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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하고 & 울고… 달아나라!

마지막 세대를 향한 하늘의 메시지는 조직화된 모든 종교와 교단으로부터 달아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기득권을 가지고 사람들로 하여금 계속 교회에 나오도록 만든다. 그들은 교회가 배도 상태에 있다는 것이 명확함에도 불구하고 에스겔 팔장과 구장을 이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교회 구성원으로 머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난 놀라서 나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신디아는 세계 하나님의 교회의 평생 신도였다. 그 설립자, 허버트 W. 암스트롱의 죽음에 이어 신학적 변화가 생겼을 때 그 교단이 얼마나 심하게 분해되었는지 그녀는 이제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교단이 절기와 일곱째 날 안식일 을 포기하고 주요 복음주의 노선에 가까워지면서, 교인 수는 50 % 까지 감소했다.

랩탑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놀란 표정의 남자“완전히 황폐해졌어,” 신디아는 눈물을 흘리며 회상했다. 우리는 바로 우리가 남은 자손들이며 다른 모든 교회는 타락한 교회들이라고 배웠었지. 우리는 일곱째 날 안식일—그 때, 우리가 토요일이라고 믿었던 그 날에 예배를 드렸지. 우리는 야후와의 절기들을 지켰어. 우리는 삼위일체 이설을 믿지 않았어.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었어!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이 그러한 모든 신념들을 버리고, 절기를 거절하고, 일요일에 예배 드리기 시작했지. 그것은 내 평생에 가장 슬픈 경험이었어.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네.

“성경에 기초한 신념들 모두를 포기하려는 교회에 머물기를 거절했을 때, 우리는 거의 모든 친구를 잃게 되었어. 사람들은 우리에게 교회에 남아서, 변화를 위해 교회 안에서 노력하라고 말했지. 우리가 떠나자,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를 거부했어.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그들 스스로를 남은 자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떠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이제 잃어버림 당한 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증명한 것이지.”

난 1990 년대에 세계 하나님의 교회가 분해되는 것을 인지했다. 그들이 일요일에 예배 드리기 위해 안식일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는지 놀란 것을 제외하면, 그것은 나에게 그리 충격적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타락한 교회였으니까! 난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인이었고 우리가 남은 자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계 하나님의 교회는 타락한 또 하나의 교회일 뿐이었다. 신디아가 그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자신도 남은 자손에 속한다고 배웠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놀랐다. 왜냐하면 나는 그 교회를 타락한 교회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교회들은 자신의 교단이 유일한 참 교회이며 다른 모든 교단은 버림받았거나 “타락한” 교단이라고 여긴다. 결국, 당신이 “남은 자손” 에 속하려면 반드시 유일한 참 교회, 그들의 교회 교인으로 머물며 (십일조를 내야) 하는 것이다. 목사, 사제, 랍비들이 가능한 많은 교인을 확보하는 데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이 사실이다. 결국, 그들의 십일조와 헌금을 내는 그 조직은 그 지도자들의 월급을 지불하는 같은 조직이다.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오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면서, 종교 지도자들은 에스겔 8-9 장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 성경 구절을 해석하는 방식은 기만적이며 성경의 다른 구절들과 조화되지 않는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것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마이크

교회 지도자들은 설득력 있는 논법을 매우 잘 이용하여 마음이 신실한 신도들로 하여금 야후와께서 그들이 교회 안에 머물기를 원한다고 생각하도록 확신시킨다.

에스겔은 다니엘과 동시대 인물이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에스겔 8 장에는 예루살렘과 그 안의 성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가증한 것들에 대하여 야후와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성전은 아직 유다에 대한 느브가넷살의 제 삼 차와 최종 침공에 의해 파괴되지 않았었다.)

선지자는 네 가지 가증한 것을 보았다. 갈수록 더 나빠지고, 성읍과 성전으로 갈수록 더 심해졌다. 이러한 것들에는, 다른 것들 가운데, 숨겨진 우상 숭배와 담무스를 위해 우는 여인들이 포함된다—이것은 로마 카톨릭 에서 사순절로 알려진 행사이며 많은 개신교 교회들에서 영적 헌신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심지어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조차 “부활절 기념 증가” 를 목격하고 다양한 재림교회 출판물들은 사순절에 대한 긍정적 암시를 주어 왔으며, 다소간 개인과 회중들이 참여해왔다.

