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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사역자들과 “성령으로 쓰러진다” 고 주장하는 자들에 의해 나타나는 영은 야후와의 거룩한 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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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부드럽게 시작했다. 수녀원의 고요함을 깨트린 것은
어떤 세미한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다시 들렸다. 고양이가 그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발견한 것일까?
두번째 고양이가 첫 번째 고양이에 합류했다. 이 동물들이 어디서 온 것일까? 수녀원장은 복도 밑으로 재빨리
내려갔다. 동물들이 이 신성한 공간에 있을 곳은 없었다! 그녀는 소리가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한 자매가 태연하게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있었다. 그녀는 왜 거기에서 바닥을 쓸며, 거기 그냥 서 있는 걸까? 왜 그녀는 고양이를 잡으려 시도하지
않고 그것을 쫓지 않은 것일까?
그 수녀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 냈다. “야옹?”
곧, 바닥 밑에서 답이 왔다: “야옹!”
수녀원장이 옆 방으로 달려갔다. 두 수녀가 놀라서 올려다보며 조용히
소리를 냈다, “야옹?”
그 소리를 내고 있는 수녀가 몇 명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고양이 소리가
합세했다. 고양이 소리는 늘어나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그 고양이 소리는
그 프랑스 수녀원의 다른 수녀들 대부분에게 퍼졌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야옹 소리를 내는 수녀들이 소리를
맞춰가며 새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그들 모두가 몇 시간 동안 함께 야옹 소리를 냈다. 수녀원장은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 소리는 주변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수녀들이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지 걱정하며 그 일을 정부에 알렸다. 군인들이 그 이상한 현상의 원인 조사를 위해 파견되었다. 수녀원을 둘러본 후, 군인들은 야옹 소리를 계속 내는 수녀는 매를 맞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다.1
문제는 해결됐다. 더 이상 야옹 소리는 없었다! 몇 세기가 지났지만, 그것은 여전히 지루한 수감자들 사이의 집단 히스테리 발생 현상에
대한 재미있는 사례 연구로 남아 있다.

그 프랑스의 수녀들은 암시의 힘에 의해 영향을 받는 크리스챤들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이 충격적으로 암시하는 것처럼, 그것은 마지막 때의 집단 히스테리가
아니었으며 암시의 충격은 크리스챤들에게 영향을 끼쳐왔다.
[WLC 는 로마
카톨릭 의 관행과 전통 중 어떤 것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 위의 이야기는 단지 예증을 위해
사용되었을 뿐이다.]
성령으로 쓰러짐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바울은 경고했다: “이제 성령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마지막 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유혹하는 영들과 마귀들의 교리들에 주의를 기울이리라 하시는데.” (디모데전서 4:1) “성령으로 쓰러짐” 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가르침이
그런 마귀적 교리 중 하나다.
그것은 종종 “성령 안에서 엎어짐” 이나 “성령의 만지심” 이라고 언급된다. 이런 일은 종종 누군가가 치료를 받고자 할 때 발생한다.
“성령으로 쓰러짐” 이라는 용어는 크리스챤 교회들 가운데 은사 운동으로 사용되며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하신다고 주장하기
위해 설계된 것이다. 성령이 사람에게 그런 능력으로 역사하여 그 사람이 “쓰러진다” 는 주장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에 의해 압도되어 바닥에
고꾸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2
물론, 야후와와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창조주께서는 모든 능력이 있으심으로, 그런 힘으로 사람이 압도될 수
있게 그분께서는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 문제는 야후와께서 그렇게 행하실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런 신념—더 나아가, 그런 관행이—성경적이냐 하는 것이다.
그런 관행을 지지하는 자들은 그런 일이 성경 시대에 발생했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시도로 성경의
다양한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구절들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성경을 왜곡하지 않는 한 그 구절들이 “성령으로 고꾸라짐/쓰러짐” 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런 사람들은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을
설명하는 구절을 종종 인용한다.
나팔 부는 자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한 사람처럼 한 소리를 내어 들리게 하고 야후와를 찬송하며
감사를 드리고 또 그들이 나팔과 심벌즈와 악기를 가지고 소리를 높여 야후와를 찬양하여 이르되,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하매 그때에 그 집 곧 야후와의 집이 구름으로 가득하였으므로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야후와의 영광이 엘로힘의
집에 가득하였기 때문이더라. (역대하 5:13-14)
위의 구절에서 야후와의 능력 하에 누군가가 쓰러졌다거나 어떤 치료가 일어났다고 묘사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와는 전혀 반대다. 11 절에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있던 모든 제사장들이 거룩히 구별되었으며” 건강이 온전하지 못한 자가 야후와
앞에서 봉사하는 것은 레위기 법규에 상충되므로, 거기에 있던 제사장들 중 누구도 치료를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그러했다면 그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레위기 21:16-23 참조)
그 지지자들은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구주께서 체포되시는 상황을 언급한다. 야후슈아께서 그들이 찾고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이 그분께 대답하되, 나사렛의 야후슈아라, 하거늘 야후슈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로다, 하시니라. 그분을 배반한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더라. 그분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로다, 하고 말씀하시매 곧바로 그들이 뒤로 물러가 땅에 쓰러지니라.” (요한복음 18:5-6)
그러한 관행이 성경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되는 또 다른 유명한 구절은 다소의 사울의 개종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로부터 빛이 나와 그를 둘러
비추더라. 그가 땅에 쓰러져 들으매 한 음성이 있어 그에게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도행전 9:3-4)
야후슈아께서 체포되실 때 악한 자들이 쓰러진 것이나, 사울이 고꾸라진 것이 성령으로
쓰러진다는 현대의 신념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병을 치유하는 다양한 자들에게 나아오는 자들은 일반적으로 마음이 매우 신실한 자들로서, 그들의 마음은, 그들의 지식이 미치는 한, 야후와와 함께 의로우니 이는 그들이
그분께 축복을 구함에 따라 그러하다.
성경에는 야후와의 사람이 하늘의 장엄함, 영광, 신성의 능력에 압도된 몇 가지 사례들이
나온다. 그러나, 변함없이, 그들이 고꾸라진 방향은, 언제나 앞쪽으로, 경배의 행위로서 그들의 얼굴을
숙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럼에도 내가 그의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의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으로 향하고
얼굴을 댄 채 깊이 잠들었느니라. 보라, 한 손이 나를 어루만지며 내 무릎과 손바닥을 의지하게 하여 나를 세우니라.” (다니엘 10:9-10)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성령으로 쓰러질 때 발생하는 현상과는 전혀 다르다. 다니엘이 쓰러졌을 때, 천사가 그에게 힘을 공급하기 위해
즉시 나아왔다. 계시자 요한도 이와 같이, 그가 야후와의 능력에 의해 압도되었을 때 즉시 힘을 공급 받았다: “내가 그분을 볼 때에 죽은 자같이
그분의 발 앞에 쓰러지니 그분께서 오른손을 내 위에 얹으시며 내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요한계시록 1:17)
성령으로 쓰러트리는 복음주의자들과 신앙 치유사들은 야후와의 능력에 의해 압도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힘을 공급하기 위해 결코 나아오지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그들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진정으로,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뒤로 넘어지는
자들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잡아주는 자들” 을 두고 있다.
온순한 자와 천한 자가 비슷한가?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해를 입어왔다. 엘라 페파드의 가족은 그녀가 부흥회에서
입게 된 상해에 대하여 은사 운동가 베니 힌을 상대로 수 백 만 달러 소송을 걸었다—가족들은 그녀가 그 상해로 인해
죽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페파드, 85세, 1986 년 9월 23 일 사망, 엉덩이 뼈 골절로 입원한 후 동맥 폐쇄로 인한 것. 그녀는 15 일 전 신앙 장막 부흥회 동안 골절로 고통을 받았다.”3
페파드는 힌의 축복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힌이
매우 세게 쳐서, 그가 뒤로 날랐고, 그녀를 쓰러트리고 그녀의 엉덩이가 골절되었다. 그녀에게 의료 지원을 제공하지 않고, 힌은 페파드를 무대로부터 옮겨
앞 쪽 자리에 앉게 했다는 것이 소송 내용이었다.
한 안내원이 페파드를 위한 의료 지원을 할 것을 제안했을 때, 힌이 그 안내원을 막으며, “그녀를 홀로 두세요. 하나님이 그녀를 치료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고 목격자들은 말했다.4
힌이 연루된 또 다른 사고에서, 물을 들고 축복을 받기 위해 무대에
접근했던,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한 남자를 그의 아들과 두 명의 보디가드가 두들겨 패고 괴롭힌 것으로 인해
체포되었다.
헤스테반슨 아라우조, 21 세, 그는 그 사고 후 병원 치료를 요한다고 보고되었다 … 브라질 북부, 마나우스에서 열린 종교 집회 기간
동안 발생했던 사고였다.
경찰은 베니 힌의 두 보디가드와 함께 21 세, 조슈아 힌을 감금시켰다. 그 세 명이 그를 트레일러에 가두고
폭행했다는 혐의였다. …
그 남자들이 아라우조씨를 무대 가까운 곳에 주차된 트레일러로 끌고가, 그가 누구인지 따져 물으며, 그 안에서 그를 두들겨 팼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들을 수도 없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할 수도 없었으므로, 폭행이 계속되었다고 경찰은 말했다.
사람들이 걱정하며 경찰에 신고하여 작전계 요원들이 그 트레일러에 투입되었다.5
이것은 야후슈아나 사도들의 행동과 완전히 반대된다! 로버트 리이초우는 한 때 이 은사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으로, 지금은 그 오류를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고 있다. 그는 이런 글을 썼다:
분명한 질문이 이것이다 –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을 쓰러트리시는
것이라면, 왜 우리가 그들을 잡을 필요가
있겠는가? … 그들은 이 현상을 성령의 능력과 임재에 직접 기인한 것으로 설명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분께서 … 쓰러지는 자를 그분의 축복에 의해
다치지 않게 주관하실 능력이 없으신가? 그 교회들은 잡아주는 사람을 고용한다. 왜냐하면 (1) 그들은 많은 경우 사람들이 가짜로
쓰러지며, 그것이 계획된 반응임을 알기 때문이고 (2) 그들 자신의 공언된 신앙에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리 위대한 분이 아니어서 그분의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잡아주는 사람들과 함께 자매들이 … 큰 천 조각을 가진, 잡아주는 사람들 옆에나 뒤에 함께
온다. 그들이 하는 일은 그 여자들의
다리와 몸 위에 그 천을 올려 놓는 것이다. 왜 그럴까? 많은 경우 여자들이 성령으로 쓰러질 때 매우 민망한 자세로 엎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불행한 여자들이 쓰러질 때
그들의 옷이 많이 올라가고, 그들의 다리가 부적절한 각도로
벌어지는 경우들이 있었다. 주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그분의 딸들을 당혹시키기로 선택하셨을 때, 우리는 그들의 수치를 덮어주기
위해 재빨리 그 현장에 있어야 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야후와 엘로힘] 께서 그분의 딸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 같은가?6
떨쳐 버리다
야후슈아께서 약속하셨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이런 은사 운동에 한 때는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기만으로부터 달아났다. 그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그 이상한 신념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마크 하빌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어떻게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있었는지 묻자, 하빌은 단지 성경을 읽었을 뿐이라고 답했다.7
마이크 라이트는 성경이 그런 관행을 지지한다고 더 이상 믿지 않는 또 다른 형제로서, 그 신념에 대한 또 다른 문제를
지적한다: 동료 집단으로부터 받는 압박감이다. 그는 이런 글을 썼다:
어느 아침 기도 시간에 베니 힌이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우리 테이블 맞은 편에
있는 나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떠오르는 슈퍼스타와 동행한 순복음 사업가 그룹이 그 대표 주위의 경호원 간부단처럼 수행하며, 기대와 흥분을 조장하고, 단지 그들이 대중들에게 접근하고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방식으로 권능과 위신이 있다는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엄마는 성령-으로-쓰러지지 않았지만, 엄마는 – 만일 베니가 그의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뒤로 미는 데 더 지체했더라면 – 그녀는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그 놀라운 성령의 역사 (라고 주장되는) 의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하여 그녀가 ‘그리 신실하지 못하고, 그리 굴복하지 않았으며, 그리 의롭지 않았다’ 는 사실에 대한 당황스런 반응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은연 중에 – 또한 종종 명확하게 – 구도자/ 받는 자에게 놓여지는 죄에 대한 나의 일차적 관점이었다).8
축복이나 치유를 얻고자 하는 자는 성령의 능력에 대한 신체적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진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에게 믿음이 부족하여서 그러한
것이라고 (지켜 보는 자들과 그 당사자 둘 다에 의해) 여겨진다. 그것은 영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동료 집단으로부터 느끼는 사회적 압력이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안타깝게
말하며 결론을 맺는다:
저는 여러분에게 지난 삼 십 년 동안의 이야기를 늘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의 결론은 우리가 (부지 중에) 한 소극에 참여해왔다는 것입니다 – 더 많이 알고 또한 더 잘 알았을
사람들에 의해 기만을 당한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 [야후와의] 말씀을 철저하게 연구한 결과, 우리는 성령–으로–쓰러진다는 가르침을 분명하게 비난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그런 일은 발견되지
않으며, 단지 [야후와] 의 원수들이 강력한 힘을 행사하여 그들을 뒤로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기술된 다른 모든 경우에
있어서, [야후와] 의 임재로 나아오는 자들은 (겸허한 경배로서) 자발적으로 그들의 얼굴을 숙이며, 앞으로 쓰러졌습니다. –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 그들은 죽었을 것입니다.9
정신 통제
“성령으로 쓰러지는” 경험이 큰 집회나 복음주의자들의 행사에서 종종 목격되는데, 그곳에서 설교가들은 치료하는 특별한
시간을 갖는다. 그 또는 그녀가 돌아다니며 손을 아픈 사람의 이마에 올려
놓으면, 그가 뒤로 쓰러진다. 베니 힌과 같은 일부 “신유 사역자들” 은 성령의 능력을 우스꽝스런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의 외투를 군중들을 향해 흔들거나 그들을 치기도 한다. 그러면 그들은, 예상대로, 쓰러진다.
앞서 언급했던, 마크 하빌은 한 인터뷰에서 성령의 역사로 어떻게 쓰러지게 되는지에 관해 질문을 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열거했다:
- 사람들은 남의 영향을 쉽게 받는다. 사람은 남의 영향을 쉽게 받는 정신 상태, 변환된 의식 상태로 이끌릴 수 있고, 그 상태에서 그들은 연설하는 사람과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들에 의해 더 쉽게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다.
-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자들은 사람의 심박동수에 맞는 음악을 정교하게 선택한다. 대부분의 찬양 속에 있는 박자는 심혈관계와 잘 맞는다.
- 엔터테이너들은 집단 역학의 힘을 이해한다. 그래서 코미디언들과 락 가수들이 군중들의 흥을 돋구는 것이다. 집단 역학 또한 신유 사역자들을 위해 작동한다. 당신의 이마가 만져질 때, 지켜보는 모든 사람이 당신이 쓰러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쓰러질 것이다.
- 반복 발화 패턴과 특정 목소리 톤은 쉽게 영향을 받는 사고방식을 유도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과 에릭소니안 최면이 오순절이 아닌 기독교 교단들에도 침투해왔다. 일부 목사들은 그들의 회중을 최면시키는 자신의 능력을 뽐낸다.
- 그런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최면 당하기 쉽다. 그러므로, 일정 시간 동안, 그들의 고통은 사라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중까지 살펴보면, 처음에 치료 받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 중 대다수가 사실은 치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챨스 S. 프라이스는 브리티시 콜롬비아에서 부흥회를 열었다. 거기에 참석했던 350 명은 자신이 치료 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육 개월 후까지 더 살펴본 결과, 매우 충격적인 결과가 드러났다. 자신이 치료 받았다고 믿었던 350 명 중, 301 명이 여전히 아팠고, 39 명은 실제로 사망했으며, 다섯 명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불과 다섯 명만이 여전히 치유된 상태라고
주장했다.10
하빌은 이와 정확히 동일한 방식들이 사용되며, 이와 정확히 동일한 관행들이 동양
종교와 세계 도처의 다양한 신비주의 전통들에서 사용된다고 인정한다.
바울은 사탄이 어떻게 빛의 천사로 자신을 가장할 수 있는지 경고하며 말한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가장하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사역자들 또한 의의 사역자로 가장한다 하여도 그것은 결코 큰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들의 행위대로
되리라.” (고린도후서 11:14-15) 이것이 정확히 오순절 운동이라는
것과 함께 발생하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변환 의식 상태, 영적 무아지경, 최면 등과 같은 것이다. 기독교 전문 용어를 이용하며, “예수” 께 기도하고, “부흥” 을 외치며, 신자들에게 “믿음” 을 가지라고 권고함으로써, 그 크리스챤 지도자들은 빛의 옷을
가장하여 주술적 관행들을 시행한다.
