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속담에 “교회가 가는 대로, 세상도 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마지막 시대에 사는 마지막 세대에게도 적용된다. 구주께서 세상의 마지막 때를 홍수 때의 세상과 연결 지으시며 말씀하셨다:
오직 노아의 날들과 같이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홍수 이전 시대에 노아가 방주로 들어간 날까지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쓸어버릴 때까지 알지 못하였나니,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도 그러하리라. (마태복음24:37-39)
홍수
전의, 세상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에 빠져 있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섹스
– 모두가 신성의 실체들에 대해서는 감지하지 못했다. 그와
같은 일이 오늘날의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음식, 섹스, 영화, 오락에
집중하고 있다 – 세상이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에는
눈 멀어 있으면서, 오로지
그들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것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적인 상태들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에클레시아도, 세상과 같이, 신성의 실체들에 대해 눈 멀어 있다. 에클레시아는 세상에서 빛이 되는 일에 실패해 왔으며, “종교적인” 평판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하나가 되어 왔다. 마지막 세대의 에클레시아가 자신의 진정한 상태에 대하여 눈 멀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야후와께서는 알고 계셨다. 자비하심으로, 모두가 경계해야 할 지극히 중요한 경고를 야후와께서 보내셨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에클레시아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야후와]의 창조를 시작한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요한계시록 3:14-16)
슬프게도(그리고 얄궂게도) 이 경고는, 라오디게아 기별로 불려지며, 그것이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거절되고 있다.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3:17)
뜨거운 물과 찬 물을 섞으면, 그 결과는 차갑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은, 메스껍고 미지근한 것이 될 뿐이다. 마지막 세대의 에클레시아는 매우 뜨거운 열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교회”에 가며 심지어 주중에도 기도 모임에 참석한다. 그들은 그들의 돈으로 다양한 사역들을 지원한다. 그들은 복음주의적인 세미나와 금연 클리닉도 개최한다. 그들은 선한 일을 행하는 데에 매우 열심이나 . . . 그들의 마음은 차갑다. 그들이 하는 그 “뜨거운” 행동들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구원의 형태로 퇴폐되어온 것이다.
교만한 마음은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고 힘쓴다.그러나 하늘에 들어가는 자격과 적합성은 [야후슈아]의 의 안에 있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모든 자부심을 벗어버리고, 자신을[야후와]께 굴복시키기 전에는, [주]께서는 사람의 회복을 위하여 아무것도 하실 수 없다. 그때에야 사람은 [야후와]께서 주기 위하여 기다리시는 선물을 받을 수 있다.2
그리고 참으로 슬픈 것은, 그 뜨거운 모든 행위들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이, 그러한 행위들에 의해, 하늘에 가고자 하면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슨 일인지 진짜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눈 멀어 있으며, 하늘의 목전에서 그들이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과 모든 것에 있어서 부족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지 못한다. 그들의 종교는, 옛날의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차갑고 죄로 완악해진 마음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외면적인 종교다. 뜨거운 행위들과 차가운 마음의 결합이 “미지근한” 상태를 만든다. 그러한 상태는, 회개하지 않는다면, 야후와에 의해 비참하게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자비하심으로, 하늘
아버지께서 해결책과 치료법을 제공하신다: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 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
(요한계시록3:18)
그리고 사랑의 보증을 주신다: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요한계시록3:19, 20)
야후슈아 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 심지어 마지막 세대의, 라오디게아 상태의 죄인들을 위해서도. 마지막 세대의 독특한 특징들 중 하나가 눈 먼 것이기 때문에, 그 경고를 받는 자들은 반드시 그 개탄스러운 상태가 그들 각자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라오디게아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진정한 상태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에 의해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기별이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적용되는 것임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구원 받을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이어서 매우 특별한 그룹의 사람들에 대하여 묘사한다. 그들이 마지막 세대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들은 라오디게아의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라오디게아 기별이 그들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회개하여 왔다. 성경은 그들을 144,000 이라고 부른다.
또 내가 보니 살아 계신 [야후와]의 인을 가진 다른 천사가 동쪽으로부터 올라와 땅과 바다를 해할 권능을 받은 네 천사에게 큰 음성으로 외치며 이르되, “우리가 우리 [야후와]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그들을 봉인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하더라.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더라. (요한계시록7:2-4)
그144,000은 참된 증언의 권고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회개하며 구주께서 그들을 위해, 그들이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해주시기를 구하여 왔다.
