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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이름은 놀랍다 | 파트 4 – 그분의 이름이 내 이마에

“이기는 자에게는 . . . 흰 돌을 그에게 줄 터인데 그 돌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그 돌을 받는 자 외에는 아무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느니라.” (요한계시록 2:17)

 “이기는 자는 . . . 내가 내 [엘로아]의 이름과 . . . 도시 곧 . . .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고, 나의 새 이름을 그에게 기록하리라.” (요한계시록 3:12)

성경에는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을 자들을 위한 약속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아름답지만 가장 이해되지 못한 것 중 하나가, 이기는 자의 이마에 그 신성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약속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약속이 오랜 동안 간과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서 가장 용기를 북돋우어 주며, 희망을 불어 넣어 주는 약속들 중 하나다.

이름은 각 개인, 가족, 종족의 신원을 밝혀주기 위해 사용된다. 많은 문화권에서, 신부는 결혼하면서 그녀의 이름에, 남편의 성을 취하게 된다. 소수의 일부 문화권에서는, 남자가 그의 이름에 신부의 성을 취한다. 요점은, 마치 그들이 이제 “한 몸”으로 간주되는 것처럼 그들의 이름이 서로 합쳐졌다는 것이다. (창세기 2:24)

father and infant이와 같이, 아이가 태어났을 때, 그 아이는 보통 아빠의 이름을 취한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부모의 이름을 조합하여 아이의 이름을 짓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이름이 공유되는 것이다. 가족의 이름이 그 아이의 이름에 들어감으로써, 그 아이가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지난 20년 동안, 다양한 지역 명들이 개인의 이름들로 유명하게 되었다: 다코타, 중국, 인도, 시에라, 아시아 등.  이름은 때때로 자연에 있는 것들을 따라 짓기도 한다: 장미, 동틀녘, 사시나무, 비, 개울 등.  부모들은 때때로 라토야, 라케이샤, 샤니크, 지마르 등과 같이 어떤 뜻도 포함하지 않는, 그저 그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만을 고려하여 완전히 독특한 이름을 짓기도 한다.

성경 시대에는, 뜻을 중점으로 하여 이름을 지었다. 부모들은 아이의 외모의 특색이나, 그 아이가 어떤 특성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것에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거친”을 뜻하는 에서는 그가 태어났을 때 “붉고, 온 몸이 털옷 같아서.” 그 이름을 받게 되었다. (창세기 25:25) 라헬이 아이를 낳다가 죽어가면서, 그녀는 그 아들의 이름을 “내 슬픔의 아들”을 뜻하는 베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그 이름을 “오른 손의 아들”을 의미하는 베냐민이라고 바꾸었다. (창세기 35:18)

부모들이 경배하는 신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 역시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이름은 문학과 과학의 바빌론 신, 느보의 이름을 따라 지어졌다. 그의 이름은 “느보가 국경을 방어한다.”를 의미했다.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빌므로닥은,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 왕을 투옥시킨 지 37년 만에 그를 감옥 생활에서 풀어 줌으로 그에게 큰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에빌므로닥의 이름은 “마르둑의 군사”라는 의미였다. 악한 여왕 이세벨의 아버지, 엣바알 왕의 이름은 “바알과 함께”라는 의미였다.

이스라엘 부모들은 종종 그들의 자녀들의 이름을 야후와의 이름을 따라 지었다. 성경에는 야(Yah) 또는 야후(Yahu)를 포함하는 수 백 개의 이름들이 있다.

(YAH)로 끝나는 이름들

#29 아비야 (AbiYAH – 나의 아버지는 야후와이시다)

#138 아도니야 (AdoniYAH – 나의 주는 야후와이시다)

#223 우리야 (UriYAH – 나의 불꽃은 야후와이시다)

#274 아하시야 (AchazYAH – 야후와의 소유)

#452 엘리야 (EliYAH – 나의 엘로아는 야후와이시다)

#3414 예레미야 (YirmeYAH - 야후와의 존귀한)

#5662 오바댜 (ObadYAH – 야후와의 종)

#6846 스바냐 (TsephanYAH – 야후와의 의해 감추인)