성령의 능력이라고 주장되는 신유 치유와 다른 공공연한 표현들이 오랜 동안 퍼져왔는데, 특히 1994 년,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토론토 에어포트
교회에서는 큰 부흥이 있었다. 이 운동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폴 골디11 는 처음엔 그것이 진짜 야후와의
역사라고 믿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성령의 능력 아래 있다고 주장하며 개처럼 울부짖거나, 동물처럼 행동하는 것을 본 후, 그는 이것이 진짜 야후와의 역사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경고한다:
오늘, 나는 이것이 더 많이 어두운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 오늘, 나는 그 영은 거짓 영, 모조된 영이지 성경의 성령은 아니라고
믿는다. … 나는 이것이 결코 참, 진짜 성령의 현시일 수 없다고
말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교회의 열매가 썩었기 때문이다. … 성령은, 그 이름 자체에 의해 확인되듯, 거룩하다. 성령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룩하지
않은 어떤 것을 행하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사람은 … [야후와] 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왜 [야후와] 께서 그들을 동물처럼 되게 만드시며
인류를 저하시키겠는가? 만약 이러한 집회들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성경과 상충된다면, 그것은 [야후와] 의 역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야후와] 께서는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 그것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이 빛의 역사라고 생각하지 말라. … 그것은 [야후와] 의 일이 아니다 … 그것은 마귀의 책략이며 … 그것을 받아들이는 남자, 여자, 아이들을 완전한 멸망으로 이끌
것이다.12

성경에는 초기 신도들이 “성령으로 쓰러지는” 자들에게서 보이는 그런 역겨운, 채신 없는 현상에 몰두했다는 언급들이 없다. 야후와께서 거룩하신 바와 같이, 성경적 예배는 거룩한 것이었다. 야후와의 기쁨은 결코 개인의 품위를 깨트리지 않는다. 성령의 열매 중 하나는 자기-통제다. 야후와께서 당신의 개성을 파괴하는 어떤 것을 시행하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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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쓰러진다” 고 주장하는 자들의 변덕스럽고 품위 없는 행동은 진정으로 주 야후슈아의 치유의 접촉을 경험한 자들의 행동과 대조된다:
그들이 바다 저편으로 가서 가다라 사람들의 지방으로 들어가니라. 그분께서 배에서 나오셨을 때에 부정한 영 들린 사람이 즉시 무덤들 속에서 나와 그분을 만나니라. 이 사람은 무덤들 가운데 거하는데 아무도 그를 사슬로도 결코 묶을 수 없었으니 이는 여러 번 족쇄와 사슬로 그를 묶었으나 그가 사슬을 끊고 족쇄를 산산조각 내었기 때문이더라. 아무도 능히 그를 복종시키지 못하더라. 그가 늘 밤낮으로 산이나 무덤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 몸을 베고 있더라. 그러나 그가 멀리서 야후슈아를 보고 달려와 그분께 경배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야후와의 아들 야후슈아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엘로힘을 두고 간청하건대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너 부정한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분께서 그에게 물으시되, “네 이름은 무엇이냐?” 하시매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이름은 군단이오니 이는 우리가 많기 때문이니이다.” 하고 그분께 몹시 간청하여 그분께서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실 것을 구하더라. 이제 거기에 큰 돼지 떼가 산 근처에서 먹고 있으므로 모든 마귀들이 그분께 간청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들에게로 보내사 우리가 그것들 속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하매 즉시 야후슈아께서 그들에게 허락하신즉 그 부정한 영들이 나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니 (이천 마리쯤 되는) 그 떼가 경사진 곳을 세차게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바다에서 숨 막혀 죽으니라. 돼지를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그 도시와 지방에서 그것을 고하니 그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가서 야후슈아께 이르러 마귀 들려 군단을 지녔던 사람이 바른 정신으로 옷을 입고 앉은 것을 보고는 두려워하더라. (마가복음 5:1-15)
주목: 야후와께서 일으키신 변화는 “성령으로 쓰러진다” 는 자들에 의해 경험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위의 구절에서 야후와의 영은 마귀 들린 자의 변덕스런 행동을 잠잠케 하고 건전한 정신으로 그를 회복시켰다. 성령으로 쓰러진다는 자들의 비성경적인 관행을 지지하는 자들은 이와 반대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그들은 건전한 정신 상태로부터 무모하고 난폭한 감정/행동 상태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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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참 영성
성경은 신자들에게 권고한다: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야후와께서는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에게
성경적 참 영성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신다. 전능하신 분과의 진정한 관계는 소동스런 그룹을 통해 이르러오지 않는다. 진정한 영적 경험은, 고요 중에 있을 때, 개인적으로 이르러 오며 고독한
영혼은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호렙산에 있던 엘리야는 야후와께서 산에서 위력을 발한 거대한, 능력의 바람 속에 있지 않다고
가르쳤다. 그분께서는 땅을 흔들었던 지진 속에 계시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격노하는 불기둥의 혼란
속에 계시지 않았다. 반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께서는 그분의 종과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일대일로 말씀하시기를 택하셨다. (열왕기상 19:11-12 참조)
이 교훈은 오늘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분과 긴밀하고
친밀한 관계를 위한 당신 마음의 갈망을 아신다. 그분께서 그 마음을 만족시키지 않은 채로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다. 그 소망은 그분에 의해 당신의
마음 속에 심겨졌다!
구주를 당신의 본보기로 삼으라. “새벽에 아직 날이 밝기 훨씬 전에
그분께서 일어나 나가서 외진 곳으로 떠나 거기서 기도하시더라.” (마가복음 1:35) 당신은 사람이 많은 아파트에 살 수도 있다. 당신은 믿지 않는 가족에 의해
둘러 쌓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당신은 당신 자신만의 고독한 장소로 물러날 수 있다.
당신의 고독의 장소는 당신의 침실이 될 수도 있다. 그곳은 당신의 옷장일 수도 있다. 그곳은 공원의 외딴 모퉁이에 있는
벤치일 수도 있다. 그곳은 슈퍼마켓 주차장의 가장 끝에 주차된 당신의 차일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유일하게 조용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고 있는 순간일 수도 있다. 당신이 집중하여 세미한 음성을 듣기 위해 조용한 공간을 찾는 곳마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당신에게 가까이
나아오시고,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말씀하실 것이다.
“성령으로 쓰러지는” 습관은 감정의 흥분에 크게 의존한다.
축복을 추구함으로써 그들은 진리를 포기하고 그 대신 초자연적 경험을 쫓았다. 이것은 성경적 경험이 아니지만
초자연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부주의하게 어떤 검증도 없이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기만에 문을 열어 놓게
된다 … 사람들은 가장 오랜 가식에 굴복해왔는데, 축복을 구함에 있어서 그들이 성경적
근거를 위한 검증 없이 초자연적 경험을 구하며 진리를 포기해온 것이다.13
신성의 진리는 감정에 의존하지 않고, 생각에 호소한다. 야후와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이사야 1:18) 성경을 가지고 신학을 이성적으로
살펴보라. 감정으로 신학을 검토하지 말라. 왜냐하면 락 콘서트의 관중들이
경험하는 감정의 고조는 부흥회에서 2,000 명의 다른 신도들과 함께 찬양을 부를 때 느끼는 일치감과 희열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어떤 것에 대한 증거가 결코 될 수 없다. 이는 구원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구원은 회개와 야후와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지, 최면 상태나 감정적으로 들뜬 기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당신이 그런 비이성적, 감정적 표현에 연루되었다면, 부디, 그것이 비성경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 우리의 말을 취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 성경을 읽어라! 야후와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검증하라. 그분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내려 놓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 야후와께서는 언제나 그분께 가까이 나아오고자 하는, 영혼이 가난한 자를 만족하게 하실
것이다.
1 J. F. C. Hecker, Epidemics of the Middle Ages, p.
127.
2 Matt Slick, “What Does It Mean To Be Slain In The
Spirit?” Christian Apologetics and Research Ministry.
3 http://newsok.com/article/2225326
4 Ibid.
5 http://www.dailymail.co.uk/news/article-2280403/Evangelist-Benny-Hinns-son-arrested-Brazil-beating-deaf-dumb-man-fathers-events.html
6 http://www.ovrlnd.com/FalseDoctrine/slaininthespirit.html, emphasis in
original.
7 https://www.youtube.com/watch?v=YCJ9v_-aJho
8 http://www.bereanresearchinstitute.com/03_Doctrines/D.0003_Slain_in_the_Spirit.html, emphasis
supplied.
9 Ibid., emphasis supplied.
10 See Nader Mikhaiel, The Toronto Blessing and
Slaying in the Spirit, referenced in http://www.ukapologetics.net/slain.htm.
11 See https://www.youtube.com/watch?v=FfmAIxz1yBs&spfreload=5. Paul’s surname
may be misspelled, as the audio is slightly garbled and difficult to make out.
12 Ibid.
13 http://www.letusreason.org/Pent14%20.htm
아버지
1. 성경은 몇 개의 개체가 존재한다고 가르치나요?
"네 앞에 나 외에 다른 엘로힘을 있게 말라" 출애굽기 20:3.
"이스라엘아 들으라: 야후와 우리의
엘로아, 야후와는 한 분이라." 신명기 6:4.
"한 분 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느냐?" 말라기 2:10.
"영생은 이것이니, 오직 참되신
엘로아와 너희에게 보내진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를 아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17:3.
"한 분 외에 다른 엘로아는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8:4.
"우리에게 한 분 엘로아만 계시다." 고린도전서 8:6.
“한 분 엘로아와 모든 것의 아버지." 에베소서 4:6.
"한 분 엘로아가 계시니." 디모데전서 2:5.
"한 분 엘로아가 계신 줄 네가 믿으니; 잘 하는도다: 마귀도 역시 믿고 떠느니라." 야고보서 2:19.
2. 성경에서 한 분 엘로아께 주어진 일반적인 직함이 무엇인가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않았느냐?" 말라기 2:10.
"우리에게 한 분 엘로아, 아버지만
계시니라" 고린도전서 8:6.
"너희에게 야후와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1:3; 고린도후서
1:2; 로마서 1:7.
"야후와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갈라디아서 1:4.
"한 분 엘로아 모든 것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가운데
운행하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노라." 에베소서 4:6.
"야후와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너희에게 평강과 은혜가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전서 1:3; 에베소서 1: 2; 빌립보서 1:2; 골로새서 1:2; 데살로니가전서 1:1; 데살로니가후서 1:2.
3. 우리의 아버지이며 또한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의 아버지 되시는, 한 분
엘로아이죠?
"찬송하리로다 우리의 주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의 아버지 엘로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영적인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시나니." 에베소서 1:3.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께 올라가노라" 요한복음 20:17.
"한 분 엘로아 모두의 아버지." 에베소서 4:6.
결론: 모두의
아버지이신 엘로아 한 분만 계시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야후슈아
4. 야후슈아는 누구인가요?
"당신은 기름부음 받은 자, 살아계신
엘로아의 아들이신 것을 우리는 믿으며 확신합니다." 요한복음
6:69.
5. “살아계신 엘로아의 아들”이란 것은 단지
야후슈아의 직함을 가리키기 위함인가요 아니면 실제로 문자 그대로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말인가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으니" 이사야 9:6.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분의 손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분이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분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분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말할 수 있느냐" 잠언 30:4.
6. 만약 야후슈아가 야후와의 ‘진짜’
아들이라면? 성경은 그분이 처음부터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나요?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수천의 유다 중에 작을지라도,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내게 나오리라; 그가 오래 전부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가 5:2.
"[야후와]의 아들은 자신에 대하여
선포한다: ‘[야후와]께서 태초에 일을 시작하시기 전에,
그분의 길의 시작부터 나를 소유하셨다. 그분께서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
. . 내가 영원부터 세움을 받았나니. . .내가 그분 곁에 있어 그분과 상의하였으며:
내가 매일 그분의 기쁨이 되고, 언제나 그분 앞에 즐거움이 되었느니라.’
잠언 8:22-30. 부조와 선지자 p. 34
7. 신약 성경은 야후슈아가 실제로 문자 그대로 아들 됨을 말하나요?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1:14.
"아무도 어느 때도 야후와를 본 자가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자께서 아버지를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18.
"야후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그를 믿는 자는 정죄 받지 아니하니: 믿지 않는 자는, 야후와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음으로 이미 정죄를 받았느니라"
요한복음 3:18.
"우리를 향한 야후와의 사랑이 이것으로 증거되나니, 야후와께서 세상에 그분의 독생자를 보내사 그를 통하여 우리로 살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일서 4:9.
결론: 한 분
엘로아께서 영원의 한 지점에서 그분의 독생자 야후슈아를 낳으셨다. 만약 야후와께서 주신 분이 그분의 실제
독생자가 아니었다면, 아브라함이 받은 시험이 의미 없었을 것이다.
독생자
8. 모든 것의 아버지 한 분 엘로아께서 그분의 독생자에게 무엇을 건네셨나?
"아버지께서 그분 안에 생명을 가지신 것처럼, 그분께서 아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갖게 하셨다." 요한복음 5:26.
"그분의 영광의 밝음이요, 그분의
본체의 형상이라." 히브리서 1:3.
9. 야후와께서 그분의 독생자에게 그분의 영광을 건네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하기를, 간청하오니 내게
당신의 영광을 보이소서.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함으로
네 앞에 지나가게 하리라." 출애굽기
33:18-19.
"모든 충만함이 그 안에 있게 하시기를 기뻐하사." 골로새서 1:19.
10. 한 분 엘로아께서 그분의 이름을 그분의 독생자에게 넘겨주셨나요?
"야후와께서 언제 천사들에게, 너는
네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며, 내가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가 내게 아들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느냐? 그러나 그분께서 그 아들에게는,
오 엘로힘이여 너의 보좌가 영원하니라 라고 말씀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5, 8.
11. 그리고 또 무엇이 아버지에 의해서 그분의 독생자에게 건네졌는가?
"야후와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는 육체 안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이라, 누구라도 기름부음 받은 자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라."
로마서 8:9.
결론: 야후와는 그분의 독생자에게 제한 없는 ‘그분 안에
있는 생명’을 건네주셨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엄마로부터 독립적 존재가
되는 것처럼, 야후슈아가 아버지로부터 태어난 후에는 독립적 존재가 되었다. 그분은 태어나면서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고 거기에 더하여서, 그 아들은 그분의 형상 곧 아버지의
품성[선하심]을 받았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독생자에게 건네주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의 영인 성령까지도 그분의 아들께 나누어졌다. 야후슈아는
본질적으로 그분의 아버지 엘로아의 이름을 유업으로 받았다. 그러나 아들로서 야후슈아는 그분의 아버지와 공존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12. 야후슈아께서는 그분의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였나요?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너는 기뻐하라,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고 말하였노라: 나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다."
요한복음 14:28.
"아들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본 것만 할 수 있다." 요한복음
5:19.
"내 자신의 것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내가 내 자신의 뜻은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만 구하노라." 요한복음 5:30.
13. 야후슈아가 그분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셨나?
"영생은 이것이니 그들이 유일하신 참 엘로아를 아는 것이라."
요한복음 17:3.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나의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음이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나의 엘로아 곧 너희 엘로아께 올라간다 하라." 요한복음 20:17.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요한복음 10:30.
"엘로아의 형상으로 계신 분께서 자신을 야후와와 동등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립보서 2:6.
14. 어떤 방식으로 야후슈아는 아버지와 하나인가?
"말씀이신 [야후슈아]는 [야후와]의 독생자이며, 영원하신 아버지와 하나이다—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하나이다—[야후와]의 모든 의논과 목적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부조와 선지자, 34쪽.
결론: 야후슈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아버지와 하나이다. 그러나 자신을 아버지와 동등하게 여기지 않았다.
야후와는 야후슈아에게 모든 권위를 부여했고 그를 자신과 동등하게 만들었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
15. 성경은 유일하신 엘로아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야후와의 것이라." 고린도전서
3:23.
"너희로 알게 하노니,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야후와라." 고린도전서 11:2.
"우리의 주 야후슈아 그리스도의 엘로아 영광의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를
아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에베소서
1:17.
"주도 한 분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며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 가운데 운행하시며, 너희 모든 사람들
가운데 계신 모든 것의 아버지 엘로아가 한 분이시라." 에베소서
4:5-6.
"그가 만물을 그의 발 밑에 두셨느니라. 그가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셨을 때,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않은 것이 분명하도다. 만유를 아들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분에게 복종하되,
이는 야후와께서 만유 안에 모든 것이 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5:27-28.
결론: 한 분 엘로아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본성에서 품성에서 목적에서 그분과 동등하게 만드셨다; 그분의 완전하고 유일한 동역자였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실이, 아들을 포함한 모든 것들 위에 통치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을 무효화시키지 않는다.
16.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이라는 성경적 사실로 인해, 아들에
대한 우리의 예배에 변화가 생기게 되나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처럼 아들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5:23.
결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으로 인해 아들에 대한 우리의 예배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기꺼이, 행복하게 야후슈아를 경배한다.
그분 안에 한 분 엘로아 아버지의 충만한 품성이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들을
경배한다. 그분이 우리의 구주이며 구속주이며 아버지 앞에서 대변자이시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그분이 한 분 엘로아의 독생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경배한다.
성령
17. 성령은 누구인가?
야후와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너희가 육체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는 것이라.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것이라." 로마서 8: 9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야후와께서 그분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사 아버지를 아바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갈라디아서 4: 6
"내가 아버지께 기도할 것이므로,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리니 진리의 영이라 그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거하게 하실 것이라; 세상이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느니라: 그가 너희와
함께 거하고 너희 안에 계실 것이라. 내가 너희를 버려두지 아니하고, 내가 너희에게 오리라." 요한복음 14: 16-18
결론: 성령은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한 분 엘로아 아버지로부터 기인한 야후슈아의 영 자체이지 그 외의 다른 영이 아니다.
