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특별한 한 그룹을 제시한다. 그들은 모든 진리 안에서 그들의 신성의 지도자를 따르며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로서, 사독의 아들들이라고 불린다. 하늘은 그들의 사랑의 순종과 온전한 복종에 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야후와 그분께 친히 봉사할 수 있도록 임명하며 존귀히 여김으로써 보상한다! 다른 이들은 사람에게 봉사하지만, 사독의 아들들은 야후와께 직접 봉사하며 그들의 삶을 언제나 그분과 직접 교통하는 삶으로 산다. (에스겔 44:15 참조)
이 고결한
부르심을 준비하기 위해, 사독의 아들들은 하늘의 학교에서 배운다. 그들의 선생님은 천사들이며; 그들의 교과서는 성경과 자연이다. 그들의 받는 훈련은, 그들의 의의 지도는, 하늘로부터 직접 온다. 이 땅의
어떤 기관도 사독의 아들들을 그들의 높고 거룩한 소명을 위해 훈련시키는 과업에까지 이를 수 없다.
40 세의 나이에,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그들의 군대의 성공한 장군이었다.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야후와께서는 다르게 아셨고 그를 사막으로 보내셨다. 80 이라는 나이에, 광야라는 학교에서 양을 돌보며 40 년을 보낸 후에, 겸손해진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과업에 대하여 자신감을 느끼지 못했다. 이제야, 야후와께서는 모세가 마침내 준비되었음을 아셨다. 사십 년 동안 하늘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은 후에, 모세는 마침내 그의 삶의 위대한 과업을 위한 자격이 갖추어졌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받는 훈련과, 또한 그들이 창조주께로 돌아오는 예배에 있어서, 사독의 아들들은 종종 홀로 서라는 부름을 받는다. 세상의 바로 마지막 때인 지금보다도 더욱 이와 같은 때는 결코 없었다. 한 때 순결했던 에클레시아가 진리를 거절했고 이제 오류를 가르친다. 그들은 하늘에서 부른 사독의 아들들을 위한 훈련에 적합하지 않다. 그런 훈련은 그릿 강 옆에 숨은 엘리야를 위한 것이었다. 야후와께서 그의 안전을 위해 그를 거기로 인도하셨다. 그는 안식일에 지역 회당에 참석하지 않고, 고독 속에 예배 드렸다.
그 강이 마른 후, 엘리야는 겸손하며, 믿음이 있는 한 과부의 집으로 인도되었으며, 거기서 그는 삼 년 반이 마쳐질 때까지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엘리야는 여전히 어떤 조직화된 예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그 과부와 그녀의 아들과 함께 가정에서 에클레시아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그가 얻은 영적 힘은 갈말 산에서 아합과 바알과 아세라의 850 명의 선지자들 앞에 홀로 설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침례 요한도 또 한 명의 사독의 아들이다. 그의 고독한 예배는 그를 야후와를 위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가정 에클레시아는 사독의 아들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야후와와의 그러한 직접적인, 일대일의 예배가 사독의 아들들로 하여금, 온 세상의 배도에 맞서 야후와를 위해 신실하게 서야 하는 그들의 독특한 사역을 위해 준비시킨다.
바벨론으로부터 나와 진리의 충만한 빛으로 들어가라는 부름에 온전히
순종하는 모든 자는 가정에서의 예배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하늘로부터 반드시 받아야하는 훈련은 타락한 교회들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게다가, 교제만을 위한
“교회” 참석은 성경에 의해 용납되지 않는다. 이는 야후와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 “두 사람이 합의하지 아니하고서야 함께 걸을 수 있겠느냐?”
