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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이름은 놀랍다 | 파트 1 – 그분의 이름을 부르세요

사랑의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이 땅이 탄생했을 때, 그것은 완벽했었다. 모든 풀잎, 모든 꽃잎, 모든 피조물,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그것들을 만드신 분의 영광을 나타냈다. 모든 창조 중에서도 최고의 부분은 사람이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으로 우리의 모양에 따라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가축과 온 땅과 땅에서 기는 모든 기는 것을 지배하게 하자.” 하시고,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26, 27)

창조주의 바로 그 형상으로 만들어졌다! 이 땅에서 그러한 영예가 주어진 존재는 오직 사람뿐이었다.  전능하신 분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그 완벽한 존재는 천사들과 창조주 그분과 친히 교제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 거룩한 한 쌍은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는 자녀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또한 지도를 받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천사들에 의해 종종 방문을 받았으며, 그들을 만드신 분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었다.

율법과 자연의 기능이 그들의 놀란 마음에 열려 있었다.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까지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이 관찰되고 이해될 것이었다. 초원의 꽃들로부터 가장 큰 나무까지, 땅으로부터 하늘과 바다까지, 그분의 자녀들은 사랑으로 기록된 그들의 아버지의 이름을 인지할 것이었다.

선선한 저녁에 창조주께서 그 날의 일들에 관해 대화를 나누기 위해 그 거룩한 부부를 방문하셨고 함께 하는 즐거움을 나누셨다. 아담과 이브가 그 신성의 사랑의 율법에 충성하는 한, 그들은 계속적으로 새로운 통찰력과 새로운 지식을 얻으며, 창조주의 측량할 수 없고 다함이 없는 사랑을 더욱 더 명확하게 이해하며 행복의 신선한 원천들을 발견할 것이었다. 행복한 하루 하루가 지나가면서, 창조주께서 그 동산에 오셔서 그분의 자녀들을 당신께로 이끄셨다.

그런데 큰 비극이 발생했다: 죄가 들어왔다. 사탄이 이브를 유혹하기 위해 왔을 때, 그녀는 배고픈 상태가 아니었다.  그 시험은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창조주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유혹을 받았다.  사탄은 그녀를 만드신 분의 진실함을 의심하도록 그녀를 유혹했다.  사탄은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자리를 바라도록 그녀를 유혹했다. 그녀는 “신”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 – 그것은 사탄 자신이 타락하게 되었던 바로 그 유혹이었다. (이사야 14:12-14 참조)  그녀는 선과 악 둘 다를 “알게 되는” (또는 경험하게 되는) 그 자리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었으나 그 자리를 열망했다. 그분의 자녀들이 악을 경험하는 것은 아버지의 계획이 결코 아니었다.

아담과 이브가 죄를 선택한 그 날 이후로, 그들은 그들을 덮고 있었던 빛의 옷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고 그들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의 벌거벗음을 덮어 주던 것이 없어졌고, 그들은 그들을 부르는 창조주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들의 불순종을 변명하기 위해 두려움 속에 달아나 숨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당신의 음성을 듣고 벌거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하거늘,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가 벌거벗은 것을 누가 네게 알려 주었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네가 먹었느냐?” 하시니. (창세기 3:9-11)

그리하여 인류의 그 오래고 슬픈 죄의 역사가 시작된다. 전에 그들을 그분께로 이끌었던 모든 것들, 창조주의 사랑, 그분의 임재의 기쁨, 그분의 보호 아래에서의 신뢰와 확신이 두려움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더 이상 그분의 동행을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다.

하늘 아버지께서 아담과 이브를 버리지 않으셨으나, 그들의 미래가 고통과 슬픔, 고역과 비애의 삶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죄의 대가로 신성의 아들이 그들의 불순종을 속죄하기 위해 죽어야만 함을 설명하셨다.  그들은 그 아름다운 동산을 떠나야만 한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기쁨의 집인 에덴 동산에 계속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들은 앞으로 엄격하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들은 죄에 의해 그들의 본성 자체가 망가졌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들 자신의 선택에 의해 그들은 사탄에 저항할 그들의 힘을 감소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죄책감의 상태 때문에 그들의 온전함을 유지할 수 없었다.

슬픔 속에서, 그들은 이제 죄의 저주가 머무는 땅으로 나갔다. 모든 하늘은 아담과 이브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나, 창조주께서는 그들을 순결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 신성의 계획은 창조주와 그분의 자녀들 사이에 항구적인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신성의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들은 즉각적으로 그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하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보유하기를 갈망하지 않았다.  죄가 더욱 더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은 그들을 부르는 신성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창조주께서 제공하시는 사랑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간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사람들은 한 음성이 그들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계속 잊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에, 아담과 이브에게 태어난 셋에게 에노스라 이름하는 아들이 태어났다.  창세기 4:26절은 말한다: “셋에게도 아들이 태어나매 그가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더라.”