그분[야후슈아]께서 제공하시는 금은 순수한 것이며, 오빌의 금보다 더 귀한 금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믿음과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영혼들로 하여금 입도록 권고하시는 흰 옷은 그분 자신의 의의 예복이며; 기름 부음을 위한 기름은 그분의 은혜의 기름으로, 그것은 눈 멂과 흑암 속에 있는 영혼에게, 야후와의 영의 역사와 원수의 영의 역사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영적 안목을 줄 것이다. 위대한 상인, 영적 부유함을 소유하신 분께서 말씀하신다. “네 문을 열라. 나와 거래하자. 나는 너에게 나에게서 구매하라고 권고하는, 너의 구속자라.”3
144,000 은 그들에게 제공된 그 금과 흰 옷과 안약을 받아 들일 때, 그들을 만드신 분의 형상으로 변형된다. 그 흰 옷은, 구주의 의로움으로써, 그들을 덮어 주며 그들은 사랑 받는 자들로 받아 들여진다. 그 안약은 죄에 눈 먼 그들의 상태를 치료해주고, 그들로 신성의 모든 요구들을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믿음과 사랑의 금은, 야후와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믿음과 신성의 율법에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 인도하며, 사랑이 그 동기가 된다.
이것이 144,000이
하늘에서 특별한 존귀를 받는 이유다.
또 내가 바라보니, 보라, 어린양께서 시온 산 위에 서 계시고 그분과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 안에는 그분의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더라. 내가 하늘로부터 나는 한 음성을 들었는데 그것은 많은 물들의 소리 같고 큰 천둥소리와도 같더라. 또 내가 자기 하프로 연주하는 하프 타는 자들의 소리를 들었는데, 그들이 왕좌 앞과 네 짐승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 같은 것을 부르더라. 땅에서 구속 받은 십사만 사천 외에는 아무도 능히 그 노래를 배우지 못하더라. (요한계시록14:1-3)
구주께 온전히 복종함으로, 그144,000은 변형되어 왔다. 비록 전에는 그들이 교만했고, 그들의 영적 안목, 그들의 행위들, 그들 자신의 “의로움”을 뽐냈었지만, 이제 그들은 구주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한다. 바울과 함께,그들은 고백한다: “내가 야후슈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후슈아 메시야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야후와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노라.” (갈라디아서2:20참조)
이 마지막 남은 무리들에 대하여 성경에 주어진 묘사는 전에 있던 다른 어떤 그룹에 대한 것과 같지 않다:
이들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니; 이는 그들은 처녀들이기 때문이라. 이들은 어린양께서 가시는 대로 그분을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야후와와 어린양께 첫 열매가 된 자들이더라. 그들의 입에서 교활함을 찾을 수 없었으니: 이는 그들이 야후와의 왕좌 앞에서 흠이 없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14:4, 5)
성경에서, “여자”는 에클레시아/교회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처녀”는 순결한 에클레시아에 대한 상징인 반면에, “음녀”는 타락한 교회를 상징한다. “뜨거운” 행위들을 가지고 있지만 “차가운” 마음을 지닌,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상태는 과거의 일이다.
야후슈아께서 교활하게 말하는 입이 교활함으로 가득 찬, 숨겨진 마음 상태를 드러낸다고 설명하셨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들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간음, 음행, 살인, 도둑질, 탐욕, 사악함, 속임, 색욕, 악한 눈, 신성모독, 교만, 어리석음이 나오는데, 이 모든 악한 것이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7:20-23)
성실한 사람도 여전히, 그들의 입에 교활함을 가진 채, 말과 본보기로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잘못된 것을 하거나 잘못된 날짜에 예배 드림으로써,진정으로 틀릴 수 있다. 그들의 입에 교활함이 없는 자들은 온전하고 깨끗하게 된 것이다. 안약이라는 선물에 의해, 그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야후슈아를 믿는 믿음에 의해, 그분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그들은 율법을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올바른 자리로 회복시켰다. 그들은 말과 본보기를 통해 선포한다.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로마서7:12)
하늘로부터 애원하는 음성이 오랜 동안 들려 오고 있다: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영혼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예레미야6:16) 144,000은 이것을 행하여 왔다. 신성의 안약에 의해 회복된 안목을 가지고, 그들은 야후와 의 율법을 연구하고, 기독교계가 불필요하며 폐기되었다고 선언해 왔던 율법의 많은 부분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것을 발견했다.
