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세대는 특별하다. 이 세대는 가장 좋지 않다. 회개하는 모든 자는 이전에 제시되었던 어떤 상급보다 훨씬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 이 상급을 받기 위해, 회개하는 라오디게아인들이 형제간의 사랑이 있는 ‘교회’ 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
엄마는 놀라셨다. 엄마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라고 가르치지 않았었다!
나는 15 살이었고 기숙학교 방학 기간이라 집에 머물고 있었다. 나의 룸메이트가 나와 함께 집에 왔고 엄마는 내가 빈정댐이라는 새로운 언어 기술을 배웠다는 것을 알아챘다.
오늘날—영국과 같은—일부 문화권에서, 빈정댐은 유머의 한 형태로 인식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당신의 말을 재미있게 만드는 방법이다.하!하! 하! 엄청 웃긴걸, 어이 친구. 이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빈정댐은, 직설적인 의도가 아니라면, 무례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빈정댐은 “자르거나 고통을 주기 위해 설계된 날카롭고 종종 풍자적이거나 반어적인 말이다.”1 예의 바르게 잘 성장한 자녀의 입에서 그러한 말을 듣고 싶어하는 어머니는 없다.
엄마는 나에게 조언하기 위해 한 쪽으로 나를 이끌고 가서, 가능한 온유하게 말씀하셨다, “때때로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이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 채 어떤 습관에 빠지곤 한단다. 나는 네가 일부러 무례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너의 룸메이트에게 매우 비꼬는 투로 말하는 습관에 빠져서 그런 투로 말하는 것 같구나. 그것은 네가 계속하기 원하는 그런 것은 아닐거야. 만약 계속 그렇게 말한다면, 너희 둘은 마음이 상해서 멀어지게 될 거란다.”
난 놀랐다. 엄마가 그것을 지적해주기 전에는, 난 (나의 룸메이트를 희생시키는) 나의 “위트” 가 얼마나 고통을 주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는 즉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멈추었다. 나는 다른 이를 괴롭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비록 그 비평이 “건설적” 이거나 온전히 합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비난 당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나, 때때로 메시지가 그저 너무도 중요하여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거두지 않곤 한다. 때때로 말은 그대로 선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소리 높여 말하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너무도 재앙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야후슈아의 메시지가 요한계시록 2-3 장에서 일곱 교회에 선포된 배경이다.
훈련을 받으라 …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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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마지막 때까지의 크리스챤들에게 격려, 지도, 경고를 제공한다.
http://www.bible-history.com/maps/Map-7-Churches-of-Revelation-Asia.jpg |
요한계시록은 소아시아에 있었다고 알려진 문자 그대로의 일곱 교회들을 위한 메시지로 시작된다. 이 메시지들은 초기 기독교인들을 격려하고, 축복하고, 경고하기 위해 주어졌다. 또한, 성경 학자들은 이 메시지들을 기독교 시대의 다양한 세대에 연결 지어왔다. 그 메시지 대부분은 좀더 주의해야 할 부분들에 대한 경고와 지도뿐만 아니라 신실함에 대한 칭찬도 포함한다.
필라델피아 (여섯째 교회) 와 라오디게아 (일곱째 교회) 를 향한 메시지는 오늘날 크리스챤들에게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들이 마지막 세대를 위해 의도되었기 때문이다. 필라델피아가 받은 메시지에는 정정이나 책망이 없다는 것 또한 특이하다. 그들은 빛나는 신실함으로 인해 오직 칭찬만을 받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라오디게아는 칭찬을 전혀 받지 못했다. 그들의 영적 상태는 너무도 개탄스러워서,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에게 닥칠 위험과 그들의 두려운 상황에 대해 그들을 일깨우기 위한 필사적인 시도로서 가장 직설적인 비평만이 주어졌다.
비난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가장 온화하고 부드럽게 말하는 부모조차도 그들의 자녀가 임박한 위험에 처했을 때는 경고의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라오디게아를 향한 메시지다. 그것은 구주로부터 흘러나오는, 깨어있으라 는 필사적이고 비통한 외침이다. 위험이 가까이에 있다!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 모두를 연구함을 통해 가치 있는 교훈과 격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필라델피아와 라오디게아를 향한 메시지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 메시지들은 오늘날의 신자들을 위한 하늘의—초청이자—경고다.