사람들이 사랑의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탄의 권세를 제한하고 선과 악 사이의 대쟁투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창조주께서 규칙을 부과하셨다.  어떤 사람이든지 하늘과 사탄 중에 자신이 접촉하기 원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먼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사탄도 하늘도 그 사람을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마귀들에 의한 끊임없는 괴롭힘으로부터 그분의 자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교전 규칙”이다.

성경의 곳곳에, 모든 사람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고 반복적으로 권고 받는다.

께 감사하라!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 . . .
그분의 모든 놀라운 일들을 말하지어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 . .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분께 드릴지어다 . . . .
역대상 16:8-10, 29

내가 고난과 슬픔을 만났도다.
그때에 내가 의 이름을 부르며 . . .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의 이름을 부르며
시편 116:3, 4, 13

를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을 부르라.
그분께서 행하신 일들을 백성 가운데 밝히 알리라.
그분의 이름이 높여졌음을 언급하라.
이사야 12:4

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내가 그분을 사랑하는도다. 내가 고난과 슬픔을 만났도다  . . . 그때에 내가 의 이름을 부르며 이르기를 . . . 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고 . . . 오 여, 진실로 나는 주의 종이요 . . . 내가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시편 116:1, 3-5, 16-17

다른 많은 구절들도 모든 사람에게 그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고 지시한다.

너희는 를 찬양하라.
너희는 주의 이름을 찬양하라.
오 주의 종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 . .
주께서는 선하시니
주를 찬양하라.
그분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노래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라.
시편 135:1, 3

내가 날마다 주를 찬송하며
영원무궁토록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시편 145:2

또 다른 구절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을 믿는 자들에게 “시온에서 주의 이름을, 예루살렘에서 그분의 찬양을 선포하라”고 권고한다. (시편 102:21)  또 영감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그 거룩한 이름을 신뢰할 수 있다고 선포한다: “우리가 네 구원을 기뻐하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들을 세울 것이라.” (시편 20:5)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장소이든, 심지어 생각이나 감정도 이름이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하다. 창조주 그분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불러야 할 당신의 이름을 가지고 계신다. 그분의 영으로, 신성의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가까이 계시고, 언제나 도와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다. 당신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기를, 그분께서는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께서는 응답하시기를 갈망하신다!

그러나 “주”는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며 그것은 신성의 이름을 위해 대체되어서는 안되었다. “주”와 “하나님”이라는 영어 단어는 단지 직함이며 마귀의 신들에게도 역시 적용될 수 있다!  “주”라는 단어는 단지 주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 단어 “야후와”로부터 왔다. 그 번역에 관하여:

일반적인 의미에서 신들; 최상의 하나님에 대해 . . . 특별히 사용된; 경우에 따라서 재판관들 또는 때때로 최상급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방법으로 적용되며; - 하나님, 신, 판사, 여신, 위대한, 능력 있는 . . . 통치자들, 심판자들, . . . (#430, The New Strong's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emphasis original.)

 “엘로힘”은 첫째 계명에서 사용된 단어이며 그것은 창조주와 거짓 신들 둘 다에게 적용된다. 킹제임스 버전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2, 3)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너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엘로힘이라. 내 앞에 어떤 다른 엘로힘도 두지 말라.” 엘로힘은 “신들”로 번역되는 복수형 단어다; 단수형으로는 “능력 있는”을 의미하는 이다. (Strong's #410 참조) 그리하여, 성경에서 사용될 때, 엘로힘은 아버지와 아들 둘 다에게 적용된다; 다시 말해, 엘로힘은 아버지와 아들을 위해 그분의 말씀으로 주어진 복수형 이름이다.

이교 신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는 단어나 직함을 사용하는 문제는 그 직함들에 힘이 없다는 것이다! 같은 단어가 많은 다른 사람들 (재판관들, 왕들, 선지자들, 남편들, 신들)에게 적용될 수 있을 때 그 직함들은 신성의 이름 뒤에 있는 권세와 사랑으로 그 믿음을 고무시키지 못한다. 온전한 믿음으로 하늘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알아야만한다!

신성의 이름이 “주”라는 직함 뒤에 감추어질 때 사탄은 기뻐한다. 그 이름이 직함들 뒤에 숨겨질 때, 그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으며 그리하여 그 이름을 지니신 그 사랑의 그분의 권세에 대한 합당한 믿음이 생기질 않는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그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가 응답을 받는다는 것을 밝혀준다.

folded hands resting on Bible고래의 배 속으로부터, 요나는 기도하며 부르짖었다. 사자들이 있는 굴에서, 다니엘은 하늘을 향해 기도했고 그는 보호를 받았다. 맹렬히 타는 불 속에서, 그 구덩이와 노예 생활과 박해 속에서, 창조주의 자녀들의 마음과 심령 속에서, 전 시대를 걸쳐 사람들은 그들이 그 신성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를 때 그들의 모든 환란으로부터 구원받았다. 이스라엘 나라의 역사에서 반복하여, 그 백성들은 죄 짓고 포로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고 그 신성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들은 해방되었고 구원받았다.