#2899 도바도니야 (Tob AdoniYAH – 나의 주 야후와께서 기뻐하시는)

야후(YAHU)로 시작하는 이름들:

#3059 여호아하스 (YAHUachaz - 야후와께서 붙잡으셨다)

#3075 여호사밧 (YAHUzabad – 야후와께서 부여하셨다)

#3076 여호하난 (YAHUchanan – 야후와께서 좋아하시는)

#3078여호야다 (YAHUyakin – 아후와께서 아셨다)

#3079여호야김 (YAHUyaqim – 야후와께서 일으키실 것이다)

#3088여호람 (YAHUram – 야후와께서 일으키셨다)

#3085여호아다 (YAHUaddah – 야후와께서 빛내셨다)

#3092여호사밧 (YAHUshaphat – 야후와께서 심판하셨다)

#3100 요엘 (YAhwEl – 야후와께서 그의 엘 [하나님]이시다)

야후(YAHU)가 중간에 들어간 이름:

#454엘리호예나이 (ElYAHUenai – 나의 눈을 야후와를 향한다)

 “야후와”의 의미로서 을 사용한 더 많은 이름들이 있다.

히브리 국가의 신의 이름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짓는 관습이 이스라엘에 매우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악한 왕들도 야후와의 이름을 따라 그들의 아들들의 이름을 지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들 중 하나였던 아하스는 그의 아들의 이름을 히스기야라고 지었다. 히스기야(YechizqiYAH)는 “나의 힘은 야후와이시다.”라는 의미다. (역대상 3:13 참조.)

야후와의 “목전에서 악한 일을 행했던” 여호야긴(YAHUWAHkeen)도 그의 이름은 “야후와께서 세우실 것이다.”라는 의미였다. (역대하 36:9)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이었던, 그의 형제 시드기야 역시 그의 이름(TsidekiYAH)은 “나의 의는 야후와이시다.”라는 의미이지만 타락한 왕이었다.

그러한 관습들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일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싫어했던 사람이 부조, 야곱이다. 쌍둥이 중 동생으로서, 그는 태어날 때 그의 형의 발꿈치를 잡고 있었다. (창세기 25:26) 이것 때문에 그의 이름이 “빼앗는 자”를 의미하는 야곱이라 불렸다.

 “빼앗는다”의 정의는: “[어떤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특별히 힘과 책략과 배반을 통해서 지위를 빼앗는 것;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제거하거나 뿌리 째 뽑는 것.”1  한 아이에게 얼마나 부담이 되는 이름인가! 그를 고자질 쟁이나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신성의 지혜는 아버지의 이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모든 자들의 이마에 기록될 것이라는 약속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를 야곱의 이야기에서 제공했다. 그 이야기는, 죄를 지었지만 용서와 회복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에 희망을 불어 넣어준다.

성경에 보존된 대로, 야곱의 인생의 역사는 하나의 긴 불명예의 기록이다. 그는 실제로 그의 형 에서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에서는 장자로서 세 가지를 상속할 자격이 있었다:

1. 그 가족의 족장으로서의 역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어지는 혈통을 포함함;

2. 아버지의 모든 재산;

3. 그 가정의 제사장이자 영적 지도자, 약속된 메시야의 선조

아직 어렸지만, 에서는 통제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사냥하며 야생의 자유로움을 좋아했던 사냥꾼이었다.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의 상속자가 되는 귀한 영예를 그가 경시했다는 것이, 그가 이방 여인들과 결혼했다는 사실에서 보여진다. 그 여인들이 “이삭과 르브가의 마음에 슬픔이었더라.” (창세기 26:35) 두 명의 이방 여인들이 그 집안에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력과, 그로 인한 불행이 너무 커서 리브가가 이삭에게 이르되, “내가 헷의 딸들 [에서의 아내들]로 인하여 살기에 지쳤거늘, 당신이 만일 이 땅의 딸들인 이 사람들 곧 헷의 딸들 중에서 아내를 취하면 내 삶이 내게 무슨 유익이 되리요?”라고 하였다. (창세기 27:46)