형제간의 사랑이 있는 교회
필라델피아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니 그가 열면 아무도 닫지 못하고 그가 닫으면 아무도 열지 못하느니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보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아무도 그것을 닫지 못하리라. 네가 적은 힘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부인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사탄의 회당에 속한 자들 곧 스스로 유대인이라 하나 유대인이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있는데, 보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발 앞에 경배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 줄을 알게 하리라.
네가 나의 인내의 말을 지켰은즉 나도 너를 지켜 시험의 시간을 면하게 하리니 그것은 곧 앞으로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시간이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그것을 굳게 붙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가 내 하나님/데오스2 의 성전에서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다시는 나가지 아니하리라. 또 내가 내 하나님/데오스 의 이름과 내 하나님/데오스 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데오스 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 위에 기록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요한계시록 3:7-13)
필라델피아의 교회를 향한 메시지는 그 도시의 역사와 사실들을 알게 될 때 생생해진다. 필라델피아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에 위치에 있었다. 로마로 향하는 황제의 길이 그 도시를 관통했다. 그리하여, 옛 이스라엘 나라처럼, 그 도시는 복음을 전하기 좋은 위치에 있었다. 왜냐하면 대상들이 그곳을 통과하며 남으로는 아프리카까지 북으로는 유럽까지 여행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의 이 지역은 지진에 취약하다. 사실, 한 지진이 서기 17 년에 필라델피아를 황폐화시켰다. 이 지진으로, 독특하고 많이 앞선 건축 기술이 사용되어 가장 심한 지진에도 견딜 수 있는 방식으로 성전들이 지어졌다.
야후와의 전에 있는 기둥
[그 전의] 기초가 플리스 양모로 덮인 목탄 상 위에 놓여졌다. 그것은 뗏목처럼 표토 위에 “뜨는” 구조를 만들어줬다. 각 블록은 지네철로 서로 연결되어 그 플랫폼은 결속되어있다.
그 성전은 그 도시에서 가장 안전한 구조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야후와] 의 성전에 기둥이 된다는 약속은 안전과 보장이 되었다. 새겨진 기둥들이 에게 해 터키 도처에서 발견된다. 극적인 한 예가 유로모스에 있는 제우스의 신전으로 열한 개의 스탠딩 기둥 중 열 개에 헌정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기는 인간 “기둥들” 위에 그분의 새로운 이름 뿐만 아니라 신성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고 [야후슈아께서 약속하셨다].3
여전히 서 있는 고대 필라델피아 기둥
Image credit: https://www.etbu.edu/php/theintersection/livingintheshadow/
마지막 세대는 세상이 깜짝 놀랄 사건들 속에서도 신실하게 남아 있으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들의 충성이 시험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믿음이 전에 겪은 바 없는 정도의 수준으로 시험을 받을 것이다. 견고하게 남아 있는 자들이 야후와의 성전에서 “기둥” 이 되는 영예를 얻을 것이다. 영원에 걸쳐, 야후와께서 선하시다는 증거의 무게가 그들의 증언 위에 머물 것이다.
새로운 이름
필라델피아는 실제로 일 세기에 두 번에 걸쳐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처음에는 네오카이사랴, 즉 “새로운 카이사르 마을” 로 변경되었다. 이는 서기 17 년의 큰 지진에 이은 것이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지진 후에 복구 자금을 관대하게 지원했고 그의 후원에 대한 감사로 그 이름이 변경되었다. 두번째 이름 변경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또 다른 재앙 후에 경제적 지원을 보냈을 때 이루어졌다.
두 번의 이름 변경 모두 후원을 한 사람에게 감사를 나타내고 그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필라델피아의 교회에 주어진 상 중 하나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다. 지구 마지막 역사 속에서도 야후와께 충성되게 남는 자들은 영원에 걸쳐 신성의 정부의 선함과 공의에 대한 산 증인이 될 것이다. 그들은 야후와의 이름과 거룩한 예루살렘이 그들 위에 기록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필라델피아의 교회는 적절하게 이름이 붙여졌다. 모든 교회들 중에서, 그들이 야후와를 가장 영화롭게 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의 삶에서, 필라델피아의 교회는 구주의 삶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한 율법사가 야후슈아께 물었다, “주여,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크니이까?” (마태복음 22:36), 야후슈아께서 속히 대답하셨다: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야후와 네 엘로아를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달려 있느니라.” (마태복음 22:37-40)
사랑. 사랑은 야후와의 통치의 기초다. 사랑은 그분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그분의 특성이다. 요한은 기록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요한일서 4:7-8) 이것에서, 필라델피아인들은 다른 어떤 교회와도 비할 수 없을 만큼, 하늘의 빛으로 빛난다. 사실, “필라델피아” 라는 단어 자체가 “형제간의 사랑” 을 의미한다. 그들은 형제간의 사랑을 가진 교회다. 그들은 많이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용서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교회도 이루지 못한 수준으로 야후슈아의 형상을 반영케 한다.