(아모스 3:3)
진리를 따르기로 헌신한 모든 자는, 대가가 어떠하든지 간에, 그들을 낙담시키기 위해 사탄이 설계한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상황들이 발생하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가정 에클레시아는 다소간 잘못된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외로움의 감정과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이 심해질 수 있다 – 만약 그 사람이 완전히 혼자이며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가정 에클레시아가 성경적인지 아닌지에 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놀랍게도, 홈 에클레시아는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주목할만한 한 경우를 통해, 그것은 지시된 것이다. 야후슈아의 에클레시아가 자라며 퍼짐에 따라, 집이나 자연의 조용한 곳에서 개인적으로 예배 드리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다. 빌립보에서, 그 독실한 자들이 예배를 위해 습관적으로 모인 곳은 강가였다. “안식일에 도시에서 나가 사람들이 늘 기도 드리는 강가에 앉아서 거기에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니라.” (사도행전 16:13)
분명, 그 독실한 신자들이 안식일에 기도하고 예배 드리기 위해 강가와 같이 고요하고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는 일은 “관습” 과도 같은 일이었다. 거기에 있는 동안, 바울과 실라는 자주색 옷감을 파는 루디아를 알게 되었다. 그녀와 그녀의 온 집이 침례를 받았다. (행 16:14-15 참조.)
모든 시대에 걸쳐, 신실한 자들은 가정 에클레시아를 열었다. 야후와와 동행했던 에녹은, 도시 생활의 복잡함과 다급함 속에 있지 않고, 그분을 예배하기 위해 고독한 곳으로 물러났다. 이러한 영적 피난처로부터, 에녹은 의의 선생이 되어 나아가기 위해 강하여졌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 있었을 때에도, 개인들과 가정들은 가정 에클레시아를 열었다! 처음부터, 모세는 “회막” 을 세우고 야후와와 대화하기 위해 거기로 나아갔다. 일년 내에, 이스라엘은 그들 앞 바로 거기에 성소를 가졌다. 누군가는 그들이 일곱째 날 마다 예배 모임을 가지라고 모두 부름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모세보다 안식일 설교를 더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 경우가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장막 안에 머물라는 명령을 받았다.
야후와께서 그 안식일을 위해 추가로 식량을 더 주셨기에 모든 사람은 그 거룩한 시간에 집에 머물 수 있었다.
“보라! [야후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일을 주었으므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분의 빵을 너희에게 주노니 일곱째 날에는 너희 각 사람이 자기 처소에 머물며 아무도 자기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출애굽기 16:29, 30)
바벨론을
떠나는 모든 자를 위해 홈 에클레시아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런 새로운 예배 방식에 정신적으로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소요된다. 모든 사람에 의해 주장될 수 있는 성경의 한 약속이 마태복음 18:20 에 나온다:
“나의 이름으로 두 세 사람이 함께 모인 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홀로 예배 드리는 사람도 많은 사람들의 그룹으로 예배 드리는 것과 동일한 확신을 가지고 이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성경은 야후와를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그들을 지켜보고 보호하는 보호 천사들이 주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혼자 있는 사람도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는 그녀의 보호 천사와 함께, 그들은 둘로 구성된 에클레시아를 이루며, 야후슈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신다.
소수의 사람들은 가정에서 적은 그룹으로 다른 이와 함께 예배 드릴 기회를 갖는다. 가족과 함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진 가족을 가진 자들은 축복을 받은 자들이다. 대부분은 완전히 홀로 예배 드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자신의 가족과 함께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춘 그룹으로 예배 드리든지, 침실에서 혼자 예배 드리든지, 그러한 예배는 야후와께 가납될만한 것이며 그분께서 그 예배자를 놀랍도록 축복하실 것이다.
어떤 장소를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화려하게 꾸며진 유리 창문이 아니며, 많은 예배자들에 의해 둘러 싸일 필요도 없고 지붕에 첨탑이 있을 필요도 없다. 어떤 장소를 거룩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야후와의 임재다. 이스라엘은 그 사막의 모래 바로 위에 장막을 세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기에는 바닥도 토대도, 들어 올리는 것도 없었다. 오직 땅만 있었다. 야후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그들로 나를 위하여 성소를 만들게 하라.” (출애굽기 25:8) 오늘,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은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그분들로 하여금 그들 가운데 거하실 수 있도록 초청하는 그러한 예배자를 찾고 계신다. 그러한 곳은 어는 곳이든지 그러한 교제를 위한 거룩한, 구별된 장소가 된다.