반면에,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소박한 사람이었다.” (창세기 25:27) 그의 온순하고, 베풀기 좋아하는 성품은 죽일 동물들을 찾으면서 야생을 돌아 다니는 것보다는 양과 어린양 떼 안에 있는 것과 집 주변에서 어머니를 돕는 것에서 훨씬 더 큰 기쁨을 얻었다.  야곱은 가족의 수장으로서 얻게 되는 모든 부와 권세 때문에 에서의 장자로서의 지위를 부러워했던 것이 아니다. 야곱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원했던 한 가지는 영적 장자 상속권을 받는 것이었다. 야곱은 그 가족의 제사장, 약속된 메시야의 선조가 되길 갈망했다.

그 약속된 분의 선조가 되는 높은 특권을 에서가 경시하는 것은, 야곱 자신이 그 선조가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을 더 강하게 해줄 뿐이었다. 어느 날, 야곱이 들에서 양들을 지키며, 자신이 먹기 위해 장작불에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에서가 매우 배고프고 지쳐서 비틀거리며 왔다. 야곱의 수프 냄새를 맡으며 에서가 요청했다. “내가 지쳤으니 . . . 나로 먹게 하라.” (창세기 25:30)

야곱이 기회를 포착했다: “오늘 나에게 형의 장자 상속권을 팔라.” (31절)

에서가 이르되, “보라, 내가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 장자권이 내게 무슨 유익을 주겠느냐?” 하였으나 (32절)

야곱은 집요했다. 장자권이 없으면; 음식은 없다. “오늘 내게 맹세하라”, 하니 그가 그에게 맹세하고 자기의 장자권을 야곱에게 파니라. 이에 야곱이 빵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그가 먹고 마시고 일어나 자기 길로 갔더라. 에서는 이와 같이 자기의 장자권을 업신여겼더라.” (창세기 25:33, 34)

에서가 분명 그의 장자권을 경시했지만, 그것을 팔아 넘긴 것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후에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그대로 선포하려고 했을 때, 야곱의 죄가 이전의 죄와 합쳐져 더 큰 죄가 되었다. 야곱은 눈이 어두운 아버지에게 가서 자신에게 장자권의 축복을 달라고 이삭을 속였다.

에서는 이 거짓말에 매우 분노하여, 야곱의 생명을 위협했다. 야곱은 하란으로 도망갔고 거기서 20년 넘게 살았다. 지금껏 내내, 후회라는 암 덩어리가 그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었다. 야곱은 야후와께서 그가 속임수로 장자권을 얻으려 한 것을 승낙하실 수 없으셨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자신의 죄가 생각났다: “야곱! 빼앗는 자! 훔치는 자! 사기꾼!”

그가 마침내 가나안에 돌아올 때, 그는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복수를 위한 것이었다.

야곱의 인생의 절정이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큰 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그런데 그가 신성의 은혜로 이미 용서 받았고 회복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마음과 영의 큰 고통 속에서, 그는 그의 가족과 동물들을 얍복강 건너편으로 보내고, 자신은 기도하기 위해 뒤에 머물렀다.

그리고 한 남자가 날이 샐 때까지 그와 씨름하였다. 이제 그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였음을 보고,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하매, 야곱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아니하면 내가 당신을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창세기 32:25-26)

Jacob wrestling with the angel만약 그 전에 야곱이 자신의 큰 죄를 회개하지 않았었다면, 그러한 무례한 발언은 바로 죽음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죄 많음을 알았던 한 영혼의 애원이었다. 그는 언약을 지키시는 하늘 아버지의 약속들을 신뢰하며, 그분에게 자신의 모든 청원을 쏟았다. 야곱에게 주어진 은혜로운 대답은 모든 것을 위한 확약이다. 야곱이 신성의 축복을 간청했을 때, 그 응답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거늘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말하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이라 하리니, 이는 네가 왕자로서 [엘로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창세기 32:27, 28)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얼마나 안심 시켜주는 말인가! 야곱은 빼앗는 자라는 그의 이름이 자신의 죄들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이제 그의 이름이 “엘과 함께 하는 왕자”라는 의미의 “이스라엘”로 바뀌었다. 의심할 필요가 없도록 하고, 그의 새로운 이름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천사가 설명했다. “이는 네가 왕자로서 [엘로힘]과 견주며 사람들과 견줄 능력이 있어 이겼기 때문이니라.”