에스겔이 본 마지막 가증한 것이 최악이었다: “그분께서 나를 데리고 야후와의 집의 안뜰에 이르셨는데, 보라, 야후와의 성전의 문에 주랑과 제단 사이에 스물다섯 명 가량이 있더라. 그들이 자기들의 등은 야후와의 성전을 향하게 하고 자기들의 얼굴은 동쪽을 향하게 한 채 동쪽을 바라보며 태양에게 경배하더라.” (에스겔 8:16) 이것은 야후와를 경배한다는 명목 하에 행해지는 태양 숭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야후와를 대적하는 중대한 범죄다. 그 죄가 아무리 끔찍하다 할지라도, 종교 지도자들은 오늘날까지 야후와는 그 백성들이 그들의 교회 안에 머물기를 원하신다고 계속 주장한다. 교회로부터 스스로 분리되어 나가는 자들은 오류 속에 있는 것이며 버림 당하는 위험 속에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야후와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이며 야후와의 말씀과는 반대되게, 신실한 많은 영혼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 머물라고 이끌고 있다. 야후와께서는 말씀하신다: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 18:4)

야후와의 말씀을 왜곡하는 것

대학에서, 학위 취득을 위해 필요한 수업들 중 가장 흥미로웠던 수업은 논증 & 토론이었다. 교수님이 우리에게 설명한,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상대방의 주장을 그를 위해 언급하는 것이었다. 만약, 당신 자신의 순서에서, 당신이 당신의 논법에 반대되는 주장을 명확하게 인정한다면, 당신은 왜 그러한 주장들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할 좀 더 나은 입장에 있게 될 것이다. 당신의 입장에 반대되는 주장들을 부정하는 것만으로는 설득력이 강하지 못하다. 반대 의견을 말로 표현하고 그 다음 그 반대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논리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 있다.

이것이 정확히 그 사역자들이 에스겔 8 장과 9 장을 인용하며 행하는 일이다. 그들은 교회 안에 잘못 행해지는 일들이 있다고 인정한다. 거기엔 권위의 남용이 있고, 교회 자금의 부적절한 사용이 있으며, 오류를 가르치는 신학 교수들이 있고,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을 사용하는 목사들이 있고, 로마와의 화해를 분명히 권장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다 … 그러나, 그들은 주장한다, 교회가 그것들을 이겨낼 것이다. 교회와 함께 머물라.

이것에 대한 예가 캐리 뉴호프의 글에서 발견된다. 그는 말한다:

당신은 이런 말을 항상 듣는다.

난 교회랑은 끝이야.

나는 정말 교회 갈 필요가 없어하나님과 나의 관계는 개인적인 거야.

나는 조직화된 종교를 가져봤어.

교회는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야.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등지고 있는지 난 확실히 알아. 심지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도 결석을 자주 하지…

… 알겠어. 교회는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어. 인생은 복잡해. 많은 것들을 선택해야 하지. 포스트-모던 사고 방식은 조직화되거나 제도화된 대부분의 것을 불신하지. 그러나 교회를 낮게 평가하는 최근의 흐름처럼, 그것은 실수야.

교회를 낮게 평가하는 것이 세련된 생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야. 그것이 전혀 건설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끄는, 바보 같은 환원주의적 사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쩌겠어?1

이런 논리로부터, 뉴호프는 크리스챤들로 하여금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그들의 기독교인으로서의 의무라고 믿도록 만들기 위해 설계한 복잡한 언어의 거미줄 망으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만약 당신이 크리스챤이라면, 교회는 당신이 갈 어떤 곳이 아니다. 교회는 당신 그 자체인 어떤 것이다. 당신이 사람으로서 인류와 분리될 수 없듯이, 당신은 크리스챤으로서 교회와 분리될 수 없다. 당신은 교회 나가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교회다.”2  이러한 논리의 문제는 그것이 진리와 오류를 섞는다는 데에 있다. “당신이 교회다,” 라는 말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교회” 는 에클레시아, 즉 “불러냄을 받은 자들”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 교단이나 에클레시아이거나 에클레시아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뉴호프는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벽돌로 닫힌 출입문을 응시하고 있는 남자