그 진영이 이동하고 난 후에는, 그 성막이 서 있던 곳, 그 모래 자체에는 어떤 거룩한 것도 없었다. 그 장막을 거룩하게 만들고, 창조주께 예배가 드려질 수 있는 거룩함의 장소로 만드는 것은 야후와의 임재였다. 그 예배 장소는 자연의 고요한 곳일 수 있다. 때때로 그곳은 호숫가에 주차된 자기 자신의 자동차 안일 수 있으며 – 심지어 주차장에 주차된 자동차 안일 수도 있다! 종종, 홀로 예배 드리는 자는 그들 자신의 침실이라는 사적인 곳에서 그렇게 해야만 한다.
사람이 예배 드리는 곳마다 거룩한 땅이다. 왜냐하면 야후와께서 거기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배는 창조주를
향한 사랑과 경배가 표현되는 수단일 뿐이다.
전통과 교회 형식에 익숙한 사람은 처음 자신의 침실에서의 고요함이 진정으로 예배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예배는 사랑의 선물이다. 그것은
야후와를 향한 순결한 헌신으로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런 예배를 야후와께서 기쁘게 받으신다.
불경하거나 조롱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보다 홀로 순결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더 수월하다.
홀로 나아가는 것과 새로움을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마가복음 2:27) 사람이 어떻게 예배 드리든지, 어디에서 예배 드리든지, 유일한 필요 조건은, 사랑과 감사로 야후와께 자신의 마음을 가져가는 것이다. 이것은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의 가족과 함께 있을 때도 행하여질 수 있다.
고대 히브리어에서, 일곱이라는 숫자에 해당하는 단어는 “경이로워하다 (marvel)” 라는 동사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2 에 그 단어를 넣어 읽는다면:
“경이로운 (marvel)” 날에, 야후와께서 친히 만든 자신의 일을 마치시고 친히 만든 자신의 모든 일에서 떠나 “경이로운” 날에 안식하시니라. 야후와께서 그 “경이로운”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으니 이는 그 날에 야후와께서 친히 창조하며 만든 자신의 모든 일에서 떠나 안식하셨기 때문이더라.
당신은 당신의 삶 속에 있는 축복들에 대하여 안식일에 경이로워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 구원의 계획과 이 땅의 구원 받은 자들을 위해 계획된 그 놀라운 운명을 경이로워하며,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경이로워하는가? 그 안식일, 일곱째 날이 우리의 감정을 경이롭게 만들 만큼 모두에게 기쁨과 축복이 될 것인가?
홀로
바벨론을 떠나는 사람들 중 다수는 그렇게 홀로 행한다. 예배가 활동적인 경험이기에, 홀로 드리는 예배를 위해 조정이 필요할 수 있다.
홀로 예배
드리는 사람이 안식일의 매우 풍성한 축복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떤 이의 부족이나 제한도 고려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거룩한 시간을 심도 있는 성경 연구,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과의 교제로 보낼 수 있다.
찬양이나 종교 음악 CD 를 틀어 놓고 그에 맞춰 찬양을 부르며 음악의 축복을 누릴
수 있다. 믿음을 고양시키는 또 다른 즐거운 방법은 기도를 하거나 감사 목록을 작성하는 것이다.
단순한 공책도 좋다. 매 안식일마다 특정한 기도 요청들을 기록하라.
다음 안식일에, 지난 한 주 동안 응답된 기도들과 받은 축복들을 기록하고,
다가오는 한 주를 위해 새로운 목록을 작성하라.
실제로 간구하는 것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야후와께서 응답하실 때, 그 축복이 인지되고 감사함으로 인정될 수 있다. 받은 긍정적 축복들에 집중하는 것이 홀로 서는 자들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이것은 감사와 사랑을 불러 일으키고, 그로 인해, 구속주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증가한다.