그 말의 중요성이 야곱/이스라엘 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죄들이 용서함을 받았다! 그는 야후와의 은혜로 회복되었다. 더군다나, 그가 전능하신 분과 겨루어 “이겼다”는 사실은, 다음날 에서와의 만남에서도 역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하나의 약속이었다.

그의 이름이, 축복을 위한 그의 간구에 대한 응답으로 변경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죗된 본성이 깨끗하게 씻겨지고 그를 만드신 분의 형상으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주었다. 이것이 야곱의 영혼이 갈망했던 그 축복이었으며 그의 새로운 이름이, 그 축복이 그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야곱과 똑같이,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죄를 지었으며 야후와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모든 사람은 유전적으로도 후천적으로도 죄를 지으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야곱들에게도 역시 희망이 있다! 이사야 58장이 특별히 이 마지막 세대에게 주어졌다: “크게 외치라. 아끼지 말고 네 목소리를 나팔소리 같이 높여서 내 백성에게 그들의 범법을, 야곱의 집에게 그들의 죄들을 보여 주라.” (이사야 58:1)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이 구절은 야곱이 용서를 받고 새로운 본성과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물로 받은 지 수세기가 지난 기록된 것이다.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 구절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준다. 이 외침은 야후와의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죄를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것은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라는 외침이다.

죄는 창조주의 자녀들 안에 있는 그분의 형상을 손상시킨다.  마음의 재창조는 오직 창조주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성화는 하나의 선물이다. 출애굽기 31:13은 말한다: “너희는 진실로 내 안식일을 지킬지니라. 그것은 너희 대대로 나와 너희 사이에 있을 표적이니 이것은 내가 너희를 거룩히 구별하는 [야후와]인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니라.”

야후와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거룩히 구별되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요구된다. 물론,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야후와의 이름을 부르라”고 반복적으로 권고한다.

이사야 58장은 그분의 힘으로 야후와께 회개하며 돌아와 그분의 율법을 지킬 모든 자를 위한 매우 아름다운 약속으로 마쳐진다.

네가 만일 네 발을 돌이켜 안식일을 범하지 아니하고 내 거룩한 날에 네 쾌락을 행하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야후와]의 거룩한 날이라, 존귀한 날이라 하고 그를 공경하며 네 자신의 길들을 행하지 아니하고 네 자신의 쾌락을 찾지 아니하며 네 자신의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스스로 [야후와] 안에서 즐거워하리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들에서 타고 다니게 하고 네 조상 야곱의 유산으로 너를 먹이리라. [야후와]의 입이 그것을 말하였느니라. (이사야 58:13-14)

우리의 선조 야곱이 상속 받은 것은, 새롭게 형성되고 재창조된 품성을 나타내는 새로운 이름이다! 구주의 이름은 그 자체로 “그분을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격려가 된다. 왜냐하면 그 이름 자체가 “야후와께서 구원하신다!”는 하나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오늘 그분을 부르세요.  그분은 그분께 나아 올 모든 사람을 영접하기 위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도 역시, 잠재의식과 생각이 머무는 곳인 당신의 이마 안에 기록된 새 이름 – 새롭게 정화되고 회복된 품성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그분의 약속이 있습니다: “나에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7)

나는 자라면서 재능도 있고, 헌신적인 안식일 학교 선생님들을 많이 만나는 축복을 받았었다. 그들 중에서, 한 여자 선생님이 모든 아이들에게 인기가 가장 많았다. 많은 이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익숙하며 또한 헌신된 크리스챤이었던 그녀는 훌륭한 시각 자료들을 이용할 줄 알았다. 세상의 “화려한 것들”의 획득으로 가득 찬 해적선의 보물 상자로부터 아름다운 꽃들로 가득 찬 그녀의 멋진 크리스탈 꽃병, 그리고 “아름다운 크리스챤” 안에 감추어진 비밀스런 죄를 묘사하기 위한 부패한 음식과 개똥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시각 자료들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우리의 어린 마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들로 심오한 영적 진리들을 가르쳤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묘사하기 위해 좋은 시각 자료를 사용하는 것의 유익이 과대평가될 수 없다. 야후와께서 친히 구속의 역사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들 중 하나인 영혼 자체의 정결을 가르치기 위해 정교한 시각 자료를 사용하셨다.