이 마지막 세대에, 전능하신 분의 진노의 큰 환란이 세상에 다가오는 이 마지막 때에, 그분의 백성들은 그 신성의 이름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분의 이름은 놀랍고 권능이 있으므로, 망령되거나 헛되이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도 여전히 모든 사람은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르도록 초청을 받고 있으며, 그렇게 하는 모든 자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거짓의 아비 사탄은 정체성을 도둑질하는 데에도 역시 도둑질의 아비라는 점을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 사탄은 스스로 창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는 일그러뜨리며 조작하고 거짓말한다.  사탄은 아버지를 자신의 악의 특성들로 채색하여, 창조주께 속한 것에 관여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사탄과의 전투에서 그분에게 도망하여 도움을 위해 불러야 할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게 된다.

창조주께만 속한 것을 도적질하고 찬탈한 사탄의 전투 방법이, 하늘로부터 그가 쫓겨 날 때 드러난 그의 교만에서 보여진다. 이 교만이 이사야에 기록되어 있다: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는가!  . . . 네가 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내가 하늘로 올라가 내가 [야후와]의 별들 위로 내 왕좌를 높이리라 . . . 내가 구름들이 있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와 같이 되리라.’ 하였도다. (이사야 14:12-14)

홍수가 세상을 깨끗하게 한 후에, 사탄은 재빠르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며 우상 숭배를 다시 확립했다. 심지어 노아와 셈이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마귀들을 경배했다. 아브라함의 때까지, 우상 숭배는 대다수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완전히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야후와께서 아브라함이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도록 거기서 나와 따로 있으라고 불러 내셨다.

이 기간 동안 사탄은 그의 마귀들을 그들의 신전에 둠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묶어 놓기 위해 노력했다. 부유한 자나 왕이 신전을 세우고 제사장들을 지정하고 예식에 따라, 어떤 특정한 이름으로 그 신전의 “가장 거룩한 곳” 그 내실에 사는 특정한 마귀를 초청할 수 있었다.  그 특정한 마귀-신을 섬기기 위해 지정된 제사장이 들어와서, 희생물들과 제물들을 드리고, 호의를 구하기 위해 그 신의 이름을 불렀다.  사람들은 그 제사장이 마귀에게 질문을 하고 마력적인 일들을 행하며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축복하고 다른 이들은 저주하도록 하게 하는 것에 대해 보수를 지불했다.

stone relief이것은 단순한 위장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 제사장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그 “신”에게 제물들을 바친 이유는 그것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사람들을 속이고 그의 기만들로 도취시키는 많은 방법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주술적 예배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다음에도 다시 오게 만드는, 많은 신비적인 것들과 매혹적인 의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마귀-신의 특정한 이름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는, 사람이 그 마귀와 접촉할 수 없다고 믿어졌다. 만일 적이 당신의 신의 이름을 배웠다면, 그는 더 큰 제물을 드리고 당신의 신으로 하여금 그의 편이 되어 당신을 파괴시킬 수 있었다. 이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비밀스럽게 보존하였다는 것을 의미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천 곳의 신전들에 거주하는, 수천의 이름들에 대답하는 수천의 신들이 있었다.

그 이름이 잘 숨겨질 수록, 그 힘은 더욱 잘 보존된다고 여겨졌다. 만약 한 신이 “알려지지 않은” 신이라도, 어떤 누구도 그가 이름이 없다고 여기지 않았다. 대신에, 그 이름이 그저 매우 깊숙이 숨겨진 것이라고 믿어졌다. 아레오파고스에서 아테네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바울은 창조주에 관해 설교하기 위해 그가 좋아하는 이 신념을 사용했다:

그때에 바울이 아레오파고스의 한가운데 서서 이르되, “너희 아테네 사람들아, 내가 알고 보니 너희가 모든 것에서 매우 종교적이도다. 내가 지나다니며 너희가 섬기는 것들을 보다가, 심지어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글이 있는 제단을 발견하였나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경배하는 그분 [야후와]를 내가 너희에게 밝히 알려 주리라.” (사도행전 17:22, 23)

그 신의 개별적인 이름으로 특정한 그 신에게 기도해야 할 필요성은 고대 세계에 걸쳐 매우 잘 이해되던 개념이었다.

고대 세계에 있어, 사람의 이름을 알 때, 그 사람을 이길 힘이 그에게 주어진다고 믿어졌다.  이교 “신들”의 특성과 속성들에 대한 지식은, 그들이 그 신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 예배자들로 하여금 그 신들을 조종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되었다. 그 정도로, 이라는 용어의 모호함은 그 신에 대한 어떠한 권세를 얻기 원했던 사람들을 좌절시켰다. 그 이름이 그 신의 특성에 대해 거의 또는 전혀 암시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나안의 최고 신,의 어떤 특정한 면에 있어서는 사실이다. 고대 셈족은 신들에 의해 행해지는 높은 권능들을 몹시도 두려워했고 따라서 그들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을 그 현상과 거대한 권능의 사용과 연관 지었다.1   