고대 필라델피아 원형 경기장
Image credit: By Ken and Nyetta [CC BY 2.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2.0)], via Wikimedia Commons
라오디게아의 교회
라오디게아 사람들의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아멘이요, 신실하고 진실한 증인이요, 야후와의 창조를 시작한 이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므로 내가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리니
이는 네가 이르기를, ‘나는 부자라. 내가 재산을 불렸으니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하면서 네 비참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내가 네게 권고하노니 너는 내게서 불로 정제한 금을 사서 부유한 자가 되고 또 흰옷을 사서 입어 네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지 말며 또 네 눈에 안약을 발라 볼지니라.
내가 사랑하는 자들을 다 책망하고 징계하노니 그런즉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보라, 내가 문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으리라.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요한계시록 3:14-21)
라오디게아 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와 대조적이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전혀 받지 못했다. 라오디게아인들의 영적 상태가 정말로 개탄스러워서 비난 외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터키, 프리지아, 리쿠스에 있는 라오디게아
Image credit: By Carole Raddato from FRANKFURT, Germany [CC BY-SA 2.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 via Wikimedia Commons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예언에서, 이사야는 선포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고 판단의 공의를 베풀어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 42:3) 야후슈아께서는 다른 이들을 격려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분의 말씀은 마르고 먼지 많은 땅에서의 시원한 냉수와 같았다. 그분은 언제나 다른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말로 그들을 세우기 위해 그 길을 가셨다. 라오디게아를 향한 그분의 메시지에 비난밖에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처한 위험을 밝혀준다. 트럭 앞을 달려가는 자녀를 막기 위해 “멈춰!” 라고 소리치는 엄마처럼, 라오디게아에 대한 야후슈아의 혹독한 책망은 그들을 깨우고 임박한 재난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의도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하다고 알려져 있다. 역사적 필라델피아와 같이, 라오디게아라는 역사적 도시는 마지막 세대에 관한 흥미로운 것들을 밝혀준다: [라오디게아] 의 육 마일 북쪽으로 히에라폴리스에 (마실 수는 없는) 온천이 있었으며, 그 흰색 석회질의 절벽들은 멀리서도 보였다. 마실 물을 얻기 위해, 로마인들은 북쪽으로 오 마일 떨어진 곳의, 물이 풍부한 곳까지 이어지는 수로를 건설했다… 그 물이 수로를 통해 그 도시까지 오면서 차가웠던 샘물은 미지근해졌다. 그 도시는 무역과 상업을 위해 전략적으로 위치한 것이었고, 은행업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도시는 초기의 지진들 후에 로마로부터 지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을 황폐화시킨 60 의 지진 후, 오직 라오디게아만 로마의 경제적 지원을 거절했다. 왜냐하면 라오디게아는 매우 부유했기 때문이다. “나는 부유하다” 라는 물질적 자아 만족 태도가 교회에도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교회의 영적 눈 멂이 역설적이었다. 왜냐하면 눈 병을 치료하는 유명한 안약이 그곳의 의술 학교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끄러운 벌거벗음을 덮어줄 흰 옷을 사라는 권고는 역설의 또 다른 예이다. 이는 그 지역의 유명한 블랙 양털을 이용한 옷을 만들기 위해 로마인들이 직물 공장들을 세웠던 도시에 그 신자들이 살았었기 때문이다. |
증가한 빛 = 더욱 안주하게 됨
라오디게아 교회는 모든 마지막-세대 기독교계를 나타낸다. 십육 세기의 개신교 개혁 운동 이후,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빛이 증가하여왔다. 개신교 내의 모든 교회는 암흑 시대 동안 크리스챤들이 가졌던 것보다 더 전진된 진리로 복을 받아왔다. 심지어 로마 카톨릭 조차, 전통에 대한 그들의 모든 집착에도 불구하고, 마틴 루터 전에 가졌던 것보다 지금은 더 많은 빛을 가지고 있다.4
그러나, 빛은 증가했으나 헌신과 신실함이 증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의 증가와 함께 현실에 안주하게 되었다. 영적 교만. 영적 우월함에 대한 자아도취. 이러한 영적 상태는 참 증언에 거리낌을 유발한다.