죄라는 비상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신성의 계획, 구속의 계획은 마지막 순간에 투입되는 어떤 단순하고 무계획적인 조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태고로부터 고요한 중에 보관되어온 그러한 것들의 일부였으며, 만약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지 않았었더라면 그것은 영원히 감추어진 채로 남겨졌을 것이다.

구원의 계획은 죄 사함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회개한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한다. 구속의 계획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 안에서 야후와의 형상 자체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사람의 마음을 재창조하여 더 이상 사탄의 마음과 같이 되지 않고, 신성의 마음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영적인 것들은 영적으로 분별된다. 인류가 사탄의 본성을 취하며 타락했을 때, 성결하고 깊은 진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사라졌다. 죄로 어두워진 마음에 구원의 계획이라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창조주께서 만드셨던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답고, 복합적이며 다양한 질감의 시각 자료를 설계하셨다. 야후와께서 우리에게 성소를 주신 것이다.

성소는 인류를 구조하기 위한 구원 안에 포함된 원칙들을 설명하기 위해 표상들을 사용했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로마서 6:23) “피 흘림이 없은즉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히브리서 9:22), 깨어진 신성의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죽음이 필요했다. 이것이 동물 희생물들에 의한 성소 봉사에서 표상화되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야후와]의 어린양” 야후슈아에 의해 흘려질 피에 대한 상징일 뿐이었다. (요한복음 1:29)

어린양과 염소와 소들에 의해 흘려진 피는 결코 어떤 사람의 죄도 깨끗하게 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영혼을 깨끗하게 하거나 재창조할 수 없었다.

율법은 [야후슈아]께서 가지고 올 은혜의 희미한 윤곽만을 가진 것이었기에 그것들을 실제로 재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그것은 그들의 정기적인 연간 희생물들을 드렸던 자들의 영혼을 개선할 능력이 없었다. 만약 그러한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 예배자들이 진정으로 깨끗하게 되고, 더 이상 죄의식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희생물들은 중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희생물들에는 해마다 죄들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나니, 황소와 염소의 피가 죄들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 (히브리서 10:1-4, J. B. Phillips 번역 일부 참조)

다른 말로 하면, 동물 희생물들을 요구하는 율법은 십자가에서의 야후슈아의 죽음이라는 진정한 희생에 의해 성취될 것의 희미한 묘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희생물들을 계속 드렸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될 수 있다. 그들은 계속 죄를 지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동물들의 피에는 그들의 영혼을 신성의 형상으로 재창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야후슈아]께서 세상에 들어오실 때에 이르시되:

희생물과 헌물은 당신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당신께서 한 몸, 나를 마련하셨나이다;

죄로 인한 번제 헌물과 희생물들은 당신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오 [야후와]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에 대해 기록된 바와 같이)
내가 [야후와]의 뜻을 행하기 위해 . . .

그것을 말씀하신 후에 또 이르시기를, “희생물과 헌물과 번제 헌물과 죄로 인한 헌물은 [야후와]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셨는데 (그것들은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이라) . . . [야후슈아]께서 또 이르시기를, “[야후와]여, 내가 당신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하셨으니 그것은 그분께서 희생물들이라는 옛 규칙들을  제거하시고 [야후와]의 뜻에 복종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세우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뜻 안에서 [야후슈아 우리 구주]의 몸이 한번 특별히 드려짐을 통해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노라. (히브리서 10:5-10 J. B. Phillips 번역 일부 참조)

 야후슈아의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생물들을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희생물들은 단지 시각 자료들이었다! 그것들은 야후슈아의 죽음 후에 각 개인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진정한 정결을 가리키는 실물교훈이었다.

earthly sanctuary in the wilderness
성막 전체가 구원의 계획에 대한 시각 자료로서, 하나의 표상이다.