고린도전서 8:6.
18. 야후슈아는 아버지의 영과 분리된 어떤 다른 영을 갖고 계신가?
우주 안에 모든 존재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영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 따르면 심지어 개도 영이 있다. 그러므로 야후슈아도 그 자신의 개인적인 영을 가지고 있다. "너희가 아들들이므로,
야후와께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 속에 보내셨느니라." (갈라디아서 4:6). "너희 기도와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의 영의 부어주심을
통하여, 나의 구원이 될 것을 내가 아노니.” (빌립보서
1:19)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린도전서
6:17)라는 기록처럼, 야후슈아의 영이 야후와의 영에 복종하기 때문에 그들이 바로
하나라고 불릴 수 있다. 이 사실의 실제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교제를 갖는 것처럼, 우리는 야후슈아와 교제를 가질 수 있다.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 역시 우리와
사귀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참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와 함께 하는 것이라."
(요한일서 1:3).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통해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제를 가질
수 없다. 우리의 육체는 아버지와 그 아들의 몸체와 물리적으로 소통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영에 의해 그분들과 교제한다. 만약 그 아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영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분과 교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의 영과 그 아들의 영 사이의 이러한 뚜렷한 구별을 통해, 우리는 아버지와
그 아들과 각각 개인적인 친교를 가질 수 있다. "범죄하며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않는 자마다
야후와를 가지지 못하였느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는 자가 아버지와 그 아들을 모두 가졌느니라"
(요한이서 1:9). 우리가 오늘날 아버지와 그 아들 두 분을 다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두 분 모두 각자의 한 영을 가지고 계실 때만 가능하다. 우리는 두 분의 몸체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결론: 그렇다,
야후슈아는 아버지의 영께 철저하게 복종하고 있지만, 아버지의 영과 별개의 구별된
영을 가지고 계시다.
지금은, 진리와
영으로 한 분 엘로아를 경배하고, 과거 우리의 무지와 신성모독을 회개할 때이다. 이것이 모든 것 위에 계신 한 분 엘로아 우리의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기도이다. 그리고 우리는
기름부음 받은 자 독생자 야후슈아의 이름으로 그 기도를 올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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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망라한다. 성경을 주의 깊이 연구하면 구주께서 “땅의 심장부”에서 보낸 “삼일 삼야”가 겟세마네에서 그분께서 배신 당하신 그 밤에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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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이 성경 공부 시간에 요나의
이야기를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프레데릭
부인은 자신이 맡고 있는 2학년 학생들에게 요나에 관한 그림을 그려 보라고 했습니다. 학생들의 대부분이 바다에서 물고기와 함께 있는 요나 또는 그가 삼켜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몇 명의 학생은 물고기 안에서 기도하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프레데릭 부인이 제니퍼의
그림을 보았을 때, 그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큰 직사각형 안에, 손을 잡고 있는 한 아버지와 조그만 소년 위로 세 개의 침대와 세 개의
미소 짓는 태양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직사각형 안 대부분은 갈색 크레용으로 색칠되어 있었습니다.
위쪽에는 녹색 잔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잔디 밑에 작은 뿌리들이 꼼꼼하게 그려져
있었습니다. “제니퍼야, 난 너에게 요나에 관한 그림을 그리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너의 그림에서 요나를 볼 수 없구나. 선생님이 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한
거니?” “아녜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이해했어요. 보세요. 이것이 요나의 표적이예요: 사람의 아들이 땅에 삼일
삼야 동안 있잖아요. 작은 소년이 보이세요? 그 소년이 아들이예요.
침대들은 삼야이구요. 태양들은 그 낮들이구요 그것들이 모두 땅에 있죠.
이 그림이 프레데릭 선생님을 미소 짓게 한 것처럼,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작은
제니퍼보다도 “요나의 표적”에 대한 이해가 더 적다. 구주께서 그의 죽음에 관해 예언하실 때 의미하셨던 것에 대하여 교회들마다 그 해석을 다르게 가르친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요나가 삼일 삼야를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삼일 삼야를 땅의 심장부에 있으리라.” (마태복음
12:39-40)
다양하게 많은 이론들 – 각기 다른
종파들이 “요나의 표적”에 대한 각기 다른 해석을 가지고 나온다.
그 기간에 대하여 주장되고 있는 의견들이 아래와 같다:
1. 금요일 아침 십자가 처형부터 일요일
아침 부활까지.
2. 수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3. 무덤에서 매장되셨던 시간만, 즉,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위와 같은 해석들에 있어서의 첫째
문제는, 이스라엘이 이교 줄리안 달력을 사용했다는 잘못된 전제를 기초로 했다는 것이다:
야후슈아[아들]의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모세의 태음태양력을 사용했다. 성경상 달력은 행성 이름을 딴 요일 제도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그 어떤 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본래 줄리안 달력의 초기 8일 제도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론들의
부정확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문제들이 있다.
십자가 처형에서 부활까지: 많은 사람들이 요나의 징조가 십자가
처형에서 부활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구주께서 아빕월 14일 아침 희생 드리는 시간인 오전 중간쯤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
때문에 부정확하다. 세 번의 낮은 포함되지만, 밤은 단지 두 번만 해당되기 때문이다.
수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어떤 크리스챤들은 요나의 표적을 야후슈아[아들]께서 묘에서 72시간 전체를 계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시나리오 하에서, 그들은 십자가 처형 사건이 줄리안 달력의 수요일에 발생했다고 가르친다. 그와 같이 계산하면
부활이 토요일 밤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 신념 역시 부정확하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부정확하다. 첫째, 먼저 언급한 것처럼,
줄리안 달력은 야후슈아[아들] 시대에 유대인들에
의해 사용돼지 않았다. 둘째, 성경은 부활이 아빕월
15일 밤에 발생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한다. 오히려, 그것은 아빕월 16일 아침 동틀녘에 발생했다: “안식일이 끝나고 주의 첫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때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돌무덤을 보러 갔는데.” (마태복음 28:1) 십자가 처형 사건은 출애굽 때 야후와[아버지]에 의한
예표와 실상의 위대한 체계에 따라 발생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빕월
14일 전에 발생할 수 없었다.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 다른 사람들은 야후슈아[아들]께서 무덤에서 계셨던 시간만이 “땅의 심장부”에서 계셨던 시간에 해당한다고 가정함으로써 실수해왔다.
나사로는 무덤의 죽음에서 4일 후에 일어났고 표적을 원했던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매우 잘 인지했다. [야후슈아]께서 나사로 사건보다 더 적은
날을 사용하여 표적으로 제시하시면서 반복할 것을 의미하셨나? 아니다, 그 표적은 죽은 자가 무덤에서 세 낮과 밤 후에 살아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다.
그 표적은 그분 자신을 친히 우리의 죄들 속에 파
묻는 것이었다. 요나가 예언했던
것처럼 야후와[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 야후와께서 듣지 않으시는 곳에서 고통과 함께 우리들의 죄 값을 위해 죽음을 당하시고
셋째 날 다시 사신 것이다.1
야후슈아[아들]께서 주신 표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사용한 상징적인 언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제나처럼,
성경은 그 자체의 비밀을 설명하기 위해 단서들을 제공한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에 대한 야후슈아[아들]의 언급의 의미를 명확하게 밝혀주는
세 가지 포인트가 여기에 있다:
1. 포함하는 계산 VS 포함하지 않는 계산
2. “땅의 심장부”라는 의미
3. “삼일 삼야”가 언제 시작했는지
포함하는 계산: 성경 시대들의
로마인들과 이스라엘 백성들 둘 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배워왔던 것과는 다르게 계산했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날 사람들은 포함하지 않는 방식으로 계산한다. 예를 들어서, 당신의 자녀가 봄 방학 후 4월
20일에 당신에게 온다고 가정하자. 그녀는 여름 방학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는다.
당신은, 그 학교가 여름 휴가를 위해 6월
15일에 마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녀에게 여름 방학은 두 달 후에 시작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5월과
6월만을 계산하는, 포함하지 않는 방식으로 계산했다. 당신이 현재
4월에 있기 때문에 그 달을 계산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로마인들은 언제나 포함하는 방식으로 계산했다. 그들에게 여름 방학이 언제 시작되는지 물었다면,
그들의 대답은 세 달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계산을 시작하는 그 때를 포함해서 계산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요나의 표적이 꽉 찬 71시간을 포함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더군다나, 24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는 것은 그 이스라엘 민족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던 계산
방식이다. 밤은 경으로 나뉘어졌고 낮은 해시계처럼 12시간으로 동등하게
나뉘어졌다. “낮에 12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요한복음 11:9 참조.) 야후슈아[아들]께서 친히 물으셨다, “여름의 시간이 겨울의 시간보다
당연히 길었다. 포함하는 방식의 계산으로, 낮의 어떤 부분은 한 날로
계산되었다. 그러므로 비록 그분께서 그 날이 시작될 때 부활하셨을지라도, 그 계산에서 구주께서 부활한 날인 아빕월 16일이 셋째 날이 된 것이다.
땅의 심장부: 신도들은
오랜 동안 “땅의 심장부”가 매장되었던 것을 의미한다고 가정해왔으나,
이것은 너무도 제한된 설명이다. 진정한 “땅의
심장부”는 훨씬 더 넓은 적용 범위를 가진다. 성경은 “땅”을 인류로서, 더 특별하게는 인간의 마음을 의미한다.
야후슈아[아들]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땅에 심겨진 것이 “그들의 마음에 있는 말씀”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4:3-20) 성경도 역시 사람의 마음이 악하고 죄 많다고 명백하게 말한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예레미야 17:9)
“[야후와]께서 땅 위에 사람을 만드신 것으로
인해 슬퍼하시며 또 그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세기 6:5)
마음에 대한 본래 그리스어는 이것을
더 확실하게 해준다: “카르디아(kardia)…마음,
즉 사상들 또는 감정들 (정신)….”2 그리하여, 땅의 마음(심장부)은 땅 속에 묻히는 단순한 물리적 매장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죄의 정죄아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야후슈아[아들]는 죄가 없으셨다. 그분께서 의무적으로 구속주가
되어야 했던 것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구속주가 될 수 없으셨을 것이다. 즉, 그분께서 자발적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떠 맡으신 것이다. 이것이, 창조주께서
회개하는 죄인에게 칭의와 구속을 주시기 위해 허락하신 은혜의 비밀이다. 야후슈아[아들]께서 그분과 전혀 상관 없는 우리의 죄를 받아들이심으로써,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의 의를 제공하실 수 있었고,
그 안에서 우리가 죄와 상관 없게 되었다.
또 모든 것이 [야후와]에게서 났으며 그분께서 야후슈아[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화해하게 하는 사역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곧 [야후와]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신과 화해하게 하시며 그들의 범법을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해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맡기셨느니라…. [야후와]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야후와]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18-19, 21)
53장 전체가 이 신성의 맞바꿈에 대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야후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
(이사야 53:5-6, 12)
야후슈아[아들]께서 우리를 위한 죄가 되셨을 때,
하늘에 대항하여 거역하기를 계속하는 모든 자들이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그 형벌을 그분께서 받아들이셨다. 그 형벌은 야후와 그분 자신으로부터의 분리다:
“오직 너희 불법들이 너희와 너희 [엘로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들이 그분의 얼굴을 너희에게 숨겼으므로,
그분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이사야 59:2)
“내가 마음속으로 불법에 관심을 두면,
야후와[아버지]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시편 66:18)
그 계산이 언제 시작했는가? 야후슈아[아들]께서 인내하신 그 형벌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으로부터의 고통스러운 영원한 분리였다. 이 고통은
그분께서, 피와 “물”이 흘러나오게
한 심장 파열로 죽으실 때, 그 죽음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구속주의
고통은 첫째 못이 가죽에 구멍을 뚫을 때나 로마의 채찍으로 처음 맞을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선지자
요나의 표적을 이해하는 열쇠다. 야후슈아[아들]의 고통은 그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죄에 대한 신성의
정죄 아래로 떨어질 때 시작됐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리스도는 인류를 대신하여 고통 받으셨고, 야후와[아버지]의 아들로서 인간의 본성은 죄책감이라는 끔찍한 공포 아래서, 그분의 창백하고 떨리는 입술로부터
번민하는 울부짖음이 나올 수 밖에 없었을 때까지 마음이 동요되셨다. “오 나의 아버지, 그것이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타락한 인류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다면,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늘로부터 온 한 천사가 그 고통을 견뎌낼 수 있도록 그분을 강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의 본성은 죄의 감각의 공포 아래서 죽으려 했을 것이고 또한 그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3
야후슈아는 세상의 죄들을 없애주는
야후와[아버지]의 어린양이었다. 그가 유월절 (아빕월 14일)에 십자가에 처형되셨기에, 죽음의 천사가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나쳤던 것과 똑 같이,
야후와의 공의가 회개하는 죄인들을 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고통은 아빕월 13일 마지막 저녁 식사 후에 겟세마네에서 시작됐다.
인간의 대리인이자 담보물 위에 응보의 공의를 가한 그 힘은, 죄로 가득 찬 세상 위에 떨어졌어야 할 그 어마한 죄의 무게 아래서 고통 받고
있는 한 존재를 지탱해주고 유지시켜 준 힘이었다. 그리스도는 [야후와]의 율법을 범한 자들 위에 선고되었던 그 죽음으로 고통 받고 계셨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이
살아계신 [엘로아]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죄로 가득찬 세상을 위해 [야후와]의 진노를 담당하실 때, 무한하신 [엘로아]의 아들 그리스도의 고통이 어느 정도로 컸던 것인지 결코 설명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야후와]의 율법을 범한 죄의 결과였고, 겟세마네
동산은 죄로 가득 찬 세상 고통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어떤 슬픔도 어떤 고통도 [야후와]의 아들께서 견뎌내신 그 것과 견줄 수 없다.4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신”(이사야 53:12) 구주께서 겪으신 그 격심한 정신적, 감정적 고통은 겟세마네에서 시작되었다. 성경은 그 처절한 결과를 기록한다: “그분의 땀이 큰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누가복음 22:44) 이것은 그분이 체포되시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죄인들을 위한 신성의 진노를 이미 담당하심으로, 형벌은 실제 십자가 처형 전날 밤에 시작됐다. 성경은,
죄인들을 위한 그 형벌이 구주께서 십자가에서 계셨던 약 6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망라하는 것임을 증거한다. 성경 안에는 야후슈아[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3일의 기간을 의미하는 열두 개의 구절이 있다. 그 모든 구절들이 특별히, 그분의 죽음에 앞서 시작된 정신적 고통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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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죄를 대신 지어주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구주께서 담당하신 죄의 저주의 그 공포를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압도적인 권능과 함께 떨어지는 [야후와]의 진노를 담당하신 그분의 슬픔과 비교될 수 있는 슬픔은 없다. 인간의 본성은 제한된 양의 시험과 시련만 견딜 수 있다. 유한한 존재는 단지 유한한 정도까지만 견딜 수 있고, 결국에 인간의 본성은 굴복한다; 그러나 [야후슈아]의, 본성은 고통에 대해 더 큰 수용 능력을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신성의 본성으로 존재하셨고, 세상에 잃어 버림 바 당한 자들의 죄들로부터 온 그 결과를 견뎌야 하는 고통에 대한 능력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고, [야후와]의 은사는 [야후슈아]를 통하여 회개하고 믿는 자에게 주시는 영생이다.”
엘렌 G. 화잇, Manuscript 35,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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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야후슈아]께서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셋째 날 다시
일으켜질 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기 시작하시니.” (마태복음 16:21)
그 셋째 날이 언제로부터 계산된 셋째
날인가? 그 고통이 시작됐던 때부터다: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시며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같이 기록되었은즉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셋째 날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마땅하며.’ ”
(누가복음 24:45-46)
“또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며 사흘 뒤에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시되” (마가복음 8:31)
이 구절이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다시 일어나시는 일이 그분의 고통과 함께 시작됐던 삼일의 과정 후에 온다는 것이 매우 명확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장은 부활의 날인 아빕월 16일에 예루살렘으로부터
엠마오의 집으로 걸어가는 두 남자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들은 걸으면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에 관해 이야기 했다 (누가복음
24:14).
그들이 대화하며 추론하는 동안, 야후슈아[아들]께서 그들 곁에 다가 가셨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닫혀 있었기에,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걸으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것들이 무슨 대화이기에 너희가 슬퍼하느냐?” 하시니,
그들이 그분에게 대답했다, “나사렛 예수님에 관한 일들이니라.
그분은 [엘로아]와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에서 능력 있는 대언자였는데 수제사장들과 우리의 치리자들이 그분을 넘겨주어
정죄 받아 죽게 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 (누가복음 24:15-17, 19-21)
이것으로 시작하여 구주께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북 돋아 주셨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누가복음 24:25-27)
(이와 같은
사건들의 과정을 보여주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읽기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참조하세요. 마태복음
17:22-23, 20:18-19 마가복음
9:31, 10:34 누가복음 9:22, 18:31-33, 24:7 사도행전
10:39.5) 구주의 고통들과 죽음에 대한 이 놀라운 예언을 무시해서는 안되며,
그 기간에 대해 꽉 찬 72시간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아빕월 13일 저녁부터 아빕월 16일 동틀녘6까지의 기간이 이 예언에 대한 범위다. “선지자 요나의 표적”은 구주의 고통과 죽음에서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그분께서 자원하여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죄인들에 가해져야 할 율법의 정죄를 받아들이셨고 야후와[아버지]로부터 분리되어지는 상태에까지 복종하셨다.