그 신에 접근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직함은 그것이 효과가 없기 때문에 사용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신의 이름은 감추고, 다른 신들의 감추어진 이름들은 가능한 한 많이 알아내려고 계속적으로 노력하였다.  이스라엘 나라의 노예 시대까지, 이집트는 2000개가 넘는 신들의 이름을 갖고 있었고 그러한 신들의 일부는 수백 개의 이름들을 갖고 있었다.  그 제사장들은 그 신들의 비밀스런 이름들에 대한 지식을 열심히 지켰다. 왜냐하면 이 지식은 그들에게 그 신들을 다룰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신이 그의 개인적인 이름으로 불려질 때, 그는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Egyptian hieroglyphics어떠한 이집트인도, 자연적이든지 초자연적이든지, 그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피할 수 없다 . . . 이집트의 마술에서 . . . 이 가능성의 사용에 거의 전적으로 기초한다. 그 제사장-마술사는 그의 모든 지식과 힘을 그 이름의 정확한 구조를 ‘아는데’ (rokhu) 쏟아 붓는다 . . .  [그 불려지는 이름의] 모든 요소들을 정확하게 재생해 내는 그 마술 구호 (khrou)가 그것을 소유한 그 제사장-마술사에게 그 영혼이 담긴 이름의 온전한 소유권을 제공한다. 그들의 필수적인 실체를 끌어들이는 그 저항할 수 없는 부름에 모든 존재들은,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반드시 응답해야 한다.   . . . 명하여지거나 불러 들여지고, 그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던 그 사람은, 그 이름을 비밀스럽게 간직해야 한다. 가장 낮은 영으로부터 가장 권세 있는 신들에 이르기까지, 각자는 어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스런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그것을 열심히 간수해야 한다. 그 문장이 말하듯이 ‘그의 이름에 의해서 그가 숨을 쉬기’ 때문이다.2

어떤 이집트 신들은 다수의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상위 358 이집트 신들의 이름들 중에서, 다음은 “A”로 시작하는 신들의 이름들만 나열한 것이다:

Aa, Aah, Aapep, Abtu, Ah, Ahemait, Ahti(2), Ailuros, Aken, Aker, Amathaunta, Amaunet, Amemait, Amen, Amen Ra, Amen Re, Amenhotep, Ament, Amentet, Amentit, Ammam, Ammit, Ammon, Ammon Ra, Ammon Re, Ammut, Amn, Amon, Amon Ra, Amon Re, Amsit, Amun, Amun Ra, Amun Re, Anat, Andjety, Anedjti, Anet, Anezti, Anhur, Anit, Ankh, Ankhet, Ankt, Anouke, Anpu, Anti, Anubis, Anuket, Apademak, Apedemak, Apep, Apepi, Apet, Apis, Apophis, Aptet, Arensnuphis, Ari Hes Nefer, Arsnuphis, Aset, Aten, Aten Ra, Aten Re, Aton, Aton Ra, Aton Re, Atum, Atum Ra, Atum Re,

사탄이 거짓말로는 완벽하게 파멸시킬 수 없는 것을, 오해시키거나 강조점을 잘못된 곳에 둠으로써 비틀고 망쳐 놓는다.  모든 사람이 그분의 개인적인 이름을 부름으로써 특정하게 그분께 그들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이 옳은 반면에, 이름 자체가 마력이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이교도들이 함정에 빠지는 부분이다: 이름들이 마력적 권능을 지니고 있다는 신념.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의 개별적인 이름을 알아야 하는 중요한 모든 이유는 그분들의 이름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그 탄원자의 마음 안에 믿음을 북돋우어 주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고자 하는 그분의 적극적 의향에 대한 믿음, 그분의 약속들에 대한 확신이 신성의 능력을 이끌어 내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잘 알려진 한 작가는, “기도는 무한하신 분의 한계가 없는 자원들이 보관되어 있는, 하늘의 저장 창고를 열기 위한 믿음의 손 안에 있는 열쇠다.”라고 기록했다.3  기도가 응답되기 전에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명확한 조건들이 있다: 회개, 순종, 자신에게 신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깨달음. “우리에게 크게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한 가장 웅변적인 주장과 탄원들이다. 그러나 . . . 우리를 위하여 이러한 것들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고 구해야 한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그것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4

믿음이 기도 응답을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능력이 그 탄원자의 마음 안에 있는 믿음의 수준에 맞게 역사하여 그 탄원들에 응답하실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연결 지으셨다. 로마 백부장의 믿음의 수준에 놀라시고 감탄하신 후에,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에서 이렇게 큰 믿음은 내가 결코 보지 못하였노라.” 마태복음 8:10) 구주께서는 그 백부장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네 길로 가라. 네가 믿은 그대로 네게 이루어질지어다.” (마태복음 8:13)

이 원칙은 후에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녀의 딸을 치료해달라고 간청했을 때 다시 확인되었다.  “자녀들의 빵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느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옳습니다”라고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작은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마태복음 15:21-28 참조) 이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구주께서는 기뻐하시며 말씀하셨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가 원하는 대로 그 일이 네게 이루어질지어다.” (28절)

