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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평한 지구 & 첫째 천사의 메시지


야후와를 두려워하라

하늘은 마지막 세대를 위한 놀라운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라.” 삶의 모든 부분은 사람이 야후와를 두려워하며 살 때 감동이 발생한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구주의 재림 때에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하도록 만들어 주며 이 땅 마지막 때에 그들의 사명을 그들에게 제공한다.

해먹의 소녀정지!

나의 그 외침으로 인해 나의 딸과 아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의 딸은 해먹 위에 앉아 있었다. 딸 아이의 오빠가 해먹에 앉은 딸 아이를 돌돌 말았고, 딸 아이는 그것을 반대로 풀면서 놀고 있었다.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그 해먹이 돌아가면서, 딸 아이의 머리가 베란다의 큰 기둥에 몇 인치로 다가가며 돌고 있었고, 돌 때마다 그 기둥에 딸 아이의 머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나중에, 딸 아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딸 아이는 다치지 않았지만, 부모님이 화가 나셨나 보다 라며 걱정했던 것이다.

나는 화 나지 않았다. 나는 두려웠다. 딸 아이는 나의 두려움을 화로 해석한 것이었다. 멈추라는 나의 외침의 긴급함 때문이었다.

두려움은 보통 부정적인 의미의 감정으로 비춰진다. 두려움은 위험, 악, 고통, 등이 있거나 다가오는 것에 의해 생기는 불안과 동요의 감정”1 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두려움에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두려움이 없다면, 사람은 임박한 위험을 전혀 모른 채 큰 위험 속으로 뛰어들면서도 행복하게 춤을 추게 될 수도 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는 전혀 인생 경험이 없음으로, 자기를 보호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 아이의 부모는 그렇게도 많이 신경을 쓰게 된다! 사랑의 부모는 그들의 아이들에게, 어떠한 위협을 경고해주는, 위험의 긍정적인 의미를 알려줄 것이다.

야후와 아버지께서도 역시 부르시고, 외치시고, 크게 소리치신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두려움 때문이다. 당신을 위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유예가 곧 마쳐질 것이며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이 그 위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 강한 경고의 말씀으로, 그분께서 명백한 메시지와 함께 천사를 보내신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야후와를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7)

당신

야후와를 두려워하라는 명령은 혼동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것이 “야후와는 사랑이시라.” 요한일서 4:8절에서 말하고 있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과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녀의 안전과 행복을 생각하는 사랑의 부모는 언제나 위험을 경고할 것이다. 분명히, 마지막 세대는 위험 가운데 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세대를 향한 이러한 위험들을 분명하게 예견했다. 에베소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그는 믿음의 사람들의 유일한 안전은 야후슈아를 아는 지식에 있음을 선포했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야후와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 이것은 우리가 이제부터 더 이상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속임수와 몰래 숨어서 속이려 하는 자들이 사용하는 간교한 술수로 말미암아 교리의 모든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려 밀려다니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4:13, 14)

이 마지막 세대가 직면한 위험들로부터 각 영혼을 지켜주는 것은 야후와와 그분의 아들을 아는 지식이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요, 거룩한 것들을 아는 것이 명철이니.” (잠언 9:10)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

아버지와 아들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성인으로서, 우리는 위험한 상황들이나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해를 배우며 자라난다. 그것은 당신이 아는 누군가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이 가미된 건전한 존경심을 갖는 것이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공포증) 그리스어 phobeo 에서 왔음. 놀라는 것, 경고를 받는 것; 경외하는 것, 존경하는 것. 두려워하거나 존경스런 두려움을 나타내는 것 (Strong’s, #5399 참조)

아버지는 그의 어린 아들의 삶에 총체적인 통제력을 행사한다. 그 결과, 그 소년은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고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확신하며, 아버지의 힘에 대한 건전한 존경심과 두려움을 여전히 유지한다. 이 두려움은 심지어 아버지가 부재 중에도 그 아이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게 만든다.

