없었다.

“새” 언약도 여전히 복종과 순종을 필요로 한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언약 관계에서 순종이라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하겠느뇨? 야후와께서 그것을 허락치 아니하시니,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워야 하느니라!” (로마서 3:31) 피의 희생 제사는 더 이상 실행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표로서, 그 실체가 갈보리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기들은 여전히 지켜져야 한다. 일곱째 날 안식일과 같이, 절기들은 야후와께 “거룩한 집회들”이다.

새 언약 &절기들

새 언약 하에서, 이러한 거룩한 절기들의 준수는 옛 언약 하에서와 다른 면이 있다. 동물 희생이 이미 성취되었으므로, 더 이상 동물 제사나 할례에 의한 피가 흘려질 필요 없다. 대신, 새 언약 하에서는, 야후슈아께서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 빵과 포도즙을 사용하여 제정하셨던 것처럼 거룩한 기념식을 진행하면 된다:

그들이 먹을 때에 야후슈아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다 그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용서를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26-28, 누가복음 22:15-20, 마가복음 14:22-24 참조)


야후와의 절기들:영속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약속”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 diatheke에서 왔다. 그것은 계약 또는 언약을 의미한다.4 그것은 히브리어에서 “언약”으로 번역된 것과 같은 단어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야후슈아와 뿌리는 피에 이르렀느니라.” (히브리서 12:24)

사도 바울은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의 새 언약의 확립이 옛 언약과 마찬가지로 순종이라는 동일한 조건을 가짐을 명백하게 보았다.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내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야후슈아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저녁 식사 뒤에 또 그와 같은 방식으로 잔을 집으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상속 언약이니 너희가 그것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셨느니라.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보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야후슈아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자기를 위하여 정죄를 먹고 마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1:23-29)

이것은 성경의 중요한 구절이다. 만약 율법이 정말로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면, 사람을 “정죄”하는 이러한 “무가치한” 상징들을 먹고 마신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 언약이 “영존함”을 밝혀준다: “이제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야후슈아를 영존하는 언약의 피를 통해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이끌어 내신 평강의 엘로아께서.” (히브리서 13:20)

Obtaining Yahuwah's Righteousness

야후와의 의를 얻기

야후슈아의 죽음이 언약 관계에 있어서, 신성의 조건을 충족시켰다. 신자들은 “새 언약” 하에 살고 있지만 새 언약은 여전히 “영존하는 언약”의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조건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제공된다. 신성의 부분은 충족되었다. 인간의 부분이 각 개인의 삶에서 충족되어야 한다. 그것은 신성의 율법에 대한 순종이다.

바리새인으로서, 바울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다른 어떤 저자보다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그 두 언약에 관해 기록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를 언급하며 신성의 율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을 설명했고, 옛 언약과 새 언약 둘 다에 있어서 사람이 지켜야 할 부분을 강조했다.

우리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복음이 선포되었으나 선포된 그 말씀이 그것을 들은 자들 속에서 믿음과 섞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들에게 유익을 끼치지 못하였느니라.

이미 믿은 우리는 안식에 들어가나니 이것은 세상의 창건 이후로 그 일들이 완성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이르시기를, …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려면 믿어야 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야후와의 백성에게는 한 안식이 남아 있도다. 그분의 안식에 이미 들어간 자는 또한 야후와께서 자신의 일들을 그치신 것 같이 이미 자기 일들을 그쳤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쓸지니 이것은 아무도 그 믿지 아니하던 동일한 본을 따라 넘어지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2-6, 9-11)

창조주와 언약의 관계로 들어갈 기회는 여전히 가능합니다. 당신의 수고를 내려 놓으세요. 구주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세요. 그분을 당신의 마음 속으로 오늘 초청하세요. 순종하면 삽니다. 믿음에 의해, 그분께서 당신 속에서 그분의 삶을 사실 때 가능합니다.

“내가 야후슈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야후슈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야후와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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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househistoryman.blogspot.com/2008/06/hurd-v-hodge-dc-racial-covenants-50th.html

2 http://legal-dictionary.thefreedictionary.com/covenant

3 뉴 스트롱스 성경 단어 확장 사전, 383쪽.

4 Diatheke, #1242, Ibid., p. 10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