여기에서 창조주의 개별적인 이름을 아는 것의 중요성이 보여진다.  그분의 이름은 그분의 능력, 그분의 역할과 그분의 품성을 나타낸다. 우리가 이것을 알 때, 다른 모든 신들은 잊혀진다. 남는 것은, 마치 세상에 다른 사람은 없는 것처럼 그분의 자녀들을 일일이 사랑하시는 하늘과 땅의 창조주, 오직 참되신 엘로아 한 분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야후와]를 사랑하면 그분께서도 바로 그 사람을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그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엘로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들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어 (신들도 많고 주들도 많으나) 우리에게는 오직 한 엘로아 곧 아버지 야후와가 계시나니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분 안에 있노라 . . . 또한 한 분 [구주],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고린도전서 8:3-6)

woman praying이것은 이 땅 역사의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는 모든 자들에게 매우 중대한 지식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날들은 어둡고 두렵게 보인다. 이 죄 많은 땅 위에 자비가 섞이지 않고 부어질 야후와의 진노인 일곱 마지막 재앙들이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에, 야후와의 백성들이 적들로부터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죄로부터 구원해 줄 그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라.  사탄이 마귀들을 위해 도용하고 있는 직함들과 용어들을 제쳐 놓으라.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특별하게 부르라.  사랑으로 주어진 그 약속들을 당신의 믿음으로 붙잡으라. 엘리야와 모세의 기별이 시대를 걸쳐 오늘날까지 울려 퍼진다: 누가 야후와의 편에 있는가? 바알이 당신의 신이면, 그를 섬기라; 그러나 야후와가 창조주라면, 회개와 겸손과 순종과 믿음으로 그분을 섬기라.

당신의 믿음에 따라 당신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infant나는 아직도 나의 아들이 나를 “엄마”라고 부른 그 날을 기억한다. 나의 첫 아이와 함께 한 그 새로운 경험들은 소중했다. 실제로, 그 아이는 나를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었다. 그것은 어엄마아에 더 가까웠다!  상관 없다! 그 아이가 낮잠을 잔 후 내가 그 아이를 안으려고 다가 갈 때, 그 아이의 조그만 얼굴이 행복에 가득 찬 모습으로, 작은 팔을 흔들며, 가장 달콤한 소리로 “어엄마아!”라고 소리 내는 것을 나는 들었었다.

그것이 완벽하게 말하여지진 않았지만, 그것은 나의 귀에 음악이었다. 그것은 그의 작은 마음이 나를 엄마로 인식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것이 창조주와의 진정한 기도의 관계에서 경험되는 것이다. 창조주의 개인적인 참 이름을 아는 것은 큰 가치가 있다 . . . 그러나 그것은 그분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다. 사랑의 부모들 중 누구도 자신의 어린 아이가 “아빠”라고 부르지 않고 “아아빠아”라고 밖에 부르지 못한다고 해서 그 아이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다. 사랑의 부모들 중 누구도 자신의 아이가 요구 사항들을 말하면서 “꼭 그렇게요”라며 손을 잡지 않는다거나 특정한 어떤 방식으로 서 있지 않는다고 해서, 듣거나 도와주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하늘 아버지도 이와 같으시다.  그분께서는 우리 모두가 불러야 할 개인적인 이름을 갖고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신다. 어떤 언어들은 다른 언어들이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람이 아이 때부터 그러한 소리를 내는 것을 배우지 않았다면 낼 수 없는 소리들을 지니고 있다. 익숙하지 않은 소리들을 발음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의 어머니는 영어를 말하는 가정에서 자랐는데, 아주 어렸을 때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녀는 그녀의 혀로 어떤 특정 소리들을 낼 수 있었는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소리를 똑 같이 따라 할 수 없었다.

부모들 중 또한 그 누구라도, 어떤 사람이 그 이름을 완벽하게 발음할 수 없거나 조금 틀린 발음으로 발음할 수 밖에 없는 경우라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어떤 사람에게 응답하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나에게 프랑스계 캐나다인 친구가 한 명 있다.  우리에게는 새커리라 이름하는 오랜 친구가 하나 있다. 나의 프랑스계 캐나다인 친구는 한번도 그의 이름을 발음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프랑스어에는 부드러운 “th” 발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장 비슷하게 낼 수 있던 소리는 재커리였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그의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다고 해서 그녀를 무시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라(Ra)첼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은 그녀의 이름을 “라(La)첼”이라 부르는 중국 출신의 어떤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중국어에 “r” 소리가 없다는 것을 이해한 것이다.

 “[야후와]께서는 내가 말하려고 분투하고 있을 때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일반적인 경우에서의 관심보다 더욱 귀 기울이실 만큼 충분히 신경 써 주신다. 그분께서는 나의 서툰 단어들을 친히 번역하시고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 들으신다. 그분께서 나의 한숨을 들으시고 그 불확실한 말들을 훌륭한 산문과 같이 들으신다.”5

천사들이 신성의 이름을 부르는 그 정확한 방식으로 발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름의 의미를 아는 것이다. 오직 그 이름의 의미가 이해될 때에만, 우리는 그 이름을 지니신 분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완전하게 행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개인적인 이름을 아는 것의 중요성이 그것의 중요성 안에서 보여진다.