이러한 부모/자녀의 관계가 야후와와 이 땅에 사는 그분의 자녀들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존재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삼장과 사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우리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분을 경외하며 존경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우리를 결코 떠나 보내지 않으실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인해, 건전한 두려움을 위한 공간이 남아 있다.

야후슈아께서 이 경건한 두려움에 관해 마태복음 10:28에서 설명하셨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영혼과 몸을 다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분을 두려워하라.”

구주께서는 그분의 제자들이 모략, 폭력과 죽음에 직면할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 진리로 인해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셨다. 왜냐하면 폭력으로 빼앗긴 것을, 생명을 시여하시는 분께서 다시 주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생명을 주시는 분의 권세이다. 반역과 죄를 고집하는 자들로부터, 그분께서 주신 것을, 그분께서 취해가실 것이다. 몸을 멸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이 그분만큼 힘을 가지진 못했다. 그분은 심판의 마지막 때에 몸과 영혼을 불 못에서 멸할 힘을 지니셨다. 영원한 죽음고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죽음은 계속 반역하며 산 모든 자가 받는 보응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후슈아께서 이 생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설명하셨던 것이다. 그 생명은 일시적 생명이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남자

“두려워하라. 매우 두려워하라.”

당신은 두려워해야 한다. 당신은 매우 두려워해야 한다.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시키시기를, 마치 이 땅에 또 다른 영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을 사랑하신다.

알고 짓는 죄를 계속 지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

죄가 죄인 것을 모르는 지경까지 버리지 못하고 고집하는 죄들이 있는지 두려워하라.

성령의 탄식에도 당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고 있는지 두려워하라. 그것은 용서받지 못하는 유일한 죄다.

야후와를 아는 것이 당신의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야후와께 복종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그분을 아는 일에 실패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라.

야후와를 아는 것

“야후와를 두려워하라”는 명령은 아래 구절에서 사용된 것과는 전혀 다른 어원 (#5399) 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니라. (요한계시록 21:8)

야후와를 “두려워한다” (#5399) 는 것에는 존경심과 경외함의 요소들이 포함된다. 하늘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 “두려움”은 deilos (#1169) 로부터 왔다. 그것은 무섭고, 마음이 좁고, 그 결과로 인해, 믿음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좁은 자들은 믿음 또한 없다. 그들은 야후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분의 사랑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긍휼을 얻고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이 없다. (히브리서 4:16)

성경에서 “안다”는 단어는, 그 단어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단계의 친밀함이 함축되어 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아담이 그의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창세기 4:1)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창조주를 그와 같이 친밀한 단계로 알게 되며, 따라서, 그분에 의해 아는 바 될 것이다. 영어의 “두려워한다”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이 몇 개 있다. 그러나, 본래의 고대 히브리 상형 문자들이 자체적으로 정의하는 히브리어 체계를 사용하여 번역될 때, 깊고 놀라운 의미가 비춰온다. “두려워하다” 로 번역된 상형문자는 “배우다” 로도 번역될 수 있다. 잠언 1:7은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라고 일반적으로 번역되고 있다. 그런데, 그 구절에 “배우다” 라는 단어를 넣어보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살펴 보자:

솔로몬의 잠언들…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와 정의와 판단의 공의와 공평의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로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분별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듣고 배움을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혜로운 권고들을 얻어서

잠언과 해석과 지혜로운 자들의 말들과 그들의 은밀한 말들을 깨달을지니라.