성막 봉사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의미에 관한 놀라운 연구들이 많이 행해져 왔다. WLC는 독자들이 매우 중요한 이 주제에 관해 연구하기를 독려한다. 다양한 측면을 가진 이 시각 자료 안에 가치 있는 여러 가지의 교훈들이 있다. 이해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 성소가 사람의 영혼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성소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1., 희생 제사가 수행되었던 곳.

2. 거룩한 곳(성소), 희생 동물의 피가 뿌려지며, 회개하는 사람의 죄가 성소로 옮겨지는 곳.

3. 가장 거룩한 곳(지성소),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만 들어갔던 곳. 이 엄숙한 봉사가 지난 한해 동안 거기에 축적된 죄들이 기록된 성소를 “깨끗하게 했다.”

 이러한 세 곳의 각각은 개인의 삶의 모습을 나타낸다.

sanctuary courtyard
뜰은 말과 행동들을 나타낸다. (사진 출처 BrianMorley.com.)

뜰은 모든 개인의 삶의 말과 행동들의 표상이다. 사람의 말과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진다. 사람의 삶의 뜰에서 숨겨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뜰에서 발생하는 것, 말한 것들, 행해진 행동들은 모두 그 사람의 생각과 감정들 안에서 일어난 것들의 결과다.

거룩한 곳 (성소)

성소는 사람의 품성, 그의 생각과 감정들을 나타낸다. 이것이 사람이 하늘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어떤 누구도 그의 부를 가지고 갈 수 없고; 어떤 누구도 그녀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갈 수 없다; 어떤 누구도 심지어 그들의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데리고 갈 수 있다는 보장을 받지 못한다. 하늘로 가지고 가는 유일한 것은 이 땅에서의 유예 기간 동안 개발되어온 품성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생각들과 감정들을 다스리는 것이 지극히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느 누구도 몰아치는 우박처럼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말을 하며 그들의 감정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생각과 감정 둘 다를 억제하는 훈련을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의무이다.

지극히 거룩한 곳 (지성소)

 사람의 생각과 감정은 자신의 마음가짐과 신념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흘러 나온다. 보통의 이스라엘 사람이 지성소에 접근할 수 없었던 것과 똑같이, 각 개인도 자신의 잠재의식적인 정신 속에 접근할 수 없다. 잠재의식적인 정신은 뇌의 전두엽, 곧 이마의 바로 안쪽에 위치한다. 각 개인의 지성소는 잠재의식적인 정신 안에 있으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야후와의 어린양에 의해 가능한 신성의 깨끗하게 함이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삶의 “뜰” 안에서 행해진 어떤 말과 행동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야후슈아께서 초림하셨을 때 그들의 삶의 “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행위로 구원 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려고, 많은 희생물들과 일주일에 몇 번씩 하는 금식으로 하늘에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구원 받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방식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 매우 비평적이었다.

어느 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야후슈아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그들이 빵을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라며 힐난하였다.  (마태복음 15:2)

바리새인들은 정결을 다루는 레위기의 규례를 지키는 데 있어 빈틈 없이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심지어 모세의 율법에 추가하며, 만약 그 추가된 전통들 역시 지켜진다면 이것은 그 신성의 율법이 결코 깨어지지 않도록 보장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모든 관심은 사람의 말과 행위들에 있었으며, 가장 중요한 내부의 정결은 완전히 간과하였다.

야후슈아께서 바리새인들이 외부적인 “뜰”에 집중하면서, 모든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을 수 있는 “지성소” 정결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분별하셨다. 그분께서 강조하시며 말씀하셨다: “내게 듣고, 이것을 이해하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태복음 15:10-11)

후에, 제자들이 그분에게 설명해달라고 요청하였을 때, 구주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든지 입 안에 들어가는 것은 배로 들어가 뒤로 내버려지는 줄을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신성모독 – 이러한 모든 것이 마음으로부터 나오며, 이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다. (마태복음 15:17-20)

뜰의 말과 행동들은, 잠재의식적인 정신 안에 깊이 묻혀 있는 마음가짐과 신념들로부터 나온 생각들과 느낌들이 외부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그러나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느니라.” (마태복음 15:20)라고 덧붙이실 때 구주의 음성에서 웃으시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있었다.