또 다른 즐거운 활동은 WLC 에서 인터넷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것이다. WLC 멤버로 가입하면 영적 교훈이 풍성하게 담겨 있는 책 세트를 준다. 이러한 책자들은 연구를 위한 풍성한 주제를 제공한다. 또한 WLC 에는 생각과 묵상을 위한 양식을 제공하는 기사들이 있다.
외로움이 문제가 된다면,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라. 만일 당신이 누군가에게 증인이 될 수 있다면, 안식일은 그들에게 다가가 영적 교제와 나눔을 가질 수 있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언제나 보상 있는 경험이다. 창조주의 음성은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더욱 그러한 자연에서 더욱 쉽게 분별될 수 있다. 야후슈아께서 이 땅에 사셨을 때, 그분께서는 그분의 하늘 아버지와 일대일의 교제를 위해 종종 그러한 자연으로 나아가셨다. 그분께서는 가장 진실되고, 가장 순결한 예배는 영혼을 만드신 분과의 개인적인 교제라는 것을 아셨다. 이 경험이 또한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
가족
예배에 있어
자신의 가족과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는 놀라운 축복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더 큰 그룹과
함께 예배 드릴 때 개인의 필요들이 종종 더 쉽게 충족되기 때문이다.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그것은 마음을 야후와께로 이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찬양의 가사들을 기억하는 것을 통해 배우는 축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부모들은 성경 이야기를 가지고 자녀들을 가르치며 지도할 수 있고, 또한 생각을 하늘로 향하게 하는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이나 실물 교훈을 나눌 수 있다. 오후에 좋은 날씨 속에 가족이 함께 걷는 것은 자녀들의 마음을 자연의 것들 속에 보여지는, 창조주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놀라운 기회가 된다.
천로역정 또한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좋은 것이다. 어른들이 성경 연구를 할 때 자녀들은 천로역정을 읽거나 들으며 함께 할 수 있다. 자녀들은 성경 이야기 그림들을 색칠하고, 천로역정을 들으며 그것으로부터 깊은 영적 가르침을 배울 수 있다.1
부모들은 서로 그리고 나이가 좀 찬 자녀들과 함께 성경 진리와 종교 서적들을 공부함으로써 서로 간의 관계를 고양시킬 수 있다.
그룹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 드릴 기회를 갖는 자는 평범하지 않은 기회로 축복을 받은 것이다. 바벨론을 떠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홀로 예배 드린다. 다른 신도들과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은 기쁨이며 특권이다. 그러나, 그 예배에 참여한 자들의 개인적 필요들을 세심하게 고려해야 한다.
25 명의 그룹은 가족보다 더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달린 가족이 없는 성인은 젊은이들의 필요와는
다른 필요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필요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어른들은 자녀들의 이해 수준을 넘어서 토론을 할 수 있지만, 어린 자녀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로 오랜 시간 동안 앉아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이성적이지 않다. 많은 성인들은 성경 연구를
하며 오랜 시간을 즐길 수 있지만, 어린 자녀들의 필요와 젊은이들의 흥미도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경계와 기도가 행사되어 그룹과의 만남의 축복이 다른 형태로 양식화된 에클레시아 행사로 퇴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안식일의 편안함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짧은 설교가 주어질 수 있으나, 어떤 한 개인의 단독 책임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더 유능한 지도자가 있는 대로 한 사람을 선발할 수 있는 틀을 정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엄격한 틀은 야후슈아의 영의 지도를 묵살시킬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날을 위해 어떤 다른 것을 예비하신 야후슈아의 영의 지도를 받을 수 없게 된다.
예배 모임 후의 교제 식사는 함께 방문하는 것을 위한 놀라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으나, 대화의 주제들이 영적인 것에 머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오후에, 젊은이들은 자연으로 나아가 걸을 수 있다. 그들은 저녁 예배 동안 나눌 실물 교훈을 가르치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다.