신성의 이름이 온전하게 이해될 때, 그것은 약속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 약속 자체가 모든 자에게 그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 창조주를 부르도록 고무시킬 것이다. 확실한 직함들이 전능자를 부를 때 사용하기에 받아들여질 만하다. 구주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 전능하신 분을 부르라고 격려해오셨다. 야후와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강하게 하기 위해, 구주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라고 가르치셨다. 그 직함은 사람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애정들과 가장 깊은 사랑으로 휘감긴 것이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야후와를 우리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영광을 주셨다.

그분께 들려졌으며 그분으로부터 나온 이 이름은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신뢰의 표징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관심과 관계에 대한 서약이다. 그분의 호의와 축복을 구할 때 말하게 되는, 이것은 그분의 귀에 음악과 같다. 우리가 그분을 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주제 넘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그분께서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하셨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그 명칭 [이름]에 익숙해지게 되기를 바라신다. . . . [야후와]께서 우리를 그분의 자녀로 여기신다. 그분께서는 이 부주의한 세상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하늘 왕의 아들과 딸, 왕가의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택하셨다. 그분께서 우리가 이 땅의 아버지에 대한 자녀의 신뢰보다 더욱 깊고 강한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신뢰하도록 초청하신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야후와]의 사랑은 . . .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보다 크고 넓고 깊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다. 땅의 부모들이 자식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는 방법을 안다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얼마나 더 그분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는가?6

야후와는 사랑이시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요한일서 4:8 참조) 순수한 사랑의 화신인, 그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전에, 기도를 위한 신체의 자세나 완벽한 발음의 정확한 기준을 정하지 않으신다. 머뭇거리는 모든 영혼들에게 그분께서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용기를 주신다. (요한복음 6:37) 그분의 “산상수훈”에서 구주께서는 어떠한 기도가 야후와께 가납되며 어떤 종류의 기도가 야후와께 가납되지 않는지 가르치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거리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들의 보상을 받았느니라. . . . 오직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교도들과 같이 헛된 반복의 말을 사용하지 말라. 그들은 자기들이 말을 많이 하여야 아버지께서 들으실 줄로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7 

기도는 신성의 호의를 사기 위해 어떤 특정한 문장들이나 몸의 동작들이 될 필요가 결코 없다. 구주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할 때 그러한 전통들과 연출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하셨다.

오직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으로 들어가 네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드러나게 갚아 주시리라.  . . . 너희가 너희 아버지께 구하기 전에 그분께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들을 아시느니라.8

기도는 야후와께 우리의 필요들을 알려드리는 것이 그 목적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이미 우리의 필요들을 알고 계시며 우리를 위해 제공하시기 위해 계획된 모든 방법들을 갖고 계신다.

기도는 친구에게 하는 것처럼 [아버지]께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야후와]께 우리가 어떤 상태인지 알리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한 것이다. 기도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내려오시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분께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다.9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했던 것처럼: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점들은 신약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도를 우리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본다; 기도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야후와] 그분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이며, 그것이 신성의 이름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이유이다.  야후와의 개인적인 이름은 그분 자체만큼이나 거룩하며 그것은 그분의 품성을 나타낸다.

사람이 야후와를 자신의 사랑의 아버지로서 알 때, 그는 기도하면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신뢰를 가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도는 따분하거나, 성의가 없거나, 모호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19세기부터 존경 받는 사역자인 챨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정확성이 없어서 실패하는 일반적인 종류의 기도가 있다. 그것은 마치 병사들의 한 연대가 그들의 총을 아무데나 쏘는 것과 같다. 누군가는 죽을 수도 있겠지만, 적군의 대부분을 놓치게 된다.”  육신의 아버지를 신뢰하듯이 자신을 만드신 분을 신뢰하는 사람은, 아직 키가 너무 작아서 수도꼭지에 손이 닿지 않을 때 그 아이가 아버지께 물 한잔을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 단순하고 신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필요들을 나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man smiling우리는 [야후와]의 약속들을 신뢰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대로 그분께서 행하실 것이며, 우리가 위해 기도했던 그 축복들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때에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우리의 일을 진행해야 한다. 우리가 믿음에 이를 때, 모든 탄원들은 [아버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이 땅의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도와주고자 하는 것보다 더욱 기꺼이 우리를 도와주시고자 하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하늘 아버지를 우러러 보아야 한다. 왜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가?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두를 위해 그분을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또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로마서 8:32) 10