1 Jen Shroder, Three
Days & Three Nights: The Sign of Jonah.
2 Kardia, #2588,The New Strong’s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3 SDA Bible
Commentary, Vol. 5, p. 1103.
4 Ibid.
5 사도행전
10:39에서 “죽였으나(slew)”로 번역된
본래 그리스어는 폭력적인 죽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자비롭고, 빠른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으로 가득 찬 격렬한 죽음이다.
6 부활이
예언의 셋째 날인 아빕월 16일 동틀녘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하루가 동틀녘에 시작함을 밝혀 주는 성경적 증거를
간접적으로 지지한다.
질문: 야후와[아버지]의 자비를 거절한 자들이 영원의 끊임없는 세대를 걸쳐 고통을 당할 것인가?
성경적인 답: 아니오. 그들은 없어질 것이다. 악한 자는 영원히 “끊겨져 버릴 것이다” 그들은 완전히 “멸망 당한다” 그들은 불에 의해 “소진되고.” “불 살라지고,” “말살된다.” 그리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은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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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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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악한 자]는 자신의 똥처럼 영원히 소멸될 것이라: 그를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어디 있지? . . .26 모든 어두움이 그의 비밀스런 장소에 숨겨지리라: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태워 없애버리리라; 그 불은 또한 그의 장막에 남겨진 것들도 그와 함께 불살라 없애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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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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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에 계신 엘로아의 분깃이 무엇이냐? 높은 곳의 전능자의 유업이 무엇이냐? 3악한 자에게 파멸이 아니냐? 불의를 행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형벌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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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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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당신은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야후와[아버지]는 피에 목마르고 속이는 자들을 몹시 싫어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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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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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신께서 나라들을 꾸짖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악한 자들을 멸하셨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워버리셨습니다. 6 오 원수여, 파괴가 영원히 마쳐졌도다! 그리고 너는 도시들을 파괴하였다; 심지어 너의 기억들도 없어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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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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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악한 자는 지옥으로 들어갈 것이다 ["지옥"=H7585:스올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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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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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악한 자 위에 덫들, 불과 유황, 끔직한 폭풍우가 비같이 내릴 것이며, 이것이 그들의 잔(cup)의 할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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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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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당신의 진노의 시간에 당신께서 그들을 불타는 솥처럼 만드실 것이며; 야후와[아버지]는 그분의 진노로 그들을 삼킬 것이며, 불이 그들을 삼켜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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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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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들은 야후와[아버지]의 행사와 그분의 손의 운행하심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을 멸절시킬 것이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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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7: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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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악하게 행하는 자는 끊쳐질 것이며; 야후와[아버지]를 기다리는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10잠시 후 악한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정말로, 네가 그의 장소를 자세히 살필지라도,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11그러나 온유한 자는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며, 평안의 풍부함으로 기뻐할 것이라.
죄와 죄인들은 이 땅 위에 있는 뜨거운 지옥에서 파멸될 것이다: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은 불경한 사람들의 심판과 지옥의 날에 있을 불이 있기 까지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벧후 3:7)
온유한 자는 야후와[아버지]가 만드실 새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 것이며, 그것들이 내 앞에 남아 있을 것이고, 야후와[아버지]가 말하노니, 너의 후손과 너의 이름이 남겨질 것이다." (사 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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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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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그러나 악한 자는 멸망할 것이다;
초원들의 화려함 같던 야후와[아버지]의 적들이, 사라질 것이다.
연기 속으로 그들은 사라져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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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37:3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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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야후와[아버지]를 기다리라, 그분의 길을 지키라, 그분이 너를 땅을 유업으로 주시기 위하여 너를 높이리라; 악한 자들이 끊길 때, 네가 그것을 볼 것이다. 35 나는 큰 권세를 가졌으며, 초록 나무와 같이 스스로 번성한 악한 자들을 보아왔는데, 36그러나 결국 그는 죽었다, 보라, 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나는 그를 찾았으나, 그는 발견되지 않았다. 37 흠 없는 사람을 표하라, 그리고 정직한 자를 관찰하라; 이는 그 사람의 미래는 평안이기 때문이다. 38그러나 죄인은 함께 멸망 당할 것이다; 악한 자의 미래는 끊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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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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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왜 너는 악에 거하는 것을 자랑하느냐, 오 능력 있는 사람아? … 5엘께서 너를 영원히 파멸시킬 것이다; 그가 너를 데리고 나가서, 너의 거하는 처소에서 너를 잡아 뽑고, 산 자들의 땅으로부터 너를 뿌리째 뽑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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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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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오 엘로힘 당신은 그들을 파멸의 웅덩이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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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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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진노로 그들을 태워 없애 버리시며, 그래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엘로힘께서 땅의 끝까지 야곱을 통치하는 분이심을 그들로 알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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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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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확실히 당신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들에 두시고; 당신께서 그들을 멸망으로 던져 내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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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7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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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정말로, 당신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들은 소멸해버릴 것입니다; 당신께서는 매춘을 위해 당신을 버린 모든 자들을 파멸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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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83: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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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불이 나무들을 태우는 것처럼, 화염이 산들을 불 속에 있게 하는 것처럼… 17 그들로 오랫동안 당황하게 하고 크게 놀라게 하라… 그렇다, 그들로 부끄러움과 멸망에 놓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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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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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악한 자들이 초원에서 솟아 오를 때,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이 번영할 때, 그들은 영원히 파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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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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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보라, 당신의 적들이여, 오 야후와[아버지]여,
보라, 당신의 적들이 멸망 당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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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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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타는 숯이 그들 위에 떨어지게 하라: 그들로 불 속에 던져지게 하라; 깊은 웅덩이에, 그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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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1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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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자를 보존하시는 야후와[아버지]: 그러나 모든 악한 자는 그분께서 파멸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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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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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악한 자는 땅으로부터 끊쳐질 것이다,
신실하지 않은 자는 뿌리째 뽑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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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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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너는 마지막에 슬퍼한다,
너의 살과 몸이 타서 없어져 버릴 때,
12말하기를, 어찌 내가 교훈을 싫어하였는지, 나의 마음이 책망을 경멸하였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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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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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회오리바람이 지나갈 때, 악한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의인은 계속 지속되는 기초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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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0: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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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의인의 희망은 기쁨이 될 것이나,
악한 자의 기대는 사라질 것이다.
29 야후와[아버지]의 길은 정직한 자에게 힘이나,
멸망은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올 것이다.
30의인은 결코 제거되지 않을 것이나,
악인은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다.
주목: 악한 자와 회개하지 않는 자는 파멸 당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소멸[죽음]될 것입니다. 그들은 야후와[아버지]께서 창조하실 새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야후와[아버지]께서 의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있을 것 같이. . . 너의 후손과 너의 이름도 내 앞에 있을 것이라" (사 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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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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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악한 자들은 던져지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인의 집은 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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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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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멸망 당할 것이나, 계명을 경외하는 자는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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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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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죄인들과 악인들의 멸망은 함께 이루어질 것이며,
야후와[아버지]를 비난하는 자는 불 태워 없어져 버리리라. . .
31강한 자가 부싯깃처럼 될 것이며, 그 행사가 아주 작은 불똥 같을 것이라; 둘 다 함께 불에 탈 것이며, 누구도 그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라.
주목: 악한 자는 불에 의해 파멸되고 불에 살라 없어져 버릴 것이다. “누구도 이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불은 “꺼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 3:12; 눅 3:17) “끄다”라는 것은 단순히 “화력을 잃게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어떤 누구도 이 불을 타오르지 않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타서 없어져 버릴 때까지는 불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악한 자는 문자 그대로 그루터기와 재들로 변할 것입니다.
"보라, 그 날이 오니, 화덕처럼 불에 탈 것이라; 모든 교만한 너희들아 그리고 악을 행하는 모든 자여, 그루터기만 남게 될 것이라: 그들을 모두 태워 버릴 그날이 온다, 주인들의 야후와[아버지]가 말하노니, 그들의 뿌리와 가지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그분의 날개로 치료함으로 의의 태양이 솟아 오를 것이라." 그리고 너는 앞으로 나아가고, 마구간의 송아지들처럼 자라리라. 그리고 너희가 악한 자를 밟을 것이라; 내가 이것을 행하는 “그날에 그들이 너희 발의 신바닥 아래서 재가 될 것이라.” 주인들의 야후와[아버지]가 말하노라. (말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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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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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그러므로, 불이 그루터기를 삼키고, 화염이 그 찌꺼기를 태운다, 그들의 뿌리가 썩은 것처럼 될 것이고, 그들의 꽃이 먼지처럼 올라갈 것인데; 이는 그들이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야후와[아버지]의 율법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말씀을 멸시하였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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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0: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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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모든 것의 주인 되시는 야후와[아버지] 주께서 살진 자를 파리하게 하시며; 그분의 영광 중에 그분이 불의 타는 것과 같이 불을 붙이실 것이다. 17이스라엘의 빛은 불을 위한 것이 될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자는 화염을 위한 것이 될 것이고; 그분의 가시들과 덤불들을 하루에 태우고 삼킬 것이다. 18그것이 그분의 삼림과 열매 맺던 목초지와 영혼과 몸 둘 다의 영광을 태울 것이며; 아픈 사람이 쇠약해지는 때와 같을 것이라.
주목: 앗시리안 군대의 비참한 멸망을 예언하며: 여기서 우리는, 야후와[아버지]의 심판이 실행될 때 악한 자의 최후의 운명의 전조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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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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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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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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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보라 야후와[아버지]의 날이 온다, 진노와 불붙는 노가 그 땅을 황폐케 할 것이며; 그분은 죄인들을 파멸시킬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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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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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야후와[아버지]여, 당신의 손이 높이 들릴 때라도 그들이 보지 아니하오나, 백성을 위하시는 주의 열성을 보면 부끄러워할 것이라; 불이 당신의 대적들을 사르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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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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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그들은 죽었도다, 살지 못하리라; 그들은 병들었고, 그들은 일어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당신께서 그들을 처벌하셨고 파멸시키셨으며, 그들의 모든 기억을 소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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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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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천둥과 지진과 큰 소음과 폭풍우와 삼키는 불의 화염으로 너희는 형벌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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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0: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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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보라, 야후와[아버지]의 이름이 멀리서부터 온다, 그분의 진노로 불타며, 그분의 짐은 무거우며; 그의 입술은 분개로 가득 찼고, 그의 혀는 삼키는 불과 같다. . . 30삼키는 불의 화염과 그의 진노의 의분과, 흩으심과 폭풍우와 우박들로 함께 야후와[아버지]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음성을 들리도록 하실 것이라,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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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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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너희 열방아, 가까이 와서 들으라;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땅과 거기 있는 모든 것들아, 세계와 그 안에서 나는 모든 것들아 들으라. 2야후와[아버지]의 분개가 모든 열방들 위에 있고 그의 그들의 모든 군대들 위에 있도다: 그가 완전히 그들을 멸하셨으며, 그는 그들을 괴멸하셨도다. 3 그들의 시체가 내 던져진 바 되며, 그들의 사체들로부터 악취가 올라오도다, 산들은 그들이 피로 녹아지리라. 4*하늘의 모든 것들이 풀어지고, 하늘들이 스크롤처럼 함께 감기우며: 모든 것들이 떨어져 내리고, 포도나무에서 잎이 떨어지고 무화과 나무에서 무화과가 떨어지는 것 같으리라.
*어린양의 진노: 계 6: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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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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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보라, 그들은 그루터기 같을 것인데; 그 불이 그들을 태울 것이라; 그들은 그 화염의 권세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원하지 못할 것이며: 이 불은 따뜻하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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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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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모든 영혼들이 나의 것이라; 아버지의 영혼이 나의 것인 것처럼, 아들의 영혼도 나의 것이라: 범죄한 그 영혼은 죽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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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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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야후와[아버지]의 날이 모든 자 위에 가까지 이르렀으니: 네가 행한 대로, 너에게 행해질 것이다. 너의 보상이 네 자신의 머리 위에 돌아갈 것이라. 16네가 나의 거룩한 산 위에서 취했던 대로, 모든 자들이 계속 마시리니, 그들이 마시고 삼켜서 그들이 본래 없던 자들인 것처럼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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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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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네가 야후와[아버지]를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고래처럼 취한 그들은 , 완전히 마른 지푸라기 처럼 불에 삼키운 바 될 것이라.
주목: 악한 자가 삼키운 바 될 것이라는 확신에 더하여서, 가장 놀라운 발표가 영원한 미래와 관련하여 이 문장에서 이루어진다: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죄, 반역 그리고 비참한 모든 것들이 그들과 함께 영원히 전멸될 것이며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야후와[아버지]를 찬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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슥
14:3,4,9,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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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그분이 전투의 날에 싸울 때처럼 야후와[아버지]가 앞서 가시고, 그런 열방들을 대항하여 싸우실 것이다. 4그분의 발이 그날에 올리브 산 위에 설 것이라, . . . 9야후와[아버지]가 모든 지구 위에 왕이 되실 것이라: 그날에 야후와[아버지] 한 분이 계실 것이며, 그분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 . . . 11사람들이 그 안에 거할 것이라, 더 이상 파멸은 없을 것이라; 예루살렘은 안전히 거할 것이라. 12예루살렘에 대항하여 싸워 온 모든 사람들을 야후와[아버지]께서 죽이시고 그 곳에 재앙이 있을 것이라; 그들이 그들의 발로 설 때 그들의 육체는 불타서 사라져 버리고, 그들의 눈도 그 구멍에서 없어져 버리리라, 그들의 혀도 그들의 입에서 없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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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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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라, 그날이 오리라, 화덕처럼 불 타리라; 모든 교만한 자들아, 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아, 지푸라기가 되리라: 그들을 불태워 버릴 그날이 온다, 모든 것의 주인 되는 야후와[아버지]가 말한다, 뿌리나 가지도 남기지 않을 것이라. 2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들에게는 그의 날개로 치료하는 의의 태양이 떠 오를 것이다; 그리고 너는 앞으로 나아가고 외양간의 송아지들처럼 자라리라. 3네가 악한 자들을 밟으리라; 내가 이것을 행하는 날에, 야후와[아버지]가 말하기를 그들은 너의 발의 신바닥 아래서 재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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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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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야후와[아버지]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분은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목: "멸망"이라는 단어는 괴로움 속에서 영원히 “고통” 당하는 것이 아니다.
"멸망"
[G622]: G575부터 G3639를 근거로; 완전히 파멸되는 것 (잃은 바 된, 사라진), 문자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 멸망하고, 죽고, 손상되고, 소멸한다. (Strong’s Concord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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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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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the wages 사망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러나 야후와[아버지]의 은사는 우리 주,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아들]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다.
주목: "죄의 대가는 사망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죄의 대가는 고통을 겪으며 영원히 사는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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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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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 .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 19그들의 결국은 멸망, 그들의 신은 그들의 배요,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수치요,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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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후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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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야후와[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자들과 우리 주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타오르는 불로 갚아지리니: 9주의 임재 앞에서, 그의 권세의 영광으로부터, 영원한 파멸 로 형벌을 받으리니,
주목: "영원한 멸망" 는 "영원한 고통"을 의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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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2: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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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야후와[아버지]는 공경하는 자들을 어떻게 시험들로부터 구원할지를 아시나니, 불의한 자를 심판의 날까지 형벌 받기 위하여 보존해두시는 것이라: 10부정한 호색으로 육체를 따라 걷는 그들과 주관하는 자를 멸시하는 자들은 형벌하실 것이다. 그들은 건방지고, 자기 의지로 행하며, 존귀한 자들의 악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11더 큰 권세와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야후와[아버지] 앞에 있는 그들을 대항하여 고소하지 않는다. 12그러나 이 사람들은 멸망받기 위하여 만들어진, 본래 야비한 짐승들처럼,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악한 것들을 말하며; 그들 자신의 타락으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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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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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지금 있는 하늘들과 땅이, 동일한 말씀으로, 불손한 자들의 파멸과 심판의 날에 불사르기 위하여 보존하여 두신 것이라.
주목: "지옥"은 지금 불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이 지구가 뜨거운 지옥이 될 것이다. 이 불은 완전히 사탄과 그의 천사들과 죄와 죄인들과 죽음을 없애버릴 것이다. 이것이 두번째 사망이다. (계 2:11; 20:6; 20:14; 21:8)
죄는 영원히 생기지 않을 것이며 결코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야후와[아버지]를 대항하여 꾀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완전한 끝을 만들 것이며: 재난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나훔 1:9)
야후와[아버지]는 그리고 나서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 "내가 만들 새 하늘들과 새 땅이 내 앞에 있을 것과 같이, 야후와[아버지]가 말하기를, 너의 후손과 너의 이름도 내 앞에 있을 것이라" (사 6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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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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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열방들이 분노하며, 당신의 진노가 이르렀으니and 그들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죽은 자들의 때이다, 당신께서 당신의 종들과 선지자들, 성도들, 당신의 이름을 경외한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땅을 파괴시키는 자들은 멸망시킬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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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2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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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년이 마쳐질 때, 사탄은 그의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다, 8땅의 사방에 있는 열방들을 속이기 위해서 나가, 전투하기 위하여 곡과 마곡을 함께 모을 것이다: 그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 것이다. 9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장막과 사랑하시는 도시를 순회하매: 불이 야후와[아버지]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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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고통이라는 생각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
죽음 이후에 영원히 고통 받는 영원히 불타는 지옥의 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계 17장의 음녀)
의하여 유명하게 되었다. 카톨릭은 이 교리를 그리스와 이교도로부터 들여왔다. 로마 교회는 이 교리가 중세 시대에 매우 유용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카톨릭은 이 교리를 이용해서 “면죄부”를 팔아서 부유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림 받은 자들이 영원히 고통 받는다는 기록이 성경 어디에도 없다.