교인들은, 그들이 교회 안의 문제들을 볼 때, 강대상으로부터 선포되는 오류를 볼 때, 교회 안에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고 울어야” 하지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결국, 지도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교회가 마지막 남은 교회이기에, 만약 그들이 떠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남은 무리가 아닌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완전히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결론을 낸다: “만약 당신이 교회를 없애기 원한다면, 당신은 예수까지도 없애야 한다. 당신은 이것 없이는 저것도 가질 수 없다.” 이런 논법은 불러냄을 받은 자들/에클레시아가 교단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와 같은 논법은 성령이 그들에게 떠나라고 명하는 그런 종교 조직에 사람들로 하여금 머물도록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다. 교인들은, 그들이 교회 안의 문제들을 볼 때, 강대상으로부터 선포되는 오류를 볼 때, 교회 안에 혐오스러운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고 울어야” 하지만, 어떤 환경 속에서도, 교회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결국, 지도자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교회가 마지막 남은 교회이기에, 만약 그들이 떠난다면, 그들은 더 이상 남은 무리가 아닌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고, 동시에, 교인 수를 증가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교가 선포되고, 컨퍼런스가 열리고, 책과 글들이 쓰여진다. 그 논리들은 매우 좋게 들린다. 데이브 퍼거슨은, 교회 수혈: 당신의 교회를내부로부터 유기적으로 변화시키는 법, 이라는 그의 책 서문에서 “교회를 사역적으로 역동성 있게 만드는 과정” 세 가지 단계를 기술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난 이십사 개월 동안 나는 이러한 교회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중요한 세 가지 운동을 발견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훈련 받게 하라.

    예수의 사명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표현하라.

    예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움직이라.3

복잡한 그 장황은 차치하고라도, 초점이 구주와 개인과의 일대일의 영적 관계가 아닌, 그룹에 맞춰져 있다. 구원은 언제나 개인적인 문제다. 에스겔이 기록한 바와 같다: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그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의로 자기 영혼만 건지리라. 야후와 엘로힘이 말하노라.” (에스겔 14:14)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숫자에 집중한다. 당연히! 그들은 복음의 사명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후원 체계를 유지해야 할 필요성은 에스겔의 이 구절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야후와께서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머물며 변화를 일으키길 원하신다고 말하며, 교인들의 환상을 깨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에스겔 8 장과 9 장을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읽을 때,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총체적 파멸

예루살렘과 그 성전 안에서의 가증한 행위들에 대한 야후와의 대응은 명확하다: 총체적 멸망이 요구된다.

그때에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오 사람의 아들아,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유다의 집이 여기에서 가증한 일들을 범하나니 그들이 이 일들을 범하는 것이 그들에게 가벼운 일이냐? 그들이 그 땅을 폭력으로 채우고 또 돌이켜서 내 분노를 일으켰나니, 보라, 그들이 나뭇가지를 자기들의 코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도 격노로 그들을 대우하리니 내 눈이 아끼지 아니하며 내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에스겔 8:17-18)

목판 Die Bibel in Bildern, 1860그 선고는 신속하다.

그분께서 또 큰 소리로 내 귀에 외치며 이르시되, 그 도시의 책무를 맡은 자들로 하여금 각각 파괴하는 무기를 손에 들고 가까이 나아오게 하라, 하시니라. 보라, 여섯 사람이 북쪽을 향한 높은 문의 길로부터 나오는데 각 사람이 살육하는 무기를 손에 가졌으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기록관의 잉크통을 찼더라. 그들이 들어와 놋 제단 곁에 섰더라. (에스겔 9:1-2)

이것은 심각하다! 야후와의 명령이 살인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여기에서조차도, 야후와의 은혜가 보인다. “야후와께서는 …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그분께서 아마포 옷을 입고 옆구리에 기록관의 잉크통을 찬 사람을 부르시니라. 야후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 도시의 한가운데 곧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며 그것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찍으라, 하시니라.

또 그분께서 내가 듣는 데서 다른 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그 도시를 지나가며 사람들을 치되 너희 눈이 아끼지 말고 너희가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아이와 여자를 철저히 죽이되 표가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가지 말라. 내 성소에서부터 시작하라, 하시니 이에 그들이 그 집 앞에 있던 원로들부터 죽이기 시작하더라. (에스겔 9:3-6)

이 멸망에서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은 해를 입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떠나라고 반복적으로 촉구하심에도 불구하고 교회 지도자들은 그들로 하여금 교인으로 머물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이 구절을 이용한다. 사역자들은 교회 안에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들은 서둘러서, 구원의 표를 받는 자들은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한 것들에 대하여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것들에 대해 탄식하며 울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야후와의 백성들이 중대한 가증 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경은 그 반대로 가르친다.

 

교회

매주마다, 신도들은 “교회 안에 머물라!” 라고 세뇌 당한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렇게 명하신다, “야후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가운데서 나와 분리하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받아들이리라.” (고린도후서 6:17)


당신의 생명을 위해 탈출하라!