모든 종파를 포함하여, 전 세계 기독교계에 걸쳐 눈 멀어 있는 주요 부분은, 언제 예배 드리느냐에 관한 것이다. 그144,000 이 신성의 율법을 인식하게 된 후로, 그들은 선생이 되었다. 그들은 죄사함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많이 사랑하며, 또한 그들은 여전히 어둠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그들의 모든 힘을 들인다. 그들은 진리의 기준을 높이, 더 높이 끌어 올린다.
144,000 에 의한 이 일이 성경에 명확하게 예언되어 있다:
또 네게서 나올 자들이
오래되고 폐허가 된 곳들을 건축하며;
너는 많은 세대들의 기초들을 일으켜 세우리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자, 라 하며,
거할
수 있도록 행로들을 복구하는 자,라
하리라
네가
만일 네 발을 돌이켜,
안식일을 범하지 아니하고,
내 거룩한 날에 네 쾌락을 행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야후와]의 거룩한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하고,
그를 공경하며 네 자신의 길들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아니하며,
네
자신의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스스로 [야후와]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들에서 타고 다니게 하고,
네 조상 야곱의 유산으로 너를 먹이리라.
(이사야58:12-14)
이 성스러운 과업이, 야후슈아의 죽음 얼마 전, 그분께서 변화되셨을 때, 그분에 의해 친히 예언되었다. (마태복음17:1-13참조) 제자들은 혼돈스러웠다. 그들은 야후슈아께서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엘리야가 그분께 말씀 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을 뿐이었다!그들이 그분께 여쭈었다.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은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하나이까?” (마태복음17:10)
야후슈아의 응답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진 대답이었다. 그분께서는 먼저 144,000을 내다 보시며, 미래 시제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에게 확언하셨다: “엘리야가진정 먼저 올 것이며, 모든 것들을 회복하리라.” (11절) 144,000 이 엘리야의 일을 할 것이다. 신성의 율법을 드러내고, 회개하고 하늘의 야후와의 거룩한 날에 그분께 예배 드리기 위해 돌아오라고 모든 자에게 외칠 것이다. 그들이 엘리야의 원형이다.
그리고, 과거 시제로 전환하시면서, 야후슈아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이미 왔으되, 그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 그에게 행하였도다.’ . . . 그제야 제자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침례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마태복음17:12-13)
144,000 처럼, 침례 요한은 엘리야의 표상이었고,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하고 신성의 율법에 순종하라고 외침으로써 엘리야의 일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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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렐 탱크의 승인을 받고 사용함, darreltank.com. |
메시야 전에 오리라고 한 엘리야에 관해 물을 때, 제자들이 말하고 있었던 그 예언은 말라기 4장에서 발견된다. 그 예언은 구약 성경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예언으로서, 구약의 마지막 책 중에서도, 마지막 장의 마지막 구절들에서 발견된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모세의 율법을, 법규와 판단의 법도와 함께 기억하라. 보라,크고 두려운 [야후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대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낼 것이라. 그가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며,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들에게로 돌아오게 하여,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리라.” (말라기4:4-6)
이 예언이 구약 성경의 가장 마지막 말씀으로 놓였다는 것은, 이 권고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암시하는 듯 하다.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라”는 지시는, 잊혀져 온 어떤 것이 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인용한, 이사야58장의 예언은, 144,000 의 회복 사업을 안식일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그것은 매 주간의 일곱째 날 안식일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가 있다.
“모세의 율법”은 창조주의 거룩한 모든 날에 예배 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율례의 법을 포함한다.
“사람이 행하면 그 가운데서 살게 될 내 법규를 그들에게 주며 내 판단의 법도를 보여 주었고, 또 그들에게 내 안식일도 주어 나와 그들 사이에 표적이 되게 하였나니 이것은 내가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는[야후와]인 줄 그들이 알게 하려 함이었노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집이 광야에서 내게 반역하여, 사람이 행하면 그것들로 인해 살게 될, 내 법규 안에서 걷지 아니하며 내 판단의 법도를 멸시하고 내 안식일도 크게 더럽혔으므로 . . .
“그러나 내가 . . . 그들의 자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조상들의 법규 안에서 걷지 말고 그들의 판단의 법도를 지키지 말며, 그들의 우상들로 너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 나는[야후와 너희의 엘로힘]이니, 나의 법규 안에서 걸으며 나의 판단의 법도를 지켜 행하고,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할지니라. 안식일이 나와 너희 사이에 표적이 되리니 이것은 내가 [야후와 너희의 엘로힘]인 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노라.” (에스겔20:11-13, 18-20)
야후와와 그분의 백성 사이의 표징은 단지 일곱째 날 안식일만이 아니다. 그 표징에는,율례의 법의 일부인, 모든 절기들을 지키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절기들은 레위기 23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가장 먼저 소개되는 절기가 일곱째 날 안식일이다.