결론: 악한 자와 회개하지 않은 자는 천년왕국 다음에 오는 불에 의해서 멸망 당할 것이다.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그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현대의 바리새인
정신으로 진리를 대체하고 있다
신실한 많은 크리스챤들이
히브리인처럼 되는 것에 유용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사탄의 기만으로서 인류
역사가 마쳐지려는 이 시급한 때에,
모든 중요한 주제들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여러분과 이 지구상의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성가신 문제들을 확실하게
해결해준다는 놀랍고 새로운 가재 도구에 대한 광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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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입니다. 이제 당신은 다시는 이런 사기
광고에 희생양이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이런 슬픈 일이 영적인 문제들에
발생한다면 얼마나 더 마음이 아플까요. 셀 수 없이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와 유사한 함정에 빠집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의 신부나 목사의
말을 진리로 받아 들이며, 그들의 영적인 스승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연구하기를 거절합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서, 사탄은 더욱 교묘한 기만을
준비했습니다: 더 진보된 빛을 유대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는 기만입니다.
성경에는 엄숙한 경고가
기록되어 있다: “정신을 차리라. 깨어 있으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울부짖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베드로전서 5:8) 마귀의 분노가 커진 이유는 요한계시록12:12에
나온다: “마귀가 자기 때가
조금만 남은 줄 알므로 크게 진노하여 너희에게로
내려갔도다.”
구주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은 조금도 방심하지 않는다. 현명한 처녀들처럼, 그들은 신랑이 오고 있다는 외침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분을 향한 그들의 사랑으로, 그들은 등불을 준비하며, 온 생애를 그분께 맞추고자 노력한다. 이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신실하고 보수적인 많은 크리스챤들이
이 마지막 때의 진짜 중요한 일들로부터 어떤 다른
가르침으로 마음을 빼앗겼다. 히브리인처럼 되어야 구원 받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가르침이다 –이스라엘이 야후와께서 선택하셨던
백성이기 때문에 자신들 또한 유대인처럼 되어야 하며, 그 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신념이다.
설교가 선포되고, 그 후에 이스라엘을 지원하기 위한
수백만 달러가 보내진다. 존 하게는 18,000명 회중의 담임목사로서, 이 신념을 주장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06년2월, 이스라엘을 위한 크리스챤 연합의
설립자이자 전국 위원장인 존 하게 목사는 이스라엘의
지원에 집중한 국가적인 풀 뿌리 운동을 일으킬 때가
왔다고 결정했다. 그는 미국 도처에 있는 크리스챤
지도자들에게 이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는 데에 자신과
함께하라고 초청했다. 각 종파, 대형–교회, 미디어 사역, 출판 회사, 크리스챤 대학을 대표하는 400명이 넘는 크리스챤 지도자들이
그 초청에 응했고 이스라엘을 위한 크리스챤 연합이
탄생했다.1
어떤 이들은, 가능한 거룩해지고자 하는 진심
어린 소원을 가지고, 옷과 다른 부분들에 있어서 랍비의
관습들 중 많은 것을 채택한다. 그들은 말할 때 히브리 단어나
문장들을 섞어 쓰며 –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이스라엘에 방공호를 건축하기 위한 돈을 마련한다. 이것은 행위로 구원 받고자 하는
매우 교묘하고 주요한 우회 방식이다.
선지자 요엘은 마지막
세대에 관한 생생한 그림을 그리며 선포했다: “야후와의
날이 판결 골짜기 안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무리, 많은 무리가 판결 골짜기에 있도다.”
(요엘 3:14) 무당, 신부, 목사, 랍비가 무엇을 믿으라고 말하든지
간에, 영적인“전문가”를
원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나 야후와께서는
이 역할을 어떤 특정 사람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은 생명수를 받기 위해
구주께 직접 나아 와야 한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만군의 야후와가 이같이말하노라… 너희에게 손을 대는 자는 그분의 눈동자에 손을 대는
것이라.”
(스가랴 2:8)
이 구절과, 또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 기초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활, 옷, 관습에 있어서, 만약 유대인처럼 된다면, 그들이 야후와를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채택한 많은 것들이
바리새인들의 사람이 만든 전통들이다.
”성전의 파괴와 함께(서기70년) 사두개인들이 모두 사라지며, 바리새인들의 손에 유대인의 모든
일들과 규정이 맡겨졌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삶이 바리새인에 의해
규정되었다. 유대교의 전체 역사가 바리새인의
관점으로 다시 지어졌고, 과거의 산헤드린에 새로운 측면이
주어졌다. 새로운 전통의 사슬이 이전 제사장의
전통을 대체했다 .
. . 바리새 정신이 유대교의 특성과
미래 유대교의 삶과 사상을 형성했다.”2
영적인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유대인 전통으로 향하는 자들은 실제로는, 바리새인 정신으로 향하는 것이다. 유대인 학자들은 현대의 유대교가
바리새 정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바리새 정신이 탈무드
정신이 되었다 …
[그러나]고대 바리새인의 영이 변하지 않고
살아 남아 있다. 유대인이 …탈무드를 공부할 때, 그는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교육
기관들에서 사용된 논쟁들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 . . [바리새인들의] 교리의 영이 생동감 있게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팔레스타인부터 바빌론까지; 바빌론부터 북 아프리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독일까지; 이런 나라들로부터 폴란드, 러시아, 그리고 동유럽까지 일반적으로, 고대 바리새인 정신이 퍼져 왔다.3”
구주의 가장 단호한
꾸짖음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분께서 그들을 “눈
먼 인도자,” “어리석은 자들과
위선자들,” “뱀들,” 그리고 “독사들의
세대” 라고 칭하셨다. 바리새인들을 “위선자들” 이라고
부르시면서, 야후슈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도다. 겉으로는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태복음 23:27)
오늘날 많은 신실한
크리스챤들이 유대인들이 그렇게 말한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야후와께 특별한 백성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대의 유대교는 고대 바리새인의
대응물일 뿐 특별한 이점은 없다. 유대인들을 특별한 빛으로 바라보는
자는 그들을 신성의 명령의 수준으로 높이며 사람이
만든 전통들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야후슈아께서 바리새인의 전통으로
향하는 모든 자들의 종말에 대해,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하늘의 왕국을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아니하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는 자들도 허락하지 아니하는도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만들기 위해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만들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마태복음 23:13, 15)
현대의 유대교는, 수천 가지의 사람이 만든 법들과
전통들로 구성된 고대 바리새 정신일 뿐이다. 그러나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명령들의 진리와 아름다움을 모호하게 만드는 이런
전통들을 ” 증오하신다” 고
말씀하셨다:
오 이스라엘의 집아. . . 내가 너희의 절기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너희의 엄숙한 집회들에서 향기를 맡지 아니하리라. 비록 너희가… 헌물을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들을 받지 아니하며 너희의 화평 헌물도 내가 중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오히려 너희가 너희의 몰록의 장막과 너희의 형상들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너희 신의 별을가지고 다녔나니. (아모스5:1, 21-22, 26)
이러한 절기들은
야후와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집회들” 이었다! 이스라엘이 준수한 방식은 사람이
만든 규칙들과 전통들에 의해 너무도 부패되어 심지어
이교도의 관행들을 수용했으며 야후와의 거룩한 절기들의
영적 본질을 손상시켰다! 신성의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고자
하는 바리새인의 시도에서 그들은 규칙들과 요구사항들을
많이 추가했고 그것들을 실행함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일몰부터
일몰까지의 안식일
준수는 성경적이지 않다. 그렇게 지정된 것은 오직 속죄일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 안식일의
경계를 보호” 하기 위한
지나친 열심을 가진 시도로써, 속죄일을 준수하는 방식이 주간
안식일까지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추가적인 행위들을 비난하셨던 야후슈아의 말씀이
오늘날에도 적용된다: ”또 무겁고 지기에 힘든 짐들을 묶어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로도 그 짐들을 옮기려 하지 아니하도다.” (마태복음 23:4)
자신들이 채택한 그
관습들이 사람이 만든 규칙들과 전통들에 기초한 것임을
이러한 진심 어린 사람들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생각한다: ”우리는 나쁜
것들을 거절하고 히브리 뿌리로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러나 그 뿌리들은 바벨론 범주
내에 있을 뿐이다!

품성의 개발은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당신이 말할 때 추가하는 히브리
단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당신의 이름을 히브리어로
바꾼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품성의 개발은 소중한 약속들을
믿음으로 붙잡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심지어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도,유대인 신자들 사이에 바리새인들로
알려진 보수 계층의 관행들, 전통들과 신념들을 높이 평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전통들에 빠진 자들에게
바울은 편지 하기를:

제멋대로 행하며 헛된 말을 하고 속이는 자들이 많은데 특별히 할례자들에 속한 자들이 그러하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하느니라. 이런 자들은 더러운 이익을 얻으려고 자기들이 마땅히 가르쳐서는 안 될 것들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뒤엎는도다.
. . . 그러므로 그들을 엄히 꾸짖으라. 이것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건전한 자가 되어 유대인들의 꾸며낸 이야기와 진리에서 돌아서는 사람들의 명령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함이라.
그들이 야후와를 안다고 고백하나 행위로는 그분을 부인하니 그들은 가증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이요, 모든 선한 일에 대해 버림 받은 자들이니라. (디도서1:10-11, 13-16)
이것은 유대인들을
신성의 지혜의 보관소라고 여기는 자들에 대한 경고다.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 유대인을
최종적 권위로 여김으로써 신자들은 유대인들이 거절해온
동일한 진리를 거절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참
안식일이다. 애굽에서 유월절 때,야후와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본래의
달력이 있었다. 그러나 니케아 회의 후에 힐렐II가
로마의 심한 핍박 아래서 그 본래의 달력을 ”개혁” 했을
때 유대인들은
성경적인 안식일을 버린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그레고리력의 일곱째
날을 지킨다. 마치 토요일이 야후와의 참 안식일인
것처럼, 진심
어린 수백만의 크리스챤들이 토요일이 성경상의
안식일이라고 가정한다. 유대인들이 그 날을 지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참 안식일이
아닌 다른 날에 결코 예배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단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인들이 빛을 가졌다고 사람들이 수용하기 때문에
진리가 왜곡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고대의 유대인들도, 메시야 시대의 유대인들도, 그리고 오늘날의 유대인들도
야후와께서 의도하셨던 방식의, 신성의 율법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다:
야후와께서 모든 대언자들과 모든 선견자들을 통해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증언하사 이르시기를, ”너희는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돌이키고 내 명령과 내 법규를 지키되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명령한 모든 율법 곧 내 종 대언자들을 통해 너희에게 보낸 모든 율법대로 지키라.” 하셨으나 그들이 들으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목을 굳게 하되 야후와 그들의 엘로힘을 믿지 아니하던 자기 조상들의 목과 같이 하여 그분의 법규와그분께서 자기 조상들과 맺으신 그분의 언약과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증언하신 그분의 증언을 거부하고… 또 그들이 야후와 그들의 엘로힘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해 부어 만든 형상들 곧 송아지 두 마리를 만들며 또 작은 숲을 만들고 하늘의 온 군대에게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 . . . (열왕기하17: 13-16)
사람이 만든 전통들은
영혼을 정결케 하지 못한다.그들은 동일한 신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에게 우월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그런
봉사를 하는 것뿐이다.
”야후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회심시키고 야후와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시편 19:7)
사람이 만든 규칙들과 이 땅의
전통들은 신성의 율법을 복잡하게 만들고, 혼돈을 야기하며 거짓 자기–확신을
준다. 창조주의
명령들은 단순하며 명쾌하다. 야후슈아께서 바리새인들의 모든
전통들을 쓸어 버리셨고 신성의 율법의 명확하고 이기심
없는 본질을 이해될 수 있게 하셨다:
그때에 그들 중의 한 율법사가 그분을 시험하려고 그분께 질문하여 이르되 ”선생님이여, 율법에서 큰 명령은 무엇이니이까?”하매, 야후슈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야후와 네 엘로아를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 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2:35-40)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야후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엘로아와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바울은 새 신자들이 진리의 단순함을
버리고 전통들로 향하는 것을 염려했다: “뱀이 자기의 간교함으로 이브를 속인 것 같이 어떤 방법으로든 너희 마음이 야후슈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떠나 부패될까 내가 두려워하노라.” (고린도후서 11:3)
유대교에서 발견되는 성경적이지 않은 전통들로 향하는 자들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들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순종이라는 조건 하에서 주어졌다는 것을 잊고 있다.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했을 때 그들은 야후와를 거절한 것이다: ”야후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말하는 모든 것에서 그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라. 그들이 내가 자신들을 통치하지 못하게 한 것이라.’” (사무엘상 8:7) 그들이 야후와를 거절했지만
야후와께서 그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셨다는 사실이‘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와
같이 – 많이
반복되는 문구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신성의 사랑은,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는
계속 머무르지 않는다. 비록 그 사랑이 오래 연결되어
있을 지라도, 결국은 슬프게도, 고집 센 마음의 소원에 따라 사라질
수 밖에 없다. 야후슈아께서 죽기 며칠 전, 찢어지는 마음으로 슬퍼하셨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버림 받아 너희에게 황폐하게 되었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말하기를, 찬송하리로다. 야후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이제부터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3:37-39)
바울은 ”유대인처럼
되려는 사람들” 과 이
기만에 완벽하게 속고 있는 진심 어린 크리스챤들에게
경고했다! 어쨌든 유대인처럼 되는 것에
이점이 있다고 생각하는 신념에 빠져서, 이스라엘에 돈을 보내고, 야후슈아께서 유대인이 개종하기
전까지는 재림하시지 않을 것이며, 신실한 크리스챤들은 재림
때에 갑자기 위로 데려감을 당하게 된다는 가정 위에
세운 종말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야후슈아께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셨다: “보라, 나는 도적같이 온다.”
(요한계시록 16:15) 그분께서 재림할 때, 많은 크리스챤들은, 아직 유대인 개종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에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나의
주인이 늦게 오시는구나.” 라고
말한 악한 종처럼 확실히 그렇게 재림을 지연시킨다.
고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적용되었던 약속들이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된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야후슈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야후와의 자녀들이 되었나니 너희 중에서 야후슈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자는 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 없고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으며 남자나 여자가 없나니 너희는 다 그리스도 야후슈아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야후슈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씨요 약속에 따른 상속자니라. (갈라디아서 3:26-29)

구원은 각각의 유대인에게
여전히 유효하지만,영적인 축복들은 지금 그것들을
받아들일 모든 자들을 위한 것이며 이것은 “이방인들의
때가 찰 때까지” (누가복음21:24) 즉, 이 땅의 역사의 끝까지 유효하다.
구원은 신성의 은혜의
놀라운 선물이다. 그들의 구속자를 사랑하는 자는
성경적이지 않은 교훈이나 교리에 막히지 않고 거룩함의
아름다움 안에서 그분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야후와께서 바리새인의 무거운
짐 아래서 고통 받는 자들을 그분께 돌아 오라고
초청하신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평안을 주실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영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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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www.cufi.org/site/PageServer?pagename=about_pastor_john_hagee
2 ”바리새인들.” 유대 백과, IX권,
(1901-1906년 판),
666쪽
3 루이스 핑클스타인, 바리새인들: 그들의 신앙에 대한 사회학적
배경, 제1권, Forward to first edition, p. XXI, emphasis
supplied.
그 해는 1979년이었다. 스리랑카
주재 버마 대사는 자신의 아내가 바람을 피고 있다고 확신했다.
자신의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하고, 그녀가
집에 늦게 들어온 어느 저녁에 그녀를 총으로 쏘았다.
화장용 장작더미가 그 집 뒷마당에 쌓여져 있다며 이웃들이 경찰에 신고했다. 스리랑카
경찰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 대사가 자신의 아내를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대사는 그들로 그 뒷마당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때 뉴질랜드의
고위 위원이었던 제럴드 헨슬레이에 따르면:
“그것은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
대사는 그곳이 버마의 영역이기에 그들이 들어올 수 없다고 말했다.”1
그 범죄 행위의
중함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 정부는 그 대사를 고소할 수 없었다. 즉시는
아니지만, 그는 결국 그의 나라로 소환되었다.2
살인자가 처벌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걸어 나갔다 . . . 왜냐하면 그가 외교관 면책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외교관 면책
특권의 남용은 그 공정성에 대한 많은 의문을 일으켰다.
외교관 신분으로 인해 법을 무시할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의롭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다.
이와 같이…
수 많은 크리스챤들이, 사실상, 외교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받지 않고 걸어 나간 살인자처럼,
타당하지도 않고 의롭지도 않은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소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는
교리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당신이 구원받았다면, 당신은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교리는, 일반적으로
“영원한
보장” 이라고
언급되는 것으로, 귀에는 좋게 들리지만, 주의
깊이 연구하면 이 신념이 매우 비성경적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영원한 보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신념의 기초를 몇 가지 구절에 둔다.