라오디게아인들은 “말은” 매우 잘하지만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말은 “뜨겁지만”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그들의 행위는 “차다”. 그들은 야후슈아의 품성과 그분의 형상을 나타냄에 있어서 실패한다.
라오디게아인들은 오늘날 자신들이 과거의 기독교인들보다 훨씬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내세우며, 그로 인해 우월함을 갖는다. 그들은 심지어 자신들이 라오디게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도 한다. 라오디게아의 상태와 오늘날의 크리스챤들이 얼마나 미지근한지에 대한 설교가 종종 선포된다. 사람들은 의자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들이 미지근하다는 것에 동의하고, 바로 이러한 인정을 통해, 라오디게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들이 더 낫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거의 희망이 없는 상태다. 라오디게아인들은 “비참하며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 멀고 벌거벗” 었지만, 라오디게아인이 되었다는 것을 입술로 인정하는 바로 그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생각으로 자신들이 “부유하며, 재산을 불렸고,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고 시인하는 꼴이 된다.
진실은, 라오디게아의 교회가 오늘날의 모든 크리스챤 교회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단 하나의 교회나 교단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모든 교회와 모든 개인이 라오디게아인이다. 왜냐하면 예외 없이 오늘날의 모든 개별 종파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에 만족하며 더욱 전진된 빛으로 나아가거나 그것을 수용하기를 즐겨 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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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은 이교 축제일을 올바르게 거절하고 야후와에 대한 직함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야후와의 참 절기 와 그분의 진짜 이름 을 수용하는 것은 거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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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교는 건강에 신경을 쓰며, 절제 있는 생활을 하지만, 일요일에 예배 드리는 것을 포함하여 많은 오류들을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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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 제칠일 침례파,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수 백 종류의 교단들은 창조주께서 여전히 일곱째 날 안식일에 예배 받기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지식으로 축복을 받아왔지만, 참 일곱째 날 안식일 이 계산될 수 있는 유일한 날짜 계산법은 거절해왔다!
오늘날 모든 크리스챤 종파들은 라오디게아인들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어떤 한 부분 혹은 다른 어떤 부분에서, 오늘날 하늘이 이 세상에 비취고 있는, 증가하는 빛과 함께 전진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 증언의 초청이 오늘날 모든 크리스챤에게 해당된다.
신성의 치유법
라오디게아는 교회들 중 최악이지만, 구주께서는 그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고 동정하신다. 그분의 사랑의 마음은 그들을 갈망하고 모두가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 그분께서 위로의 메시지를 주신다: “내가 사랑하기에, 책망하고 훈계하노니, 그러므로 열심을 내고 회개하라.” (요한계시록 3:19)
구주께서는 라오디게아인들이 회개하고 변화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기꺼이 베푸시려 하며 모든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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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 불로 연단된 것 (이것은 구주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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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이것은 구주의 의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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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약 (이것은 마지막 날들의 사탄적 기만과 유혹을 이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영적 분별력이다.)
당신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께서 공급하실 것이다! 이러한 은사들과 함께,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절망적으로 궁핍한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구속될 만한 자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참 증언의 조언에 주의하며 회개하는 자들은 기적적인 변화를 경험한다. 자기 만족, 영적 교만을 회개하는 라오디게아인은 라오디게아를 떠나고, 야후슈아의 형상을 가장 완벽하게 반사하는 교회, 필라델피아의 구성원이 된다.
라오디게아를 떠나고 필라델피아와 연합하는 행동은 마지막 세대를 구별되게 만든다. 어떤 다른 그룹도 이 정도의 수준으로 친구, 가족과의 유대 관계와 그들의 영적 유산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요청을 받은 바 없었다. 요한계시록 18 장은 “그녀에게서 나오라, 나의 백성아!” (요한계시록 18:4) 라는 명령을 제시한다. 회개하는 모든 라오디게아인은 순종할 것이다.