야후와를 배우는 것이 지식의 시작이거늘 어리석은 자들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1-7)

야후와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하여,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야후와를 배우는 것]이, 지혜요, 악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명철이다.“ (욥 28:28)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이 선포했다: “모든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야후와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 (전도서 12:13)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야후와에 대해 계속 배우며, 그분의 계명들을 지키라. 이것이 사람의 모든 의무니라.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성화되는 것

야후와를 두려워하면 굉장한 축복이 따라온다: “참으로 그분의 구원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있으니 이로써 영광이 우리 땅에 거하리로다.” (시편 85:9)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요구 사항들을 명확하게 나열한다: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야후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엘로아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두려움으로 야후와를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시편 2:11)

그것은 매우 간단하게, 매우 쉽게 들린다. 그러나 오직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진실로 의롭게 행하며, 긍휼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 겸손하게 걸을 수 있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누군가가 행하는 외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으로부터 밖으로 표출되며, 모든 행동, 모든 언어, 모든 생각, 모든 신념을 야후와의 뜻에 순응하도록 이끈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며 사는 삶은 매일의 삶에 있어 매우 실질적인 영향을 끼친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악으로부터 그 사람을 보호해주는 방패막이 된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영혼을 깨끗하게 한다. 무한한 사랑이 공급된다는 것을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인지할 때, 야후와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이 그분의 순결함과 선함에 대한 경외와 놀라움과 결합되며, 심령이 가득 차고, 그분의 선함을 명상함으로 기뻐하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그 사람은 변화되고, 구주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가 된다.

이러한 성도들은 야후와를 매우 친밀한 단계로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분과의 언약의 관계로 들어갔다. 그들로 하여금 하늘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야후와의 은밀한 일이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함께하나니 그분께서 그분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가장 위대한 약속들 중 하나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그분께서 그분의 언약을 나타내실 것이다!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그들을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야후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 . .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정신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엘로아가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야후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예레미야 31:31-34)

소중한 약속이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그분을 아는 자들이다. 그들은 그분의 선하심, 그분의 연민을 친밀하게 알게 되었다. 그분의 사랑이 그들의 낮을 밝히고 그분의 사랑의 용서가 그들의 밤에 평안을 가져다 준다. 그들은 그분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분을 알기 때문이다.

말씀을 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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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를 두려워하며 사는 자들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대로 사랑할 것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기 희생의 노력을 쏟아 부을 것이다. 그들의 음성은, 그분의 음성과 같이, 긴박한 애원으로, 사랑의 경고로, 높여질 것이다. 그들 자신의 경험으로, 그들은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생명 샘이며, 사망의 올무들에서 벗어나게 한다.” (잠언 14:27) 는 것을 안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모든 자는 다른 이들도 사탄의 거짓들에서 빠져 나오고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일에 하늘의 일꾼들과 협력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는 이러한 진리의 마지막 전파에 대한 예언이 담겨있다:

또 내가 보니 다른 천사가 하늘 한가운데로 날아가는데 그가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족속과 언어와 백성에게 선포할 영존하는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야후와를 두려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라. 그분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들을 만드신 분께 경배하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4:6)

이 예언에 있는 단어들이 넷째 계명의 언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 의미 심장하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야후와 너희 엘로아의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 안에 거하는 네 나그네나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야후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야후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8-11)

넷째 계명을 통해, 모든 사람은 야후와를 경배하라고 초청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분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를 통해, 이 초청이 반복된다. 모든 사람은 창조 때에 제정된 달력에 의해 계산되는 본래의 달 안식일에 야후와를 경배하라는 것으로 돌아오라고 초청을 받는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에서 주어진 논리는 넷째 계명에서 주어진 논리와 같다: 그분께서 하늘들과 땅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첫째 천사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예배와 연관된다.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들만이 “신령과 진정으로” (요한복음 4:24) 그분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그들만이 가납될만한 예배와 존경을 드릴 수 있다. 창조주를 두려워함으로써 창조주를 친밀하게 알게 된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유업으로 받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그들이 그들과 그들 뒤에 있을 그들 자손의 복을 위하여 영원히 나를 두려워하게 하리라. 또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에게서 떠나 돌아서지 아니하리라는 영존하는 언약을 내가 그들과 더불어 맺고 나를 두려워함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어 그들이 나를 떠나지 아니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32:39-40)

첫째 천사의 메시지가 바로 지금 울려 퍼지고 있다. 하늘은 참 안식일과 이 땅의 참 형태에 관해 감추어졌던 거짓들을 폭로하고 있다. 가납될 수 있는, 지식이 있는 예배는 오직 이 기본적인 지식과 함께 드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개념 (지구의 참 형태 (평평하다) 와 참 예배일)은 서로 분리될 수 없게 연결된다.