그 구절들은 신자가 구주 안에서 갖는 보장에 관해 말한다:
내 양들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모든 것보다 크시매 아무도 내 아버지 손에서 능히
그들을 빼앗지 못하느니라. (요한복음 10:27-29)
(베드로전서 1:5, 요한복음 6:39, 유다서 24절도
참조)
이 구절에서, 신자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는 “양”
으로 언급된다. 이
구절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적 해로움도 야후와께 복종하고, 신성의
뜻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에게
이르러올 수 없다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양은
종종 정도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헤맨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이사야
53:6) 만일 사람이 야후와께 뜻을 내어드리지 않고, 알면서도
죄를 짓기 시작한다면, 비록 그가 이전에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 그는 잃어버린바 될 것이다.
야후와께서는
인간의 의지를 결코 강요하지 않으신다. 이런 이유로 성경에는, 한
때 구원을 받아들였던 사람이 길을 잃고 헤매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관한 경고들이 많다. 잃은
양의 비유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와 구주의 연민의 사랑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때조차도, 결코 돌아오도록 강요되지는 않는다. 온전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만일 사람이 죄를 계속 고집한다면, 결국
자비의 물결이 물리쳐져서, 결코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사용하여, 야후슈아께서 그분 안에 계속 거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운명에 관해 설명하셨다: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그는 가지처럼 버려져서 시드나니 사람들이 그것들을 모아 불 속에 던져 태우느니라.” (요한복음
15:6)
가지는 포도나무에 결코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잡초가 아니다. 가지는
붙어있을 때에만 자랄 수 있고 존속할 수 있다.
구주의 비유에서 가지는, 한
때는 그분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자랄
수 있는 영적 영양분을
공급받던 사람들에 관해 말한다. 신성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여, 그들은
그들의 생명의 원천으로부터 떠났다. 그들은 열매 맺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고 결국 끊겼다.
“영원한 보장” 을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은 그 정반대를 가르친다: 사람은 구원을 받아들이고도, 훗날에, 자신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여, 야후와를 대적하는 삶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경주에 대하여 묘사하면서, 사도 바울은 선수들이 상을 얻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주의 깊이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강조한다. 그는 자신도 여전히 버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의 설명을 마친다:
경주할 때에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한 사람이 상을 받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리라. 이기려고 애쓰는
자마다 모든 일에서 절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그 일을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을 얻고자 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와 같이 달리되 정해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지 아니하고 또 이와
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자같이 하지 아니하며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24-27)
바울은, 비록
그가 그의 구속주와 함께 구원하는 관계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의 개인적 선택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여전히, 그의
선택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다. 십자가에서의
구주의 죽음은 과거의 죄들에 대한 “외교관의
면책 특권” 을 제공한다. 그것은
알면서도 범하는, 현재의 죄에 대하여 그 책임을 없애지 못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이들을 구원으로 이끈 후에도, 그의 개인적 선택이 여전히 그를 “실격시키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킹제임스 버전에서 “버림받다” 라고
번역된 단어는 Adokimos(#96)
으로부터 왔다. 이것은
의미한다: 승인되지
못한, 즉, 거절
당한, 가치
없는 것을 의미하며 . . . 버림당하다, 거절당하다, 타락하다 (reprobate).”
“타락하다 (reprobate)” 라는 단어는 흥미로운 단어 선택이다. 이것은
요즘 많이 사용되지는 않지만, 그 의미는 풍부하다. 이
단어가 명사로 사용될 때, 그것은 “죄에
빠져, 선행과
종교를 버린 자” 를 말한다.”3 성경에는 이 단어를 사용한 구절들이 많다. 그러한
구절들은 타락하게 되거나 타락한 마음을 갖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명확한 문맥상의 예들을 제공한다. (디도서 1:10-16, 디모데후서 3:8, 고린도전서 13:5-7, 등 참조)
그 단어의
가장 명확한 사용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을
가장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구절이 로마서
1:18-32 에서 발견된다. 여기에서
바울은 특별히, 그 타락한 자들이 야후와를 “알았었으나” (21절) 고집스럽게
죄를 고수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창조주에 관한 지식이 없는 이방인들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창조주를 알면서도, 그분을
기억하길 원치 않았다고 28절은
말한다: “또한
그들이 자기 지식 속에 엘로아 두기를 싫어하매 엘로아께서도 그들을 타락한 생각에 내주사 합당하지 못한 그 일들을 행하게 하셨으니.”
야후와께서
“그들을 타락한 생각에 내주셨다.” 는
것에 주목하라. 여기에서 야후와에 의해 제공되는 구원의 진리가 제시된다. 그분께서는
“오직
우리를 향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베드로후서 3:9) 그러나, 모든
사람이 회개에 이르러 구원받기를 그분께서 갈망하시는 만큼,
그분께서는 결코 개인의 선택의 권리를 없애지 않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그분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원치 않는 자는 그들 자신의 바람에 따라 떠나 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그와 같이
사도 베드로도 같은 내용을 가르친다:
만일 그들이
구주 야후슈아를 아는 것을 통해 세상의 오염에서 벗어난 뒤에 다시 그 안에 말려들어 정복되면 마지막 끝이 처음보다 그들에게 더 나쁘니
그들이 의의
길을 안 뒤에 자기들에게 전달된 거룩한 명령에서 돌아서는 것보다 차라리 그것을 알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더 나았으리라.
그러나, 개는
자기가 토한 것으로 되돌아가고 씻긴 돼지는 진창 속에서 뒹군다,
하는 참된 잠언에 따라 그 일이 그들에게 일어났도다. (베드로후서
2:20-22)
성경의 원칙은
이러하다,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말이 확증되리라.” (고린도후서
13:1) 이방인들에게 사도였던 바울도, 유대인들에게
사도였던 베드로도,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인 후에라도, 그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그가 여전히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영원한 보장” 이라는
오류에 묶여 있는 위험은, 외교관의 면책 특권과 같은 것으로서, 고집스런
마음이 순종하기 원치 않는, 죄를 합리화하거나 변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 구원은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지만, 그것이 매일 야후와께 순종하기로 선택할 개인의 의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은
인기 있는 오류다.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의 모든 행동과 결정들의 결과로부터, 신성의
율법이 얼마나 심각하게, 얼마나 자주 범하여졌는지와 관계없이, 면제시켜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신성의 “외교관
면책 특권” 으로,
그들은 지금 구원받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괜찮다고 가정한다.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추정이다. 성령의 역사는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6:8) 성령은 사람의 마음에 특정 죄를 버릴 것을 촉구할 수 있으나, 만일
그 사람이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고
믿는다면, 그러한 감화들이 “의심” 으로서
간주되어 무시된다. 이것은 극히 위험하다. 왜냐하면
성령을 거절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이끄심을 일관되게, 또한
계속적으로 거절할 때, 더 이상 하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구주를 따르지
않고 거절하는 모든 자의 운명에 관하여 성경은 단호하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선물을 맛보고 성령의 참여한 자가 되고 야후와의 선한 말씀과 오는 세상의 권능을 맛본 자들이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야후와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 (히브리서 6:4-6)
어떤 이들은, 만일
사람이 타락한다면, 그는 결코 구원받았던 것이 아니었다 라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주어진 성경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들이 “한 때 빛을 받았던 자들이었다” 라고
명확하게 말한다. 만일 사람이 신성의 은혜로부터 등을 돌리면, 신성의
사랑은 그의 뜻에 반하여 그를 머물도록 결코 강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받은 뒤에 고의로 죄를 지으면 다시는 죄들로 인한 희생물이
남아 있지 아니하고.” (히브리서 10:26)
아마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는
교리의 가장 나쁜 점은, 그것이 야후와의 품성에 관하여 그릇되게 가르치는 것에 있을 것이다. “야후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야후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죗된 본성의 유전은,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로부터, 그들 스스로 그들이 야후와와 사탄 중에 누구를 섬길 것인지 선택할 능력을 빼앗았다. 야후슈아의
희생은 모두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보증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아담의 선택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 대신, 그들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회복시킨 것이다.
야후와께서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시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신 분으로서,
각 개인이 구주와 구원의 관계 안에서 선택할 권리를 결코 없애지 않으신다. 죄는
의지를 노예화하지만, 구속은 야후와와 조화시키기 위해 그것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그 때에 누구도 자유 의지 없는 마음으로 노예화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여전히 선택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야후와께서는 결코 그분의 피조물들에게
그분의 뜻을 강제하며 그 선택의 능력을 빼앗아가지 않으실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야후와께 신실하게 머무를 동안만 안전하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야후슈아의 손으로부터 떠나기로 선택한다면,
그러한 보증은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로마서 6:23) 한 때, 구원을
받아들였던 자들에게도 그러하다.
모든 오류는
모든 생명과 사랑의 원천으로부터 분리된다.
야후와께서 선택의 자유를 보증하기 위해 그분 자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셨다는 사실과
그분께서 계속하여 모든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유지하도록 허락하신다는 사실은, 사람의
생각으로 온전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심오하고,
멀리까지 영향을 끼치는 그러한 사랑을 보여준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이라는
오류를 내려놓으라. 당신을 모든 상해로부터 안전하게 지키실 수 있는 분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분께서
결코 당신의 개성, 당신의 자아, 당신의
선택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으실 것이다. 당신의 뜻을 그분께 내어드리기로 선택할 때, 그분께서
당신을 지키실 것이다.

당신은 이길 패를 쥐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어렸을 때부터 도박은 나쁜 것임을 배운다. 부모들과 주일 학교 선생님들은 하늘이 인류에게 소중한 선물들을 베풀었다는 것과 그것들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성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러한 선물들을 가지고 도박을 하며 낭비하거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하나의 죄다. 그런데,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
자체가 일종의 복권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예정론 교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가 존 칼빈에 의해 16 세기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운이 걸린 신성의 게임, 일종의 주사위 게임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 받는 자들 중 하나로
찍으신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너무 나쁜 것이고, 매우 슬픈 것이 된다. 당신은 버림 받았다. 당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념 안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독실하지만, 이 교리는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 글은 예정론 교리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 대해 논할 것이며 어떻게 이 신념들이 계시된 야후와의 말씀과 상충되며, 또한 성경에
계시된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는지 설명할 것이다.
예정론은 다섯
가지 특성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섯 가지 신념은:
-
총체적 타락/무능 – 사람은 희망 없는 악이며;
진정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
무조건적 선택 – 우리는 전적으로 완전히 악하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은 전적으로 야후와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정하신 것에 달려 있다.
-
제한 속죄 – 야후슈아께서는 야후와께서 미리 구원하기로
정한 사람들만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은 버림 당할 자들 (또한 야후와에 의해 버림 당하도록 미리 정함 받은 자들) 을 위한 것이 아니다.
-
불가항력적 은혜 – 야후와께서 구원하기로 미리 정한 사람들은
버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신성의 은혜를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
견인 – “영원한 보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언뜻 보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내용들 중 일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과 자세하게 비교하면, 이 내용들이 논리적이며 또한 성경에서 발견되는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제 야후와의
명백한 말씀과 비교하며 이 다섯 가지 내용들 각각에 대하여 살펴보자.

총체적 타락/무능
사람은 희망 없는 악이며 진정한 “선” 을 행할 능력이 없다.
모든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야후와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10 과 23.) 죄가 인류를 낮추었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이사야가 선포한다: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이사야 64:6)
그러나, 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나타난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전적으로 악하다면, 우리는 악으로부터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부름에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야후와
엘로아가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돌이키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에스겔 33:11)
게다가, 만일 사람이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책임 지워질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우리는 전적으로 완전히 악하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은 야후와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정하신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 주장은
성경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인류가 논쟁의 여지 없이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누군가의 구원이 전적으로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은 자유 의지의 행사를 원천적으로 막는다. 예정론은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다고 가르친다. 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은 “이중 예정론”을 가르친다. 그것은 야후와께서 또한 버림
당할 자들도 미리 정하셨다는 신념이다.
그러한 신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개인의 책임을 없앤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에 대한 책임이 가인이 버림 당할 것으로 “미리 정해졌으며”
따라서 그는 그의 형제를 죽이도록 “미리 운명 지어졌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라진다. 이것은 사람의 잘못된 행동들의 결과들로부터 그 사람을 면제시켜
준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잘못된 행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들에
대하여 개인의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정확히 가인이
시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이다.
성경은 그
살인 사건 후 야후와와 가인 사이의 대화에 대하여 기록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야후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매 (창세기 4:8-9)
이 신념의
오류가 야후와께서 가인의 변명을 거절하실 때 바로 나타난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동생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땅이 자기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동생의 피를 받았은즉 이제 네가 땅에게 저주를 받았나니,
네가 땅을
갈아도 이후로는 땅이 자기 효력을 네게 내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땅에서 도망하는 자가 되고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 하시매 (창세기 4:10-12)
무조건적 선택과
같은 두번째 문제는 야후와께서 죄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그러하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야후와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그분께서 버림 당할 자를 선택하실 때 그분은 또한 죄도 미리 정하신 것이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성경과 명확하게 모순된다: “아무도 자기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야후와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야후와께서는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1:13)
제한 속죄
야후슈아께서는 야후와께서 미리 구원하기로 정한 사람들만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잃어 버린 자들을 위해서 죽지 않으셨다.
예정론과 일치하는
그런 선택적 구속은 성경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야후슈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이사야의 숭고한 예언에서, 그는 기록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야후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자기 영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리니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리라.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 (이사야
53:6, 11-12)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널리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인 다음 구절은, 야후슈아께서 미리 선택된, 운 좋은 소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이것을 더 강조한다.
야후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야후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불가항력적 은혜
야후와께서 구원하기로 미리 정한 사람들은 버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신성의 은혜를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신념은
구원의 계획이 놓여 있는 근간 자체를 거절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신념은 아무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은 죗된 본성을 물려 받았다. 야후와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야후와께서 그분의 아들을 희생하셨기에 모든 사람은 그들 스스로 두번째 기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선택권이 어떤 이는 구원 받기로 택하고 다른 이는 버림 당하도록 거절하는 어떠한 신성의 결정에 의해 제거된다면,
야후슈아의 죽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이 신념은
어떤 사람이 아무리 고집스럽게 반역하고 죄를 사랑하며 죄를 고집할지라도,
야후와께서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면 결코 버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야후와를 닮고자 갈망한다고 해도, 그가 버림 받기로 미리 선택되었다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신념이다. 이 파괴적 신념은 결정권이 오직 각 개인에게 있다는 성경의 명백한 언급들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한다. “주의 날이 판결 골짜기 안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무리, 많은 무리가 판결 골짜기에 있도다.” (요엘 3:14)
견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와 함께, 일단 구원 받았다면, 그가 어떠한 일을
행해도 버림 받을 수 없다는 신념은 사람의 의지를 노예화한다. 어떤 사람도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선택의 자유는
그가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버림 당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 심지어 그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후라도 그러하였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27)
예정론 교리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다른 원칙들과 모순된다. 성경에 기록된 구주의 말씀들 가운데, 마지막 명령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 . . .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마태복음 28:19-20)
만일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사람을 이미 정하셨다면, 그들은 어찌하든
구원 받을 것이므로 복음 전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만일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이미 정하셨다면
가족이나 친구들도 야후와의 미리-선택하심에 의해 구원 받거나 버림 당하며 누구도 이 문제에 있어 창조주의
생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적절히 설명된 중보 기도라는 성경의 원칙을 부인한다. 이스라엘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고자 고집했을 때,
그들은 결국 그들의 주권자로서의 야후와를 거절했다. 그 때에, 찢어지는 마음으로, 사무엘이 했던 말이 오늘날까지 울려 퍼진다:
또한 나로
말하건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쉼으로 내가 결단코 야후와께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하고 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터인즉
야후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얼마나 큰일들을 행하셨는지 깊이 생각하여 오직 그분을 두려워하며 너희 마음을 다해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기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하게 행하면 너희 곧 너희와 너희 왕이 다 소멸되리라.
(사무엘상 12:23-25)
여기에 미리
정해진 것은 전혀 없다. 사무엘은 그들이 만일 계속적으로 그들의 창조주를 반역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모세가 죽기 바로 전,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후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여 의를 선택하라고 애원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야후와 너희 엘로아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또 그분을 굳게 붙들 수 있으리라.
그분은 너희 생명이시요, 또 너희 날들을 길게 하는 분이시니. (신명기 30:19-20)
모세는, 전능하신 분의 친구로서, 야후와께서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던 겸손한 종이었다. (출애굽기 33:11) 그것은 각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음으로 예정론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기각된다.
가장 나쁜
것은, 예정론이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나타낸다는 점이다.
예정론은 선택 받지 못한 자들에게 불공정하다. 그들 자신의 잘못 없이도 “버림 받기”로 미리 정해졌다는 것은 부당하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죄로 부패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예레미야 17:9) 구원은 야후와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야후와의 선물이니라.” (에베소서 2:8) 그런데 사람의 선택이 제거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오류이다.
성경은 “야후와는 사랑이시라” 고 선포한다 (요한일서 4:8) 사랑의 엘로아는 그분의
소중한 자녀들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마치 어떤 신성의 베팅 판이 돌아가며 구원 받을
자를 택하고 영원히 버림 받을 자는 훨씬 더 많이 택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은 없다.