신실함에 대한 보상
오늘날 모든 종교적 조직은 라오디게아이다. 그들 모두는, 어떤 부분이나 혹 다른 부분에서, 전진하는 빛을 거절해왔다. 참 증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이전의 어떤 그룹도 행한 바 없었던 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당신의 온 삶을 바쳐온 교회나 교단으로부터 나오는 일일지라도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신자들에 속하길 원하며 동의를 원한다. 그들은 진리를 위해 홀로 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오직 소수의 남은 무리가 진리를 위해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행하는 자에게 임할 상급은 상상할 수 없이 크다!
사도 바울은 기록했다: “이것은 기록된바, 야후와께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였도다, 함과 같으니라.” (고린도전서 2:9) 이 약속은 구속 받는 모든 자를 위해 성취될 것이지만, 특별히 라오디게아를 떠나고, 형제간의 사랑이 있는 교회에 연합하며, 야후슈아의 형상으로 변화를 받는 남은 자손을 위해 성취될 것이다.
라오디게아의 교회는 일곱째 교회이며 참 증언에 순종하고 회개할 자들에게 일곱 보상들이 주어질 것이다.
각 교회는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그들 자신의 특별한 보상이 있지만, 회개하는 라오디게아인들에게 제공되는 보상은 그 모두를 능가한다. 회개하는 라오디게아인이 여섯째 교회, 필라델피아에 연합할 때, 필라델피아의 이긴 자들에게 주어질 여섯 보상들이 그의 것이다. 그 보상은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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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인정하며, 사탄의 회가 이긴 자들의 발 앞에서 경배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3: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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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에 임할, 시험의 때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요한계시록 3: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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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의 성전 기둥이 되어 다시는 떠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3: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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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와의 이름이 그 위에 기록된다. (요한계시록 3: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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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그 위에 기록된다. (요한계시록 3: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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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후슈아의 새 이름이 그 위에 기록되며, 그가 야후슈아의 가족임을 나타낸다. (요한계시록 3:12 참조)
자신을 낮추고 그들의 상태를 완벽하게 나타내는 라오디게아에 대한 책망을, 비록 그들이 그것을 그들 스스로 볼 수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한 가지 상급이 더 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나와 함께 내 왕좌에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 (요한계시록 3:21)
이와 같이 마지막인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인 자가 마지막이 되리니 부름 받은 자는 많으나 선정된 자는 적으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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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놀라운 상급인가! 구주와 함께 왕권의 지위를 공유한다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먼저 온 자들과 크게 비교되는 11 시 일꾼에게 보상한 농부의 비유에서, 야후슈아께서 설명하셨다: “이와 같이 마지막인 자가 처음이 되고 처음인 자가 마지막이 되리니 부름 받은 자는 많으나 선정된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0:16) 어떤 의미에서, 마지막 세대는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더욱 야후와를 영화롭게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마지막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담으로부터 가장 먼 세대다. 그들은 육 천 년 동안 축적된 악의 성향을 물려 받았지만 구주를 믿는 믿음을 통해 온전히 순종하고 이기는 자가 되었다.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더욱, 신성의 변화시키는 능력과 구속의 사랑이 그들의 삶과 그들의 구원을 통해 보여진다.
마지막 세대, 라오디게아인들은 지난 6,000 년 동안 축적된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점은 그들을 이전 어느 세대와도 같지 않은 영적 교만에 빠지게 했다. 그들의 경우는 거의 희망이 없지만 … 야후슈아와 함께라면, 언제나 희망은 있다. 그분의 능력, 그분의 권능, 그분의 사랑에 의해, 그들이 무지 중에 묶여 있던 오류를 나타내며, 회개하는 자들에게는 더 큰 빛이 주어졌다. 라오디게아로부터 이긴 자들은 스스로를 낮추고 회개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전 어느 세대도 할 수 없었던 수준으로, 야후와의 율법에 대적하는 사탄의 고소를 침묵시킨다.