하늘은 마지막 세대에게 명한다: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녀의 죄들이 하늘에까지 닿았고 야후와께서 그녀의 불법들을 기억하셨느니라.” (요한계시록 18:4-5) WLC 의 다른 글 에서도 다루어졌듯이, 이 명령은 모든 신자들을 향한 것이다. 누구도 자신의 교회, 교단이나 조직이 예외가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전진하는 빛을 모두가 거절하며 배도해왔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배도한 조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의무가 있다고 명확하게 가르치는 구절들이 있다. 야후와께서는 소돔에서조차 롯을 보존하실 능력이 있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주저하고 있는 롯과 그의 가족을 끌어내기 위해 천사들을 보내시며 긴박한 명령을 내리셨다: “네 생명을 건지기 위해 도피하라. 너는 네 뒤를 돌아보거나 이 온 평야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피하라. 네가 소멸될까 염려하노라.” (창세기 19:17)

롯은 소돔으로부터 나와 구원을 받았지, 그 안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노아도 악한 자들, 그 옛 세상으로부터 나아와 구원을 받았지, 그 속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 개념을 매우 잘 이해했다:

야후와께서 …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의 선포자인 여덟째 사람 노아를 구원하시며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도시들을 뒤엎으심으로 정죄하사 재가 되게 하여 그 뒤에 경건치 아니하게 살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으며

사악한 자들의 더러운 행실로 인해 괴로움을 받던 의로운 롯을 건져 내셨으니 (이는 저 의로운 사람이 그들 가운데 거하며 그들의 불법 행위를 보고 들으면서 날마다 자기의 의로운 영혼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이니라.)

야후와께서 경건한 자들은 시험에서 건질 줄 아시고 또 불의한 자들은 심판의 날까지 예비해 두사 벌할 줄 아시되. (베드로후서 2:4-9.)

롯은 그 평야의 극악한 도시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것들에 대해 탄식하고 울었다. 야살의 책에 따르면, 그 자신의 딸들 중 하나가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인해 타락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한편, 아브라함의 기도로, 그가 즉시 떠나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천사들이 보냄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신실한 자들이 행하길 하늘이 원하는 것이지, 교회에 머묾으로써, 그 참석함을 통해,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배도를 침묵으로 지지하길 원하지 않는다.

인을 받고 & 안전한 것

에스겔의 계시에는 성읍 안에서 탄식하고 우는 백성이 나온다. 종교 지도자들은 이것이 백성들이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들은 탄식하고 우는 것이 그들이 바로 남은 자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반드시 “남은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모든 변화는 그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탄식하고 우는 것 자체로는 아무것도 입증하지 못한다. 야후슈아의 시대에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거룩함을 입증하기 위해 겉으로 많은 것들을 나타내며, “탄식하고 울며”, 금식하는 대단한 신도들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사람들을 고용하여 장례식장에서 탄식하며 울게 했다. 자신의 노력을 보이기 위해 외적으로만 나타내는 탄식과 울음은 야후와께 아무런 호소를 하지 못한다. 이는 야후슈아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마태복음 6:7)

라오디게아 사람들 또한, 바리새인들처럼, 크게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탄식하고 울음으로써, 그들은 그들이 라오디게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한다. 결국, 그들은 탄식하며 울 것이 있음을 인지할 영적 분별력을 갖고 있다! 그들은 눈 멀지 않았다!

슬퍼하는 여자

그 표를 받는 자는 영혼의 진정한 비통으로 인해 탄식하고 우는 자들이다. 하늘은,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타락한 교회로부터 분리되라고 호소하고 있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그러나, 이렇게 탄식하고 우는 자들은 기록관의 잉크통을 가진 자에 의해 표를 받게 될 자들이 아니다. 교회 안에 있는 배도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지만, 교회를 실제로 떠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는 자들은 인을 받지 못할 것이다. 사탄은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그러한 위선자들을 이용한다.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떠나라고 촉구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그들이 침묵시킨다.

그 표를 받는 자들은 영혼의 진정한 번뇌로 탄식하며 우는 자들이다. 그것은 자신이 얼마나 헌신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바리새인적으로 나타내는 라오디게아적 위선이 아니다. 그 표를 받는 자들은 교회를 떠나는 데에 개방적이다—또한 그렇게 하고자 한다!—야후와께서 그들에게 머물기를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말이다.