기도는 특권이지, 기분이나 시간에 따라서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 그런 사치스런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위대한 종교 개혁가 요한 웨슬리는 말한 바 있다: “나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아서, 그 일을 할 수 있기 전에 기도하며 몇 시간을 보낸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모든 축복의 통로다. 회개하는 영혼이 기도할 때, [아버지]께서는 그 영혼의 투쟁을 보시고, 그 갈등을 지켜 보시며, 그 성실함에 인을 치신다. 그분께서는 그 영혼의 맥박에 당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시고, 그 모든 진동을 기록하신다. 그 영혼을 전율 시키는 하나의 느낌도, 그 영혼을 불안하게 하는 하나의 감정도, 그 영혼을 그늘지게 하는 하나의 슬픔도, 그 영혼을 얼룩지게 하는 하나의 죄도, 그 영혼을 움직이는 하나의 생각이나 목적도, 그분께서 인지하지 않으시는 것이 없다. 그 영혼은 무한한 값을 치르고 산 바 되었고, 이제 변경될 수 없는 헌신으로 사랑에 빠졌다.11

자신의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시험과 난국 속에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약속의 이름을 지니신 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 신뢰하면서, 바울의 지도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이것이 [기름부음 받은 자 야후슈아] 안에서 너희에 대한 [야후와]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구주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끊임 없이 기도해야 할 것을 권고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언제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가 영혼의 호흡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잠잠함 속에서라도 드리는 우리의 요청들은 [아버지]께로 올라갈 것이며, 우리의 대변자 [구주]께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며 우리의 요청들을 그분의 의로움의 향과 함께 아버지께 올려드린다.12

사람이 무릎을 계속 꿇고 있는 것은 가능치 않다. 그러나 마음은 기도하며 아버지께 이끌릴 수 있다. 곤란 중이나, 슬플 때나 혼란 중에 있을 때, 하늘을 향해 날라가는 화살처럼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즉각적인 관심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의 임재 안에서 기쁨이 넘친다!  우리가 기도할 때 그분의 임재 안에 있게 되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야 한다.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과 일도 마치 당신이 기도하고 있을 때에 꼭 그렇게 당신의 마음 상태가 되어야만 하는 것과 같이 되도록 기도가 당신의 모든 일상 속에 점차적으로 익숙한 것이 되게 하라.”13

 [아버지]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마치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기쁨들과 고통들을 친한 친구에게 털어 놓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 드리세요. [그분께] 당신의 문제들을 말씀 드리세요, [그분이] 당신을 위로하실 수 있도록 . . . [그분께] 당신의 갈망들을 말씀 드리세요, [그분께서] 그것들을 정결케 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당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말씀 드리세요, [그분께서] 당신이 그것들을 정복할 수 있도록 도우실 수 있도록; [아버지께] 당신의 유혹들을 얘기하세요, [그분께서] 그것들로부터 당신을 막아주실 수 있도록: [야후와께] 당신의 마음의 상처들을 보여 드리세요, [그분께서] 그것들을 치료하실 수 있도록. 당신이 당신의 모든 약함, 필요들, 문제들을 쏟아 놓는다면, 말 할 것의 부족이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을 말해야 한다고 간주하지 말고, 마음에 있는 것들을 마음껏 얘기하세요. [창조주]와 그러한 친밀하고 전혀 거리낌이 없는 교류를 하는 사람들은 축복 받은 것입니다.14

우리의 일상의 일들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기도하며 우리의 영혼을 하늘로 올려야 합니다. 이렇게 잠잠한 가운데 드리는 탄원들은 마치 은혜의 보좌 앞에 향처럼 올라 갑니다; 그리고 원수는 완전히 당황하게 됩니다. 마음이 [야후와]께 머물러 있는 크리스챤은 정복될 수 없습니다.  어떤 악도 그의 평안을 깨트릴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의 모든 약속들, 신성의 은혜의 모든 능력, [전능하신 분의] 모든 자원들이 그의 구원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실제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과, 무가치하고 실수가 많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 [그들의 창조주께] 그들의 요청들을 올려 드릴 권세를 소유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사람이 그 무한하신 [존재]와 연결 될 수 있다는 이것보다 더 바랄 수 있는 더 큰 권세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주 약하고 죄 많은 사람이 그를 만드신 분께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것이다. 전 세계를 관할하시는 군주의 보좌에 도달하는 말들을 우리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으면서도 [우리 구주와] 대화할 수 있으며, 그분께서는 “내가 네 우편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아버지]와 우리의 마음으로 교감할 수 있고; 우리는 [그분의아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의 노동 속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의 귀에도 들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마음의 소원을 내뿜을 수 있으며; 그 말들은 고요함 속에서도 없어질 수 없으며, 사라질 수 도 없다.  어떤 것도 그 영혼의 소원을 파묻지 못한다. 그 소원은 거리의 시끄러움도 넘어서며, 기계들의 소음도 넘어서 올라간다. 우리가 말씀 드리고 있는 분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야후와]이시다.