혼자 예배 드리든지, 가족과 함께, 또는 그룹으로 예배 드리든지, 안식일 축복을 위한 준비는 첫 날에 시작된다. 부모들은 그들의 힘과 에너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그 거룩한 시간이 이르렀을 때, 그들은 주중에 잃었던 쉼을 보충하느라 낮잠을 자는 대신에, 그들의 자녀들과 함께 그 날을 보낼 수 있다.
활동 (ACTS)
우리는 예배가 크리스챤에게 자연스러운 것임을 처음부터 다시 발견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시편을 기록한 [경건한] 이스라엘에게 . . . 그러했던 것과 같으며, [야후와] 의 . . . 크심과 친절하심을 기념하는 습관은 끝이 없는 감사와 기쁨과 열정을 낳는다.2
역동적인 예배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개요를 따르는 것은 준비된 예배에 있어 매우 유용할 수 있다. ACTS 는 인정(Acknowledgement), 고백(Confession), 감사(Thanksgiving), 탄원(Supplication) 의 머리 글자다. 혼자 예배 드리든지, 가족과 함께, 또는 그룹으로 예배 드리든지, 이 지도를 따르면 매우 도움이 된다.
인정
야후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리며 거룩함의 아름다움으로 야후와께 경배할지어다. (시편 29:2.)
예배의 첫
단계는, 기도나 찬양이나
고요한 묵상으로, 야후와 그분이 누구신지, 즉 창조주이시며 모든 사랑,
생명, 지식과 받은 모든 축복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야후와를 모든 생명과 사랑의 중심으로 인정하는 것은 희망과 믿음을 불러 일으킨다. 그분께서는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그분과의 우리의 관계를 인정함에 따라 그러하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이다.
찬양을 부를 수 있고, 찬양의 시편을 낭독하고 묵상할 수 있다. 그분의 권능과 능력 뿐만 아니라 야후와의, 그분의 자녀들을 향한 부모로서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는 성경 구절들은 모든 것의 통치자 되시는 그분을 인정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룹 예배자들을 위해서는, 창조주/피조물의 관계를 강조하는 실물 교훈들이 공유될 수 있다. 신성의 사랑의 특성들을 나타내는 어버이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자녀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
고백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요한일서 1:9
고백은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예배자가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때, 그는 전능하신 분을 붙잡도록 고무된다. 예배의 한 형태로서의 고백의 목적은 우리의 죄의 흉함을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용서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의를 기울여서, 공개적 고백들이 시간, 장소와 청중에게 적합한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어떤 고백들은 결코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들이 유익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주고 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죄와 사적인 것들은 야후와 앞에 개인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것들이 그룹이나 가족 앞에 내 놓아져서는 안 된다. 만약 어떤 이가 다른 이에게 잘못을 했다면,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필요하다.
예배에서의
고백은 개인의 죄들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자세하게 말하기 보다는, 야후와의 권능과 능력과 기꺼이 용서하심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때로 손님이 방문하여 어떻게 야후와께서 자신을 죄의 삶으로부터 구주를 향한 온전한 순종의 삶으로 이끄셨는지 “간증” 을 나눌 수 있다. 종종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할당된 시간 대부분을 자신의 지난 죗된 삶과 그들이 행했던 모든 악한 것들에 관해 자세하게 말하다가, 오분의
시간이 남았을 때, “결국 저는 구주께 항복했고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라는 말로 끝을 맺는다.
이런 종류의 고백은 야후와의 능력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영화롭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성경은 가르친다: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극도로 불쾌한, 타락한 악 – 사탄의 권세에 초점을 맞추는 “고백” 은 율법을 주신 분, 용서하시는 분으로부터 초점을 앗아간다. 그런 대부분의 간증은 분명 공공 예배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나, 참된 회개로 이끄는 고백은 깊이 뉘우치는 마음의 필요로부터 솟아나며 모든 것의 통치자 되시는, 우리의 야후와로부터 용서라는 선물을 이끌어낸다.