영어에서 “안식일”로 번역된 단어는 실제로 두 개의 히브리 단어들 중 하나로부터 온다:shabbâth (#7676) 과shabbâthôwn (#7677).
Shabbâth (#7676)Shabbath, 명사로서, “안식일”을 의미한다. . . . “안식일”은 창조에 대한 [엘로힘]의 주권의 언약적 표징이다.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이스라엘은 그들이 [엘로힘의]구속된 백성이라는 것을 고백했고, 그분의 율법 전체에 복종함으로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shabbâthôwn (#7677) asabbatism 또는 특별한 휴일: - 휴식,안식일.4
두 개의 단어가 레위기 23 장에서 교대로 사용되었다.
기독교계는 주(week) 의 일곱째 날에 예배 드리라는 명령인 넷째 계명을 무시했을 때, 그들은 야후와의 율법이 무효임을 선언한 것이다. 일곱째 날 안식일 준수자들 조차도, 연간 축제들, 연간 “안식일들”이 어쨌든 십자가에서 “폐지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신성의 율법을 깨트려왔다.
144,000 은 율법을 깨트리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다. 참된 증언의 권면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분으로부터 믿음과 사랑의 금과, 그분의 의의 흰 옷과, 신성의 안약을 삼으로써, 그들은 신성의 모든 율법의 영속성을 보게 된다. 그들은 “율례와 법도와 함께, [야후와의]종, 모세의 율법을 기억한다. ”그들은 일곱째 날 안식일에 창조주를 경배하며 연간 절기들을 거룩한 시간으로 구별한다.
일곱째
날 안식일과 연간 절기들은 모두
“야후와의 절기”다. 그
날들은 그분께 속한다.
144,000 은
신성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킴으로써,그들의
마음에 심도 깊은 정결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처녀들이며, 입에
교활함이 없다. 그들은
신성의 율법을 존귀히 여기고, 그들보다
먼저 왔던 침례 요한과 엘리야가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회개케 하고 거룩하고 신성한 율법에 순종하도록
이끌고자 노력한다.
야후슈아, “둘째 아담” 은, 그분의 아버지를 믿는 믿음을 통해 신성의 율법을 온전하게 지켰다. 144,000, 비유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는,어떤 의미에서, “둘째 이브”다. 야후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고,그들의 구주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들도 역시 신성의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 이것이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야후슈아의 믿음에 의해, 그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인간의 “믿음”은 충분치 않다. 이기는 모든 자는,야후슈아의 믿음에 의해 그렇게 한다. 이는 오직 그분의 믿음이 고난의 불 속에서 연단을 받고 정결하게 되어왔기 때문이다. 야후슈아의 믿음이 불 속에서 연단된 금이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구원과 힘과 우리 [야후와]의 왕국과 그분의 그리스도의 권능이 임하였도다. 이는 우리 형제들을 고소하는 자, 곧 우리 [야후와]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소하던 자가 쫓겨났기 때문이라. 또한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그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요한계시록12:10, 11)
“여기에 성도들의 인내가 있나니, 곧 여기에 [야후와]의 명령들과 [야후슈아]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느니라.” (요한계시록14:12) 144,000 은, 그들이 야후슈아로 하여금 그들 안에 살고 그들을 통해 살도록 허락하였을 때,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되었다.
144,000 은, 신성의 율법에 생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들로서, 야후슈아의 믿음에 의해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기억하고, 매 주간의 안식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연간 절기들에도 창조주를 경배한다. 라오디게아인들을 향한 참된 증언의 권면에 주의하며, 그들의 마음은 신성의 형상으로 변화되었고, 그들은 야후슈아를 위해 적합한 동역자이며 하늘 왕국의 상속자들이다.
지금,자비의
초청이 여전히 유효한 동안에, 야후와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기로 선택하세요.
144,000 가운데
있기로 오늘 선택하세요.세계
도처에 있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야후와의
율법을 존귀히 여기고 그분의 거룩한 모든
날들에 그분을 경배함으로써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함께 하세요.
관련 내용:
1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모든 성경 구절들은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인용했음.
2엘렌G.화잇, 시대의 소망, 300쪽.
3E. G. 화잇, “Look to God for Wisdom,” 리뷰&헤럴드, 1894년8월7일.
4뉴 스트롱스 성경 단어 사전 확장판, 8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