창조주께서
그런 행동을 하신다는 것은 가당찮다. 성경은 창조주의 품성을 밝혀준다:
야후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자랑하는
자는 이것 즉 자기가 깨달아 나를 아는 것과 또 내가 땅에서 인자함과 판단의 공의와 의를 집행하는 야후와라는 것을 자랑할지니라. 나는 이 일들을 기뻐하노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예레미야 9:23-24)
예정론 교리는
매우 파괴적인 신념이다. 예정론은 사랑의 창조주를 잔혹하고 무정하고 제멋대로인
분으로 제시한다. 예정론은 성경과 모순된다. 성경은 야후와를 아무도
멸망치 않기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러한 냉정하고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품성이 야후와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서고, 야후와와 사람의 원수인 사탄에 의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오히려 그분을 탓하게
된다.
구속주의 품성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이 그 영혼과 창조주 사이에 들어온다. 야후와께서는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신념을 버리고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베푸신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은 당신을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그분께 이끌 신성의 품성 안에 있는 심오한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창조 법칙을 떠나 임의적으로 누구는 구원하고 나머지 모두는 영원히 버림 받게 선택하시지 않는다!
반대로, 창조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고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이다.
“옛적에 야후와께서 내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참으로 내가 영존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하셨도다.”
(예레미야 31:3)
충격적인
성경적 진리
WLC는
세상에 진리를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수했거나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이 발견될 때,
우리의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그것을 바로 잡고자 힘껏 노력합니다.
과거에 WLC는
성경에 기록된 영원히 타는 불에 대해 충분히 강조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강조하기
원합니다 .
. .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진리들은 광대하고,
심오하며 조화롭다.
그런데 때때로,
어떤 문장들은 다른 문장들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왜냐하면 올바르지 않은 이해나
충분하지 않은 지식 때문에 그렇다.
만연한 혼돈 중의 하나가 악한
자가 받는 보응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며.”
(전도서 9:5,
6) 그러나,
성경은 또한 영원히 타는 불이
결코 꺼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관점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진리는 아름답고 믿음을
견고하게 해준다.
이사야서에는 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열쇠가 있다.
거기에는 질문이 나온다:
”시온의
죄인들이 무서워하며 두려움이 위선자들을 놀라게
하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누가 그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
우리 가운데 누가 영영히
불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
하는도다.”
(이사야 33:14,
킹제임스버전)
상식적으로,
불 속에서 누가 살 수 있느냐는
것은 수사적 질문이 아닌가?
그러나,
바로 그 다음 구절에 그 답이
나온다:
의롭게 걷는 자,
올바르게 말하는 자,
학대하여 얻은 이득을 멸시하는
자,
손을 저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바위로 된 요새가 그를 보호하는 처소가 되며 그는 빵
공급을 받고 물을 확보하리라.
네 눈은 아름다움
가운데 있는 왕을 보며 그들은 매우 멀리 있는 땅을
바라보고 (이사야
33:15-17)
|
영원한 화염 속에서
살며 기뻐할 자들은 의인들이다.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이 야후와와
함께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야후와는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29)
|
영원한 화염 속에서
살며 기뻐할 자들은 의인들이다.
오직 거룩한 사람들만이 야후와와
함께 살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야후와는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2:29)
야후와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시다.
“이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기 때문이라.”
(행 17:28)
순결한 에너지가 그분으로부터,
중단되지 않는 물결로,
흘러 나온다.
성경에,
빛과 생명과 에너지의 이 거룩한
근원의 나타남이 ”불”로 묘사된다.
루시퍼는 타락하기
전에 덮는 그룹이었다.
창조주로부터 흘러 나오는 빛과
에너지의 끊임없는 광선들이 해가 없는 날의,
계속되는 빛으로 그를 둘렀다.
덮는 그룹으로서,
루시퍼는 전능하신 분의 즉각적인
임재라는 영원한 불 속에 거했었다.
그는 그 화염 속에서 상함을 입지
않고 왕래할 수 있었다.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야후와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리며 다녔도다.
네가 창조된 날부터
네가 네 길들에서 완전하였는데 마침내 네 안에서
불법이 발견되었도다.
(에스겔 28:
14, 15)
계시를 통해,
선지자 다니엘은 하늘의 보좌를
조금 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그
곳에서 야후와로부터 흘러 나오는 영광의
불이 강처럼 보였다:
그 왕좌들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내가 보매 옛적부터 계신 이가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꽃 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 같더라.
불 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흘러나오고 천천이 그분을 섬기며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더라.
심판이 준비되고 책들이 펴져
있더라.
(다니엘 7:
9, 10)
이와 같이,
야후슈아께서 변화된 모습으로
사람에게 나타났을 때,
그분은 종종 불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모세는 자기 장인
곧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지키더라.
그가 그 떼를 사막의 뒤편으로
인도하여 야후와의 산 곧
호렙에 이르매 야후와의
천사가 떨기나무의 한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속에서
그에게 나타나니라.
그가 보니,
보라,
그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소멸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출애굽기
3:1, 2)
그 후에,
야후와께서 그분의 율법을 선포하시기
위해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
그 산 전체가 불 속에 있던 것처럼,
바라 보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분께서는 찬란한 불꽃 가운데 계신
것처럼 보였다:
“시내 산이 온통
연기로 자욱하니,
이는 야후와께서 불 가운데서 그
위로 내려오셨기 때문이더라.
그곳의 연기가 화로의 연기같이
위로 올라가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더라.”
(출애굽기 19:18)
야후와 그분 자체가
소멸시키는 불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는,
영원히 불타는 것에 더 가까이
나가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신성의 임재 가운데
40일을
보낸 모세의 얼굴은 그가
보았던 놀라운 영광을 반사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는데,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
. . 모세는 자기가
그분과 말하는 동안에 자기 얼굴이 빛나던 것을 알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모세를 보니,
보라,
그의 얼굴이 빛나므로 그들이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였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말할
때 . . . 그가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그러나 모세가 야후와
앞에 들어가 그분과 말할 때에는 밖으로 나올 때까지
베일을 벗었다가 나와서는 그분께서 명령하신 것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렀으며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모세의 얼굴의 피부가
빛나는 것을 보았으므로 모세가 그분과 말씀을 나누러
들어갈 때까지 다시 베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애굽기
34:29-31,
33-35)
야후와의 임재가 바로
영원한 불이다.
그 불 안에서는 오직 의롭고 거룩한
것만 살아남을 수 있다.
야후와의 임재 안에서는 죄가
존재하는 곳마다,
거룩한 야후와의,
영원히 타는 불이 그것을 태워
버린다.
성화되지 않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거룩함이라는 영원한 불의 임재를 두려워한다.
야후와께서 시내산에서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온 백성이 천둥과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나는 산을 보았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볼 때에 이동하여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야후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 20:18,
19)
야후와의 불이 태우는
오직 한 가지는 죄,
그리고 그 죄를 계속 고집하는
죄인들이다.
이것이 나답과 아비후의 경험에서
묘사되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각 자기의 향로를 가져다가 그 안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놓되 야후와께서 그들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지 아니한 이상한 불을 그분 앞에
드렸더니 불이 야후와께로부터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야후와 앞에서 죽으니라.”
(레위기 10:
1, 2)
나답과 아비후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존귀를 받았다.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그 가문과
함께,
제사장들로서 야후와를 직접 섬기기
위해 선택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받은 존귀에
합당한 존경,
사랑,
경외심으로 자신들을 가꾸지
않았다.
야후와의 거룩한 율법을 극악하게
범한 것 때문에,
이 제사장들이 야후와께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 죽었다.
그러나 성경에는,
영원히 불 타는 그 불에 관한 중요한
것을 밝혀주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모세가 아론의
삼촌인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가까이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나르라,
하니 이에 그들이 가까이 나아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힌 채로 진영 밖으로
나르매” (레위기
10:4, 5)
얼마나 흥미로운가!
야후와께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 두 남자가 ”삼킨 바” 되었는데
그들의 옷은 손상되지 않았다!
만약 죽을 만큼 충분히 오랜 동안
화염 속에 던져져 있었다면,
어떻게 그들이 입고 있던 옷들이
멀쩡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옷들은,
수분이 많이 포함된 그들의 몸보다
더 빨리 타 버렸어야 했을 것이다!
종종 간과되어 온 이
세부 내용이 야후와의 임재라는 영원히 타는 불에 대한
흥미로운 통찰력을 제공한다.
야후와의 불은 화학적
연소의
불이 아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느부가넷살 왕이 세운
우상에 절하고 경배하기를 거절한 것에 대해 화형에
의한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그들은 옷을 입은 채로 용광로
속에 던져졌다:
“이에 이 사람들이
결박 당하여 .
. .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로
던져졌더라 .
. . 이 세 사람 곧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결박 당한
채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로 떨어졌더라.”
(다니엘 3:
21, 23)
불에 탄 것이 있었다:
그들을 결박했던 줄들은 타 버렸다.
그러나 그들은 상함을 입지 않았다.
그들의 옷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
이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한가운데서 나오매
통치자들과 총독들과 대장들과 왕의
조언자들이 함께 모여 이 사람들을 보니 불이 그들의
몸에 힘을 쓰지 못하였고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겉옷도 변하게 하지 못하였고 불
냄새도 그들에게서 나지 않는다.
(다니엘 3:
26, 27)
이 용감한 하늘의
영웅들이 어떻게 구원 받았는지에 대한 비밀은
간단하다:
그들은 야후와의 아들의 임재 안에
서 있었던 것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은 맹렬히
불타는 용광로 한가운데로 묶인 채 떨어졌다.
그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나 자기의 조언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세 사람을
결박하여 불 한가운데로 던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오 왕이여,
옳소이다.”
하매
그가 응답하여 이르되,
“보라!
내가 보니 결박이 풀린 네 사람이
불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 해도 입지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형체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도다,
하더라.”
(다니엘 3:23-25)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
신성의 율법에 맞추어 사는 모든
자는, 그분의
전능한 임재의 소멸시키는 불 속에서 설 수 있고,
영화롭게 될 수 있다.
훌륭한 이 세 명의 히브리인들이
야후와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하고 거룩한 그 불
속에서도 생존할 수 있었고 이 세상의 어떤 불도 그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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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의 임재라는
영원히 타는 불은 모든 죄와 이기심을 태워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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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의 임재라는
영원한 불은 모든 죄와 이기심을 태워 버린다.
죄는 1)
거짓말과 종종 2)
강압 (사탄의
특성)으로
구성된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다.
그러나 소멸시키는 불 안에 거하시는
분으로부터 나오는 영원한 진리는 거짓을 파멸한다.
강압은 신성의 사랑에 의해 정복된다.
거룩한 영은 진리이며 사랑이다.
오순절에,
성령이 모여 있던 신자들 위에
임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사도행전 2:
3, 4) 이 초기 신자들은 신성의 불에
의해 타지 않았다.
그 때 이후로,
그들은 사랑으로 연합했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 세계에 전했다.
영원히 불타는 지옥이라는
교리는 창조 시에 아담과 이브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잘못된 전제에 기초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범하고 형벌을 받아야
했을 때,
야후와께서 그들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지닌 채 지옥불에서 고통 받을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는 논리가 된다.
이 신념은 성경을 기초로 한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6:
16은 명백하게 말한다:
“오직 야후와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야후와는 사랑이시라.”
(요일 4:8)
그분께서는 또한 공의를 즐거워하신다.
그러므로 야후와께서
말씀하신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자랑하는 자는
이것 즉 자기가 깨달아 나를 아는 것과 또 내가 땅에서
인자함과 판단의 공의와 의를 집행하는 야후와라는
것을 자랑할지니라.
나는 이 일들을 기뻐하느니라.”
(예레미야 9:23,
24)
사랑과 공의의 엘로아로써,
야후와께서는,
여전히 유예 기간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를 원하지 않으셨다.
그 유예 기간 동안에,
그들은 야후와를 섬길지 또는 그의
반역으로 사탄을 섬길지 선택할 수 있었다.
야후와께서는 가장 악한 죄인조차도
영원히 고통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사랑도 공의도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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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은 선물이다.
그것은 야후슈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통해 승리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형벌은 영원한 고통의 삶이 아니라,
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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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생명은 선물이다.
그것은 오직 야후슈아의 공로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 승리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야후와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야후슈아를 통한 영원한 생명이라.”
(로마서 6:23)
죄를 고집하기를
선택하는 자들의 형벌은,
고통 속에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형벌은
사망이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야후와의
신성의 율법에 복종하기를 선택한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성경은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밝혀준다:
그러므로 야후와께
복종하라.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에게서 도망하리라.
야후와께 가까이 나아가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에게 가까이
오시리라.
너희 죄인들아,
너희 손을 정결하게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너희 마음을 순결하게 하라.
야후와의
눈앞에서 스스로 겸손하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야고보서 4:7-8,
10)
성화의 과정을 통해
영원한 불로 그들의 죄와 찌꺼기를 태워
버리도록 하는 모든 자들은 야후와의
생명을 닮은 생명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약속이다!
“그 도시는 해와
달이 그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야후와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21:23)
구속 받은 자들은 야후와의 임재를
즐거워하며,
영원한 날의,
햇빛이 필요 없는 빛 가운데서
걸을 것이다.
그들은 영원한 불의 한가운데서도
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의지를
굴복해왔고,
정결케 하는 불로 그들의 죄가 탈
수 있도록 허락해왔기 때문이다.
한 여성 성경 연구
모임에서 말라기서를 읽고 있었다.
그 그룹에서 말라기 3장을
연구할 때,
여성들은 바로 이 주제에 대한
약속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가 임하는 날을
누가 견디겠느냐?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서겠느냐?
그는 정련하는 자의 불과 같고
세탁하는 자의 비누와 같으니라.
그가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같이 앉아서 금과 은같이 그들을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의 안에서 야후와께
헌물을 드리게 하리라.”
(말라기 3: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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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불로 그들의
죄와 찌꺼기를 태우도록 허락한 모든 자는 야후와의
생명을 닮은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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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정련되는 과정을
몰랐던, 그
여인들은 성경에 묘사된 그 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고자
그 정련 과정을 배우기 원했다.
한 은세공인을 알고 있던 여인이
그 세공인에게 가서 그 과정을 관찰하고 성경 공부
모임으로 돌아와 배운 것을 전달하기로 했다.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은세공인과 약속을 정한 후,
그녀는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열려 있는 틀 위에 은
한 조각을 놓고,
은세공인은 은을 정련할 때,
모든 불순물들을 태워 버릴 수
있기 위해 불길이 가장 뜨거운 곳인 불 한가운데 은을
넣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여인은,
은이 그 불길 속에서 정련되는
시간 내내 세공인도 그 불 곁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지 물었다.
그 남자는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은을 쥐고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시간 내내 은을 계속 쳐다보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은을 너무 오랜 동안 방치해두면,
그 은도 손상되어 버리니까요.”
여인은 침묵 속에서,
잠시 더 지켜보더니,
질문했다:
“그 은이 완전히
정련되었다는 것을 당신은 어떻게 아나요?”
“그건 간단해요.”
그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 은 조각을 조심스럽게 회전시켰다.
“나의 모습을 그
은 조각에서 볼 수 있을 때,
그것이 완전히 정련되었다는 것을
알죠.”
야후와께서 그분의
형상이 그분의 자녀들 안에서 완벽하게 반사되기를,
가장 간절하게 기다리신다.
이것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본향으로 데려감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운 초청은 여전히,
경고에 귀를 기울이는 자들에게
열려 있다:
너희는 야후와를 만날
만한 때에 그분을 찾으라.
그분께서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
사악한 자는 자기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야후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분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시리라.
우리 주께로 돌아오라.
그분께서 풍성하게 용서하시리라.
(이사야
55:6-7)
정결케 하시는 분의
불에 복종하는 모든 자는 야후와의 임재의 불을 영원히
즐거워할 것이다.
“땅의 티끌 속에서
잠자는 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깨어나 얼마는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고 .
. . 지혜로운 자들은 궁창의 광채같이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2,
3)
요지는 이것입니다.
죽지 않을 의인들이 그 영원한 불
속에서 영원히 살고 번창할 것이며,
동시에,
그 동일한 불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한 “지옥”의
삼키는 불이 될 것입니다.
그 죄인들은 그 불 속에서 매우
짧은 시간 동안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야후와의 임재 자체가
영원한,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는 다음 구절들도 참조하세요:
“야후와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이제 내가 일어나리라.
이제 내가 높여지리라.
이제 내가 나를 높이리라. 너희
[악인들]이
겨를 수태하고 짚을 낳으리라. 너희 호흡은
불같이 되어 너희를 삼키리라. 백성은 불에 타는 석회 같이
되며 베어서 불에 태우는 가시나무같이 되리로다.
멀리 있는 자들아,
너희는 내가 행한 것을 들을지어다.
가까이 있는 자들아,
너희는 내 능력을 인정할지어다.
시온의 죄인들이 무서워하며
두려움이 위선자들을 놀라게 하므로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 가운데 누가 그 삼키는
불과 함께 거하리요?우리 가운데 누가 영영히
불타는 것과 함께 거하리요?하는도다.의롭게 걷는 자,올바르게 말하는 자, 학대하여 얻은 이득을 멸시하는
자, 손을
저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바위로
된 요새가 그를 보호하는 처소가 되며 그는 빵 공급을
받고 물을 확보하리라.”