감사
오 야후와께 감사하라. 그분은 선하시며 그분의 긍휼은 영원하도다. (시편 106:1.)
야후와께
감사를 드리는 가장 설레는 방법들 중 하나는 지난 한 주 동안 그분께서 당신에게 축복하신 많은 것들에 대해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들에게 그들이 무엇에 관해 감사하고
있는지 나누도록 요구하라. 개인과 가족은 자신들이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목록을 작성하는 축복 노트를 계속하여
기록할 수 있다. 더 큰 그룹은 지난 한 주 동안 받은 축복들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을 초청할 수 있다.
하늘 아버지의 크심과 선하심에 관하여 말하는 이러한 기회가 결코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듣는 자들의 믿음을 강화시켜준다. 야후와께서 다른 누군가를 어떻게 축복하셨는지 듣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일 야후와께서 다른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행하셨다면, 그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함께 모여, 그들의 구주에 대해 느끼는 감사와 사랑을 말한다면, 모든 사람이 좋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고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야후와께서 이러한 간증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 간증들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만일 크리스챤들이 함께 모여 [야후와] 의 사랑과 그 구속의 소중한 진리들에 관하여 서로 대화를 나눈다면, 그들 자신의 마음들이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우리의 하늘 아버지에 대해 더 배울 수 있고, 그분의 은혜의 신선한 경험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는 염원이 생길 것이며; 우리가 이것을 행함에 따라, 우리 자신의 마음이 따뜻하여지고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하여는 더 적게 생각하고 더 적게 말하며, 대신에 [야후슈아] 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말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훨씬 더 많이 얻게 될 것이다.3
사람이 하늘 아버지와 그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찬양의 말들을 말하는 시간을 갖는다면, 이러한 말들은 하늘에서 대단히 귀하게 여김을 받는다. 사랑과 감사의 기도가 요청의 기도보다 훨씬 더 드물다. 마음의 찬양이 표현될 때, 이러한 말들은 야후와의 크신 선하심에 대한 증거로서 시간과 영원에 걸쳐 증거되기 위해 하늘에 기록된다.
그때에 야후와를 두려워한 자들이 서로 자주 말하매 야후와께서 귀를 기울여 그것을 들으시고 야후와를 두려워한 자들과 자신의 이름을 생각한 자들을 위하여 자기 앞에서 기념 책을 기록하셨느니라. 만군의 야후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보석들을 만드는 그 날에 그들을 나의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자기의 친아들을 아끼는 것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말라기 3:16, 17.)
하늘의 책들 중 하나에 인용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영예인가! 그렇다면 당신의 찬양, 사랑과 감사의 말들이 얼마나 가치 있다는 것인가.
[야후와] 와 천사들이 기쁨으로 듣는 말들은 . . . [야후와] 의 . . . 독생자를 통해 세상에 주어진 그 큰 선물에 대한 감사의 말들이다. 진리의 빛의 축복에 대한 모든 찬양의 말들은 . . . 하늘의 기록 책들에 기록된다.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또한 우리에게 그분의 의로움을 전가하시기 위해 [야후슈아] 를 주심으로써 . . .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자비로운 친절을 인정하는 모든 말은 . . . 그분의 기억의 책에 기록된다. 이런 종류의 간증들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분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분께 대한 찬양을 너희로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4
찬양의 시편 역시 낭독될 수 있다. 가족 가운데, 각 사람이 한 절씩 읽으면 좋다. 더 큰 그룹에서는, 모두 함께 공감하며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삶 속에 야후와께서 베푸신 축복의 경험을 나누는 모든 자는 모든 영적 경험들 중 그 간증 모임이 가장 달콤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탄원
기도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야후와]께 그 심정을 펴 놓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야후와]께 알리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도는 [야후와]를 우리에게로 내려오시게 함이 아니요,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올라가게 하는 것이다.5
기도는 그
탄원자를 영원하신 분의 임재 속으로 이끈다.