야후와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비록 모든 진리를 배울 시간과 기회가 없었다 할지라도, 대가에 상관없이 진리를 따르고자 하는 자를 그분께서는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의 진정한 슬픔은 그들의 심령이 성경의 지도에 민감하다는 것을 밝혀준다. 왜냐하면 교회 안의 배도를 인지하는 것이 결국 교회를 떠남에 있어 첫 단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떠날 수 있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지점에 갑자기 도달한 것이 아니다. 야후와께서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어찌하든 그들 위에 표를 놓아주셨다.

그 표 자체가 그들이 결국 떠날 것이라는 추가적 증거다. 만약 그들이 더욱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더라면 말이다. 그 표 자체가 진리로 인도하는 야후와의 영이다. 성령의 사역은 죄에 대하여 깨닫게 하고 더 많은 진리로 인도하는 것임을 야후슈아께서 설명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니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돕는 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내가 떠나면 내가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요한복음 16:7-8)

이것이 누군가가—이 마지막 시대에서도—어떻게 교회 안에서, 탄식하며 울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구원의 표를 받을 수 있는지 이해하는 열쇠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것들에 대해 우는, 신실한 마음을 가진 자들은 죄의 죗됨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통해 그렇게 한다. 이것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성경은 언제나 인 받는 자를 성령으로 충만한 자와 동일시한다: “야후와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니라.” (에베소서 4:30)

“이제 우리를 너희와 함께 야후슈아 안에서 굳게 세우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분은 야후와이시니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봉인하시고 우리 마음 속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느니라.” (고린도후서 1:21-22)

“이것은 먼저 야후슈아를 신뢰한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들은 뒤에 그분을 신뢰하였고 너희가 믿은 뒤에 또한 그분 안에서 약속의 저 거룩하신 영으로 봉인되었느니라. 이 영께서는 값 주고 사신 그 소유물이 구속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 유업의 보증이 되사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시느니라.”

(에베소서 1:12-14, 킹제임스)

하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빠져 나오라고 호소하신다. 우리는 머무는 자들을 판단하는 자들이 아니다. 야후와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친밀하게 아시지만, 우리는 모른다. 야후와께서는 각 사람을 개인적으로 이끄실 지혜를 가지고 계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 각자는 우리 각자의 마음 속에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반응해야 한다. 그분께서 각 사람에게 최선이 되는 때와 방식으로 각 사람을 인도하실 것을 우리는 신뢰할 수 있다.

당신 자신을 밖으로 빼내라. 남아 있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하늘 아버지의 이끄시는 영에 반대하지 않으며 아직 완고해지지 않은 자가 누군지 아시는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라. 성령에 반응하는 모든 자는 그들을 구별하는 표를 받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을 걸어가기 위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면서, 우리는 그들의 이해에 있어서 다른 지점에 있는 자들을 하늘 아버지께 안전하게 맡길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이 아직 교회를 떠나라는 빛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여서, 그것이 빛을 받은 우리 중 일부가 타락한 교회에 남아 있어도 된다는 구실은 주지 못한다. 빠져 나오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지금.

순종하라 …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그 길을 보이라.

오늘날 모든 교회와 종교 조직이 타락하였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모두가 전진하는 빛의 어떤 부분들을 거절해왔기 때문이다. 어떤 단체는 어떤 한 부분이나 다른 분야를 수용하지만, 다른 진리들은 거절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수용하면 그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소돔으로부터 빨리 빠져 나오게 하기 위해 천사들이 보냄을 받았던 것처럼, 하늘의 메시지가 울려 퍼지며 이러한 조직들과 교단들로부터 빠져 나오라고 모든 이에게 경고하고 있다. 거기에 예외는 없다. 모두가 “마귀들의 처소가 되고 모든 더러운 영의 요새가 되며 모든 부정하고 가증한 새들의 집이 되었다.” (요한계시록 18:2) 주저하거나 지연시키지 말라.

그렇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것들에 대해 탄식하고 울라. 그러나 그것을 교회 밖에서 행하라. 당신의 순종의 본을 통해, 조직화된 종교로부터 나아와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라. 구원은 야후슈아를 믿음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지, 교회의 문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야후와께서는 세상에 의해 타락되지 않은, 비록 그 수가 적을지라도, 남은 자손을 가지실 것이다. 이렇게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 야후와의 참 교회며 그분의 눈에 보물이다.

 


1 http://careynieuwhof.com/a-response-to-christians-who-are-done-with-church/

2 Ibid.

3 Dave Ferguson, in the foreword to Church Transfusion, by Neil Cole & Phil Helf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