일곱째 교회의 회개하는 자들은 마지막 남은 자손으로부터 나온 소수의 남은 무리다. 그들은 이전의 어떤 그룹의 이긴 자들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상급을 받는다. 필라델피아인들에게 주어진 여섯 보상들에 더하여, 그들은 야후슈아와 함께하는 왕권의 지위를 받는다. 이것은, 마지막이자, 가장 나쁜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연약함, 눈 멂, 물려 받은 부패 속에서도, 구주로 향하고, 그분을 믿음을 통해 그분의 율법을 지키고 구속 받고 성화되었기 때문이다.
라오디게아인들은, 마리아처럼, 많이 사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많이 용서 받았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7:36-50 참조) 그들은 이전 어느 세대보다 더욱, 그들을 이끄신 구속의 사랑의 깊이를 이해하고 영원한 시간에 걸쳐 그들의 입술의 노래는 아버지에게 영광이 되고 아들에게 감사가 될 것이다. 마지막 세대가 구주와 친히 함께 온 우주의 보좌에 앉는 것은 죄에 빠졌던 그들을 들어 올리신 신성의 사랑과 능력의 전례 없던 증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당신에게 제안되고 있는 미래다. 당신은 라오디게아인으로서, 당신의 진정한 상태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눈이 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거짓말하실 수 없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라.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라. 그런 후에, 믿음으로, 당신의 손을 뻗어 그분의 손을 잡으라.
그분께서 당신을 영접하기 위해 두 팔을 넓게 벌리고 기다리며 서 계신다. 그분께서 믿음의 금을 당신에게 부어주실 것이며, 그분 자신의 의로움으로 당신을 덮으시고, 치료하는 안약을 당신의 눈에 발라 주실 것이다. 야후슈아께서 당신 자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신다는 것을 신뢰하고 회개하며, 라오디게아의 철망으로부터 빠져 나오지 않겠는가? 오늘 필라델피아에 연합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진정한 영적 상태에 대한 선언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형제간의 사랑이 있는 교회, 필라델피아로 들어오는 자에게 영원한 기쁨, 행복과 말할 수 없는 존귀가 있을 것이다.
창조의 위대한 군주, 창조주이자 모든 것을 지탱하시는 분이시여, 우리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라오디게아에 대한 진단을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에 의해서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당신께 우리의 믿음을 증진시켜 달라고 간구합니다. 부디 우리에게 불로 연단된 금, 우리의 벌거벗음을 덮을 구주의 의로움의 흰 옷, 당신의 율법으로부터 놀라운 것들을 인식할 수 있는 신성의 안약을 주소서.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사 우리가 영원히 당신의 선하심, 당신의 자비, 당신의 능력, 그리고 사람의 자녀들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사랑과 친절에 대한 증인이 되게 하소서. 구주, 야후슈아의 이름으로 우리는 이것을 구합니다. 우리의 영혼을 당신의 보호 아래 두소서. 아멘. |

참고: “교회” 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원어, “에클레시아” 의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다. 신약에 걸쳐, 에클레시아는, 불러냄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 야후슈아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들은 타락한 바벨론과 조직화된 교단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자들이다. 바벨론을 떠나라는 외침이 들릴 때, 그 누구도 다시는 바벨론의 교회와 종교 형태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
1 Merriam-Webster Dictionary.
2 “하나님” 의 이름은, 물론, 야후와다. 그러나, 여기에서 “나의 하나님” 이라고 반복되는 문구는 의도적이다. 이것은 경배 받으실 분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 오직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바울이 매우 웅변적으로 설명한 바와 같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우리에게는 오직 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또 한 주 야후슈아 그리스도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전서 8:5-6)
4 마틴 루터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는가에 대한 신념 차이로 카톨릭으로부터 갈리어 나왔다. 마틴 루터는 그것은 오직 믿음을 통한 은혜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카톨릭은 구원이 선한 행실에 기초한다고 가르쳤다. 1999 년에, 로마 카톨릭과 루터교 세계 연맹은 “칭의 교리에 대한 공동 성명” 이라는 제목의 47 쪽 분량의 서류에 서명했다. 그 안에서, 그들은 그 정의를 결합시킴으로써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를 조화시켰다: “우리는 함께 고백한다: 은혜에 의해서만, 우리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가납되고,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며 선한 행실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고 준비시키는, 성령을 받는다.” http://www.vatican.va/roman_curia/pontifical_councils/chrstuni/documents/rc_pc_chrstuni_doc_31101999_cath-luth-annex_e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