(이사야 33:
10-16)
모세는 야후와 뵙기를
구하였다:
“그 [모세]가
말하길,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당신의 영광을 내게 보여 주소서.”
(출애굽기 33:18)
야후와께서는 모세에게,
야후와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분 [야후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이는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출애굽기 33:20)
“나는 야후와라
변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말라기 3:6)
야후슈아께서는
본래 그분의 아버지와 함께,
동일한,
영화로운,
불의 임재를 공유하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평범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시기
위해 그것을 내려 놓으셨다.
그래서 그분은 죄인들을 소멸되지
않게 하시면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그분의
재림 때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될 것이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그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임하는 것 같이 갑작스러운 파멸이
그들에게 임하나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
(데살로니가전서 5:3)
“그 뒤에 저 사악한
자가 드러날 터인데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입의 영으로 그를
소멸시키시고 그분의 오심의
광채로 멸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8)
모든 악한 자들과 그
죄의 사람을 [살전
5:3,
살후 2:8]
멸하는 그분의 오심의 “광채”는
야후슈아께서 하늘에 계신 그분의 아버지야후와와
다시 연합되셨을 때,
회복된 그분의 본래의 영화로운
상태로써,
그분의 불타는 듯한 임재이다.
그 연합이 그분의 기도에서 나타난다:
“오 아버지여,
세상이 있기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5)
야후슈아께 회복된 “영광”은
사울을 눈 멀게 했던 그 광채이다:
“오
왕이여,
정오가 되어 내가 길에서 보니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서 나와 및 나와
함께 길가는 자들을 둘러 비추었나이다.”
(사도행전 26:13)
의인들은 그분의 재림
때에 생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불사의 생명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라.”
(고린도전서 15:51,
52)
그분의 재림 때에 악한
자들의 멸망은 야후와의 영원한 불의 임재의 맛보기에
불과할 것이다.
그 불이 결국 회심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죄의 모든
모습들로 가득 찬 이 땅 전체를 깨끗하게 만들 것이다.
사탄은 하늘에서
야후와를 향한 반역과 쟁투를 시작했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것처럼
야후와의 불의 임재가 마지막 파멸을 이룰 것이다.
“우리의 엘로아는
소멸하는 불이시라.”
(히브리서 12:29)
“그분께서 사악한
자들에게 올가미와 불과 유황과 무서운 폭풍을 비같이
내리시리니 이것이 그들의 잔의 몫이 되리로다.”
(시편 11:6)
“연기가 밀려가는
것 같이 그들을 몰아내소서.
밀초가 불 앞에서 녹는 것 같이
사악한 자들은 야후와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
(시편 68:2)
“그들이
땅의 넓은 곳으로 올라가 성도들의 진영과 그 사랑
받는 도시를 에워싸매 불이 하늘에서
야후와께로부터 내려와
그들을 삼켰고.”
(계 20:9)
야후슈아와 야후와
두 분께서 이 밝은 불의 임재를 공유하시며,
두 분께서 새 예루살렘에 거하시기
위해 내려오신다.
그곳에서 그분들의 광채는 태양과
달보다 더 빛날 것이다:
“다시는
낮에 해가 네 광체가 되지 아니하고 달이 네게 밝은
광채의 빛을 비추지 아니하리니,
오직 야후와가
네게 영존하는 광체가 되고 네 엘로아가
네 영광이 되리라.”
(이사야 60:19)
“그 도시는
해와 달이 그 안에서
빛을 비출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야후와의
영광이 그 도시를 밝혀 주었고 그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광체이시기
때문이라.”
(계 21:23)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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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투가 끝났다 (발췌
– “지구가
멸망의 불로 감싸졌고,
의인들은 거룩한 성에서 안전하게
거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에게,
둘째 사망은 힘을 미치지 못한다.
악한 자들에게,
야후와께서 소멸하는 불이 되신다.
그분의 백성들에게는,
그분께서 태양과 방패가 되신다.
요한계시록 20:6;
시편 8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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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le WLC no longer believes that the annual feast days are binding upon believers today, we humbly encourage all to set time aside to commemorate them with solemnity and joy, and to learn from Yahuwah’s instructions concerning their observance under the Old Covenant. Doing so will surely be a blessing to you and your home, as you study the wonderful types and shadows that point to the exaltation of Messiah Yahushua as the King of Kings, the Lord of Lords, the conquering lion of the tribe of Judah, and the Lamb of Yahuwah that takes away the sins of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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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받음! . . . 자유! . . . 무죄!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그들의 죄의 기록이 일소되었다는, 소망을 불러 일으키는 설교를 했다! 죄의 기록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들은 용서 받았다! 그들은 더 이상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행위라는 짐 아래서 수고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이방 종교들이 행위에 의한 구원 교리를 갖고 있었다. 바울은 모든 “행위”가 구주 야후슈아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이제, 구원은 그분을 믿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내가 야후슈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야후와의 능력이기 때문이라 . . . 복음에는 야후와의 의가 믿음에서 믿음까지 계시되어 있나니 이것은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16-17)
야후슈아를 믿는 자들은 그들의 죄에 대해 요구되는 대가로서 치러진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은 그분과 함께 “부활되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그들은 그들의 이전 죄 된 본성에 묶여 있지 않다. 그들은 야후슈아 안에서 자유롭다!
내가 야후슈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후슈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내가 이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야후와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여기에 복음의 능력이 있다! 회개한 죄인들은 그들의 구주를 믿는 믿음을 통해 그들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고 야후슈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이 진리가 삶을 변화시킨다!
사탄은 사람들의 삶을 노예화시키는 그의 통제가 야후슈아의 복음의 능력으로 무력화된다는 것을 안다. 삶을 변화시키는 이 진리를 세상으로부터 떨어트려 놓기 위해서, 사탄은 그 과정을 설명하는 가장 명확한 말씀들을 오역하고 잘못 이해시킴으로써 그것을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골로새서 2:13-17 말씀이다:
“죄로 인해 죽었던 너희를 . . . 야후와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셨으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공공연히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실체는 야후슈아께 속해 있느니라.” (골로새서 2:13-17)
사탄은 이 구절에 있는 “손으로 기록한 요구 사항들”을 야후슈아께서 “길에서” 치우사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신성의 율법이라고 생각하도록 많은 사람들을 잘못 인도해왔다. 사람들은 신성의 율법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으며 정결한 고기들을 먹고 절기들과 안식일과 월삭에 예배 드리라는 규례와 명령들이 “폐해졌다”고 가정한다. 그리하여, 사탄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제로 신성의 율법을 범하도록 인도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 구절이 율법은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절을 자세히 연구하면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이 밝혀진다.
“손으로 기록한 요구 사항들’은 무엇이었나? 이 단어들은 그리스어 문구cheirographon tois dogmasin 에서 왔다.Cheirographon 은 손으로 쓴 것을 의미하는데, 더 구체적으로는 법적인 서류, 채권이나 빚 문서에 적용된다. Dogmasin은 법령, 법규, 사람의 행위나 삶의 방식을 지도하는 안내문을 말한다. (Earl L. Henn,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하나님의 율법이었나?”)
우리에 “반대”되는 “요구 사항들”은 신성의 율법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성의 율법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기록했다: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니라.” (로마서 7:12)
야후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회심시키고 야후와의 증언은 확실하여 단순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야후와의 법규들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야후와의 명령은 순수하여 눈을 밝게 하는도다. 그것들은 금보다, 참으로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들이며 또 꿀과 벌집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또한 그것들로 경고를 받나니 그것들을 지킬 때에 큰 보상이 있나이다. (시편 19:7-8, 10-11)
바울은 골로새서 2장에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한다! 구주의 죽음에 의해, 우리의 죄에 대한 유죄라는 빚이 일소되었다! 죄는 “손으로 기록한 요구 사항들”이며 그것은 정말로 “우리를 반대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가 저지른 죄의 목록들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혔다. 빌라도는 야후슈아의 죄목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새겨 넣었다. 우리의 왕이자 우리의 구주로서, 야후슈아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다.
“그가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 (이사야 53:12)
“야후와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야후와]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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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죄를 위한 구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그들의 죄가 “사라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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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죄를 위한 구주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든 자는 그들의 죄의 기록이 “제거”되며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다.
“[야후슈아]께서도 우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심으로 . . . 친히 나무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지셨으니 이것은 죄들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살아서 의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라. 그분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고침을 받았나니.” (베드로전서 2:21, 24)
골로새서 2장은 매우 아름답고 심오한 진리를 제공한다: 의롭게 하심이라는 교리.
“죄로 인해 죽었던 너희를 . . . 야후와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셨으며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골로새서 2:13, 14)
십자가에 못 박힌 “그것”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신성의 율법이 아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일소”된 것은 범법과 죄의 기록이다! 죄의 기록이 일소되었을 때,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사탄의 능력은 깨진다!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공공연히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 (골로새서 2:15)
이것이 오늘날의 복음이며, 또한 골로새인들에게 전파되었던 복음이었다.
골로새는 이방 도시였다. 그들의 종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강조했다. 그들은 온전함이라는 것이 오직 극한 자기-부정과 즐거움의 자제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의롭다고 주장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들이 시행하는 금욕을 시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은 전에 이교도였던, 골로새에 있는 젊은 크리스챤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구주의 공로를 전적으로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 행하는 자기 부정이 구원을 위한 요구사항이라고 추정하며 그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바울은 “행위로 하늘에 가고자” 노력하는 그들을 경고했다.
“어떤 사람이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하지 못하도록 조심하라. 그것들은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을 따르는 것이요 [야후슈아]를 따르는 것이 아니니라.” (골로새서 2:8)
야후와께서는 구원을 위해 결코 자기-형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야후슈아 안에서 자유로워질 것과 그들 주변에 있는 이방인들의 스스로 행하는 금욕에 의해 영향을 받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실체는 [야후슈아]께 속해 있느니라. 아무도 꾸며 낸 겸손과 천사 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그런 사람은 . . . 머리 [야후슈아]를 붙들지 아니하느니라 . . .” (골로새서 2:16-19)
“실체는 야후슈아께 속했다”라는 문구가 오역되었다.
“골로새서 2:17의 마지막 몇 개의 단어들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그리스도 [야후슈아]의 몸’이다. [야후슈아]의 . . . 몸이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2:27이 그 답을 제공한다: 이제 너희는 [야후슈아]의 . . . 몸이요, 개별적으로 지체니라.’ [야후슈아]의 . . . 몸은 교회다!” (Earl L. Henn, “안식일과 거룩한 날들이 폐해졌는가?”)
바울은 골로새인들에게 그들 주변의 이방인들이 그들의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에클레시아가 합당한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이제 이방 철학들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야후슈아 안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었다.
WLC의 컨텐츠에서 야후와의 신실한 자들을 언급할 때, 우리가 교회를 사용하지 않고 에클레시아를 사용하는 이유는 “교회”라는 단어가 본래의 그리스어, “에클레시아”의 의미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룹을 강조하는 단어로서, 오류가 있는 번역이므로 결코 사용되지 말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문자 그대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야후슈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조직화된 종파들과 타락한 바벨론의 종교들로부터 정말로 불러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외침이 들릴 때, 누구도 다시 바벨론의 교회들과 종교의 형태들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로부터 떠나 [야후슈아]와 함께 죽었거늘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그 규정들에 복종하느냐? ‘곧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손을 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 . . 사람들의 명령들과 교리들에 따른 것이라.” (골로새서 2:20-22)
하늘에 가기 위해 더 이상 사람이 만든 전통들에 묶여 있을 필요가 없다. 십자가에서의 야후슈아의 죽음은 죄인들이 치러야 할 그 값을 탕감해주었다. 당신의 죄의 기록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 . . [야후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5, 6)
당신은 용서 받았습니다! 당신은 자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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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어떤 부분들은 다른 구절들과 대조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을 배우는 학생들이 이것을 발견할 때, 그들은 종종 성경이 신뢰할만하지 않다고 추정한다. 그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부하기
보다는 성경을 거절한다.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은 기억해야 한다:
진리는 조화롭다.
진리는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의 한 구절이 다른 구절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더 연구하라는 하늘의
초청이다. 그 주제와 관련된 모든 사실들과 원칙들이 그 연구에 모아져야 한다. 상충되지
않고 증거의 무게와 반대되지 않는 결론이 도출돼야 올바로 이해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혼돈시킨 한 문장이 로마서 14:5, 6에 나온다.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야후와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야후와께 감사하느니라. (로마서 14:5-6)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라는 문구는,
어느 날이든지 창조주께 예배 드리는 날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된다. 예배일로 특정한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고 “모든” 날이 예배 드리는 날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성경적 근거로 로마서
14장을 사용한다. 그러한 신념은 바울이 그 인용된 문장에서 안식일과 절기 날짜들을
말하는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장과 바울의 다른 편지들을 주의 깊이 연구하면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은 언제나 절기들과 일곱째 안식일을 지켰고 그가 개종시킨 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결코
신성의 율법이 더 이상 구속력이 없다고 가르치지 않았다. 로마서 전반부에 바울은 고백한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로마서
7:12) 바울은 항상 믿음에 의한
의와 신성의 율법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으며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인식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6:15)
로마서 14:5 & 6
구절은, 모든 날을 다 똑같이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는 이교의 관행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로마서 14장에서 바울은 로마의 신자들에게 “믿음이 연약한” 새로운
개종자들을 도와줄 것과, 그들이 새로
찾게 된 신앙을 흔들 수 있는 그런 토론에는 참여하지 말라고 지도하고 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야후와께서 그를 받으셨음이라.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야후와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야후와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로마서 14:1-7.)
새로운 개종자들이 이교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들의 옛 우상들의 권세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옛 미신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 도시에서 대부분의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개종자들 중 많은 이들이 고기 먹는 것을 중단했고, 그 대신 오직 과일과
곡식과 야채만 먹기로 선택했다. 바울은 우상의 권세는 마귀로부터 나오며 야후와의 권세는 더 강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바울은 우상들이 전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데에 문제가 없었다. 바울은 그 우상 숭배 예식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상들과 그것들에게 바쳐진 음식은 그에게 쟁점이 아니었다. 바울은 무리를 위한 온순한 안내자였을 뿐만 아니라 믿음의 전사였다. 그의 믿음은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음으로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의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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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고린도 박물관의 머리 없는 우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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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야후와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고린도전서 8:7, 8.)
바울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약하게 한다면 어떤 것도 결코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그는 그의 교훈을 계속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고린도전서 8:9-13.)
로마에서 새로운 개종자들 중 일부가 옛 이교도 신념을 계속 가지고 다른 날들보다 한 날을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이교도들은 종종 부분적인 금식을 했는데, 특정한 날들에는 어떤 음식들을 먹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이 금요일에 생선은 먹고 다른 고기들은 먹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일부 새로운 개종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을 두려워 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은
우상의 다양한 금식의 날들을 여전히 지키고 있었다. 다른 어떤 이들은 모든 날을 똑같이 여기고 있었고,
금식함으로써 어떤 한 날이나 다른 날에 특별한 존경을 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언급한 쟁점이었다. 그는 일곱째 날 안식일이나 연간
절기들을 말하고 있던 것이 전혀 아니다!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라는
문구는 (로마서 14:5)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돼 왔다.
그 구절은 어느 누구에게도 신성의 율법을 깨트리고 그들 자신의 예배일을 선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 문장에서, 바울은 각 개인이 율법에 순종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이 옳은지에 대해 각자가 개인적으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확정할지니라” 또는 “충분히 납득하다”는 문구는 플레로포레오(plerophoreo)로부터 왔다. 이 그리스어의 의미는:
“완전히 이행하다 (분명하게),
온전하게 확신하다 (또는 납득하다), 전체적으로
완수하다 . . . 이 단어는 의미한다 ‘완전히 가져오다,
성취하다,’ . . . 로마서 14:5에서
그것은 [야후와]의 뜻을 이해 [파악]한 것을 말한다.” (#4135, Strong’s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p. 1318.)
바울은 율법이 지켜져서는 안 된다고 결코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각자가 야후와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도록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다. 만약 로마서가 정말로 각자의 마음에 “완전히
납득” 된다면, 일부 새로운 개종자들이 여전히 이교 미신들을 두려워하거나
이교의 금식 날짜들을 준수하는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러한 “믿음의 갓난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며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바울의 책망이었다.
믿음의 초보 단계에 있는 자들은 그들 각자가 신성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과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도록 야후와의 율법과
뜻을 연구할 의무를 가졌다.
야후와께서는 우리 삶의 가장 세부적인 것들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행위나 먹는 것이나
금식하는 것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관심은 행동을 취하는 마음의 동기에
있다. 바울은 오직 사랑에 의한 봉사만이 야후와께 받아 들여진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로마의 신도들에게 금식하는지 금식하지 않는지 등 행위에 기초해서 다른 사람 판단하는 것을 멈추라고 책망했다.
바울의 메시지의 전체 요지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믿음을 통한 율법에 대한 순종이었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로마인들을 경고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야후와께 판단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10)
로마인들을 향한 바울의 메시지는 그것이 쓰여졌던 때와 같이 오늘날도 적용된다. 믿음에 있어 어린
사람들을 보호하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치 말고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지도 맙시다. 야후와의 뜻을 알고 연구하고 이해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데에 전념합시다. 모든 신도들이 그들이
율법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성의 율법을 지키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