이 두 가지 거짓이 세상으로 하여금 사탄의 마지막 사기를 준비시킨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영혼에게, 이 진리가 그 기만들로부터 그 영혼을 보호할 것이다. 하늘이 지식을 증가시키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이 응급 상황의 때에, 야후와의 백성은 침묵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 닥친 위험을 보고, 그들은 모든 진리를 위해, 그것이 달 안식일과 평평한 지구와 같은, 인기 없는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 진리를 옹호하기 위해 열심을 내고 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들은 창조에 대한 사탄의 거짓 이론을 폭로할 것이다. 그들은 창세기 1장에서 발견되는 진리들을 선포할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주의 참 예배일에 그분의 경배를 회복할 것이다.

진리를 선포하는 모든 자에 대한 조롱은 그들을 더욱 견고케 하고 두렵지 않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두려워하시는 분

하늘 아버지 야후와께서 친히 두려워하신다. 그분은 당신을 위해 두려워하신다. 그분의 부르심의 긴박함은 마지막이 얼마나 가까이에 이르렀는지에 관한 그분의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는 깨어나 스스로 두려워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삶과 우리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그곳에 야후와께 대한 온전한 동의와 복종이 이루어지지 않은 어떤 것이 있는가?

마음을 살펴보는 일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것은 의지의 강제를 통해서 발생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다. 그것은 선물이다. 구주께서 당신에게 애원하신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8-19)

야후와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분으로부터 또한 그분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우는 자들로써, 그들이 부요하며 재산이 늘어났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고 결코 뽐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비로운 초청을 받아들이고, 불로 연단된 금, 의의 흰 옷, 영적 분별력을 위한 안약을 구할 것이다.

그분께서 약속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기꺼이 즐겨 이루실 것이며, 공급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말씀을 믿으라! 약속된 축복을 구하라. 그 약속을 믿고, 그것을 취하라. 오직 믿음으로 그 약속된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야후와를 두려워하고 그분으로부터 계속 배울 것이다. 오직 그들만이 그들을 만드신 분과 영존하는 언약에 들어가고 그분을 알게 될 것이다.

“[야후와]께서 죄인을 없애고 완전히 멸할 수 있으셨다. 그러나 더 값진 계획이 선택되었다. 그분의 크신 사랑으로써 그분께서 희망 없는 자들을 위해 희망을 제공하셨으니, 세상의 죄들을 담당할 그분의 독생자를 주심이었다. 그분께서 한 귀한 선물을 통해 모든 하늘을 쏟아 놓으셨다. 그분께서는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 또한 [야후와]의 상속자가 되고 [야후슈아]와 함께 공동 상속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어떤 도움도 보류하지 않으실 것이다.”

(The Bible Echo, March 3, 1893)

이것이 중요한 요지다. 야후슈아께서 경고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오직 야후와를 두려워하며 사는 자들만이 그분께 아는 바 된다.

당신은 어떻게 당신을 만드신 분을 알게 되는가? 또한, 당신은 어떻게 누군가를 알게 되는가?

당신이 그분과 시간을 보내며, 그분의 사랑의 율법을 통해 밝혀지는 그분의 품성을 연구하고, 기도로써 그분과 대화함을 통해서이다. 고요함 가운데 기도하며 묵상하고, 당신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들음을 통해서이다. 하늘의 보물은 열려 있으며 믿음으로 구하는 자들에게 베풀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오 그분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편 34:9)

아름다운 평평한 지구의 일몰

시간이 신속히 마쳐지고 있습니다. 유예가 곧 끝날 것입니다. WLC 와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야후와의 모든 자녀들과 함께 하세요.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세요. 야후와를 두려워하며 살라고, 곧 있을 구주의 재림을 준비하라고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세요. “그분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1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