구하고 또 구하세요, 그러면 당신은 받게 될 것입니다. 겸손과 지혜와 용기와 믿음의 증가를 구하세요. 진지한 모든 기도에 대해 응답이 올 것입니다. 당신이 바라는 방식대로 오지 않고, 당신이 바라는 시간에 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당신의 필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줄 수 있는 방법과 시간에 그 응답이 올 것입니다. 당신이 외로운 중에, 피곤한 중에, 시험 중에 올려 드리는 기도들을 [당신의 아버지]께서는 항상 당신의 기대들에 따라서가 아니고, 언제나 당신에게 선한 방향으로 응답하십니다.15

man kneeling in prayer당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때, 당신이 언제나 즉각적인 응답을 보거나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의 기도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그분께 들려집니다. 때때로 그 응답은 “예스”이고; 때때로 그 응답은 “”이며; 때때로 그 응답은 “잠시 기다리거라”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종종, 사람들은 너무나 빨리 포기합니다. 그들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지 않거나, 자신이 아마도 너무 큰 어떤 것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좀 더 작은 어떤 것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주실 마음이 없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들을 듣는 것을 미루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원들을 더 크게 함으로써, 그분께서 우리에게 더 크게 주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16

때때로 기도하는 것을 이제 막 배운 사람은 어떻게 기도하는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합니다. 당신의 창조주께 감사 드리는 것은 언제나 적절한 일입니다. 당신이 감사한 것을 그분께 말씀 드리세요!  당신은 “주님의 기도”라고 알려진 것을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구주께서 그 산에서 설교하실 때 가르치셨던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빚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옵시고,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원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당신의 것이옵니다.
아멘. (마태복음 6:9-13)

이 기도를 그분께서 제자들에게도 가르치셨다. (누가복음 11:2-4 참조)  이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인정하기 때문에 기도의 모델이 된다. 이 기도는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단순한 필요들을 아뢰며 영적인 축복들을 구하며 지혜에 있어 무한하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긴다. 매일의 개인 기도를 마무리 하면서 이 완벽한 기도로 기도한다면 좋을 것이다.

은밀한 기도, 자신의 마음의 비밀스런 기도는 죄와 자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신성의 힘을 불러 온다. 한편, 큰 축복이 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기도도 있다. 그룹으로 기도하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마음들을 서로 일치하게 이끌며 야후와께로 올려 드리게 되면서 거대한 축복이 될 수 있다. 때때로, 큰 그룹이라면, 넷 또는 다섯의 작은 그룹들로 분산시킬 수 있다.  

엄청난 축복들을 가져오는 또 다른 기도 방법은 “합심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기도를 시작하고 아버지께 자신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아뢴다. 다른 사람이 언제든지 그 기도에 참여 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도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원을 이루어 기도하면서, 한번에 한 사람씩 기도한다. 자신에게 기도할 차례가 오기 전까지는 잊혀져 있던 생각들을 성령께서 바로 그 사람의 차례가 왔을 때 그 마음에 가져다 주신다. 성령이 운행하심에 따라서 “합심하여” 말하고 기도하는 것에 자유 하게 되는 것은 매우 풍요롭게 되며 영적으로 향상하게 되는 경험이다.

창조주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의 이름을 부르도록 모든 격려를 주신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축복의 온전함으로 베풀어주시기를 기다리신다. 테두리가 없는 사랑의 샘에서 마음껏 마시는 것이 우리의 특권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적게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 .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가장 겸손하고 진지한 기도를 기꺼이 들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신데, 우리 쪽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그분께] 알려드리기를 주저할 때가 많다. 가엾고 무력하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들이, [창조주]의 무한하신 사랑의 마음이 그들을 간절히 향하고 있고 그들이 요청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들에게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그들이 그렇게도 적게 기도하며 그렇게도 적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늘의 천사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그 천사들은 [그들을 만드신 분] 앞에 머리 숙이기를 좋아하며 그들은 그분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그들의 창조주]와의 친교를 그들의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는데, [야후와]께서만이 주실 수 있는 그 도움이 그토록 많이 필요한 이 땅의 자녀들은 그분의 영의 빛, 그분의 임재 없이 걷는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악한 자의 어두움이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는 자들을 감싼다. 그 원수의 속삭이는 유혹들이 그들을 죄 짓도록 꾀는데,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께서 기도라는 신성의 약속으로 그들에게 주신 그 특권을 그들이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능하신 분의 그 한계가 없는 자원들이 보관되어 있는 하늘의 곳간을 열 수 있는 믿음의 손 안에 있는 열쇠가 바로 기도인데도, [야후와]의 아들과 딸들이 왜 기도하기를 주저해야 하는가? 17

당신의 창조주의 이름을 부르세요! 그분께서는 당신의 기도들에 응답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1 El, #410, The New Strong's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2Encyclopædia of Religion and Ethics,  James Hastings, John A. Selbie, and Louis H. Gray, ed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17), Vol. 9, p. 152.

3 E. G. White, 정로의 계단, 94-95쪽.

4 Ibid.

5 Timothy Jones

6 E. G. White, 실물교훈, 142쪽.

7 마태복음 6:5, 7-8a

8 마태복음 6:6, 8b

9 E. G. White, 정로의 계단, 93쪽.

10 E. G. White, That I May Know Him, p. 230.

11 E. G. White, Maranatha, p. 85.

12 E. G. White, That I May Know Him, p. 78.

13 François Fénelon

14Ibid.

15 E. G. White,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249-250쪽.

16 Anselm of Caterbury

17 E. G. White, 정로의 계단, 9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