그런 거대한 특권이 가볍게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한편, 공개적 기도가 이루어지는 장소와 청중도 고려되어야 한다. 한 사람이 계속 웅얼거리며 오랫 동안
기도하여, 아이들이 산만하게 되고 청중이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공중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긴 기도를 위한 장소는 개인의 사적인 공간이 적합하다.
이상적인 공중 기도는 이 분을 넘기지 말아야 한다. 만일 큰 그룹이 있다면, 모두가 기도의 축복을 경험하기 위해 세 네 명의 더 작은 그룹으로 분산시키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각 사람이 기도할 기회를 갖게 된다.
가족 뿐만 아니라 큰 그룹 안에서 기도하는 또 다른 방법은 원을 이루어 이구동성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시작하더라도, 기도할 부담이나 감사할 내용이 있는 다른 누군가도 언제든지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누기 위해 소리를 내어 기도할 수 있다. 가장 어린 자녀도 자신이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말함으로써 공중 기도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기도는 풍성한 보상을 가져온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의 직접적 영향력에 열려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 기도는 종종 다른 사람의 생각에 한 생각을 유발시킨다. 자신의 기도 순서가 오기만을 기다리기보다는, 감명 받은 것에 즉시 반응할 수 있고 마음의 생각들을 탄원과 감사로 표현할 수 있다.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주셨던 기도로 마치는 것은 그룹 기도를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방법이다.
“일치되어 기도” 하는 고대의 관습이 오늘날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야후와는 나의 목자시니 와 같이 그분께서 구원하신 자들에 의해 그러한 기도가 행해질 수 있다. 기도는 몇 시간 지속될 수도 있으나, 아무도 지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또한 성령에 의해 움직이는 대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주 신나는 경험이었다. 하늘이 가까이 이르러 오고 병든 자가 치유되며, 기적이 행해지고 심지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다. 이러한 기도를 시도하라. 당신은 결코 다른 방식으로의 그룹 기도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어떤 종파나 교회 그룹의 신도들을 떠나기 위해 삶의 방식을 변경할 때, 그 감정적 영향으로 마치 이혼한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예전의 형제들의 반응과 혼자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할지에 대한 외로움과 불확실성이 결합되어, 마치 정죄를 당하는 것처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바벨론을 떠나는 자를 낙담시키기 위한 사탄의 노력들이다. 부정적인 감정들로 채움으로써, 사탄은 그 사람의 결심을 흔들어서, 그 또는 그녀로 하여금 익숙한 것으로 – 바벨론으로 돌아오라고 압력을 가한다.
당신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보증과 당신의 예배를 그분께서 받으신다는 보증 안에서 안식하라.
그러므로 이제 [야후슈아 구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 . . [야후와]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 . . [야후와]를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1, 27, 28)
야후와의 목적은 온 세상에 흩어져 있는 신도들로 하여금, 홀로이든 작은 규모의 그룹으로든, 고난과 다른 사람들에 의한 정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거룩한 날에 그분께 예배 드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목적에 따라 당신을 부르신 그분께서 또한 당신을 받아들이실 것임을 믿으며 충만한 믿음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라. 그 대가가 어떠하든지, 바벨론으로부터 나아와 당신의 구주를 따르라는 초청에 당신이 순종할 때, 당신은 당신의 구속주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당신의 예배는 그분께 가납된다.
그런즉 이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야후와]께서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누가 야후와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무슨 일로 고소하리요? 의롭다 하시는 분은 야후와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야후슈아시요,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분이시니, 그분께서는 바로 야후와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누가 우리를 야후슈아의 사랑에서 떼어 놓으리요? 환난이나 곤경이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벌거벗음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아니라! 이 모든 것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분을 통해 정복자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야후슈아 우리 주 안에 있는 야후와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로마서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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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J. I. Packer
3 E. G. 화잇, In Heavenly Places, p. 92.
4 E. G. 화잇, Our High Calling, p. 168.
5 E. G. 화잇, 정로의 계단, p.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