이것은 구주의 가르침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였다.

좋은 나무가 쓸모 없는 열매를 맺지 아니하며, 쓸모 없는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느니라.  각각의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아나니, 너희는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얻지 못하며,  가시떨기나무에서 포도를 거두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자신 안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누가복음 6:43-45)

“뜰”의 행위들이 순결하게 되기 위해, “거룩한 곳”으로부터 흘러 나오는 생각들과 감정들이 오염되지 않아야 한다. 생각들과 감정들이 거룩하고 오염되지 않기 위해, 잠재의식적인 “지극히 거룩한 곳” 안에 있는 마음가짐과 신념들이 깨끗하고 신성의 본성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전두엽의 그러한 철저한 정화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할 수 없다. 이것은 그 사람을 위해 오직 구주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다. 악취가 나는 썩은 음식과 개똥에 파 묻힌, 나의 선생님의 아름다운 수선화가 담긴 크리스탈 꽃병이 그 자체를 깨끗하게 할 수 없었다. 오직 그것의 밖에 있는 힘이 그 오물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 안에서, 오직 한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가 믿음으로 그 약속들을 주장할 때 신성의 힘이 죄인을 위해 역사한다.

그 잠재의식적인 정신이 깨끗하게 되고 신성의 정신과 하나가 될 때, 그 마음은 기쁨, 평안, 인내, 친절, 절제와 신성의 다른 모든 속성으로 흘러 넘치게 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이해하고 다음 구절을 기록했다:

[야후와]와 [야후슈아 우리 주]를 아는 것을 통해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이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영광과 덕으로 부르신 그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의 권능이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도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 . . 신성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베드로후서 1:2-4)

대제사장 야후슈아께서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나는 사탄의 본성을 제거하시고 신성의 형상을 반사할 잠재의식적인 정신을 재창조하실 때, 각 개인의 마음의 지성소가 깨끗해진다. 히브리서 전체는 믿음으로 그분께 나오는 모든 자의 잠재의식상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시는 야후슈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을 설명한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다. 그 두 가지는 완전히 별개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그것을 믿기 전에, 깨끗해졌다는 것을 느끼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실수다. 믿음은 “다른 사람에 의해 선포된 진리에 대해, 다른 증거 없이 그의 권위와 진실성 [진실함]에 의지하여, 마음으로 동의하는 것이다.”2  다른 말로 해서, 믿음은 다른 어떤 증거가 필요 없이, 그분이 누구시라는 것 때문에 야후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믿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분께서 그분의 약속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야후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약속을 주장하기 위해 그 믿음을 실행할지 하지 않을 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 “네가 만일 믿을 수 있다면,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마가복음 9:23)

당신은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는가? 당신은 회복을 원하는가?  당신은 그 신성의 형상이 당신의 잠재의식적인 마음 안에서 회복되기를 원하는가? 만약 그것이 당신의 바램이라면 당신은 그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회복시키는 능력을 경험해본 사람들에게는 재창조하는 야후와의 능력의 실제가 비밀이 아니다.

성경 연구에 초대하는 생소한 그룹이 있었는데, 헨리에타 메어스는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한 젊은 방문 사역자에 의해 축복을 받았고, 그녀의 친구들도 같은 축복을 받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성경 연구를 위해 비버리 힐즈에 있는 메어스의 집에 모이는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들로 화려한 모임이 되었다. 거기 온 사람 중에 술을 매우 좋아하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서부의 스타 스튜어트 햄블런이 있었다.

Stuart Hamblen
스튜어트 햄블런: 배우, 가수, 라디오 명사

스튜어트는 그의 노래와 연기와 인기 있는 라디오 쇼 만큼이나, 도박과 싸움으로도 유명했다. 그 젊은 사역자와 그 영화 스타가 죽이 맞았다. 그 복음 전도자가 스튜어트를 그 모임에 초대 했을 때, 햄블런이 응했고 그 모임의 일련의 과정이 끝나기 전에 그의 삶을 구주께 내어 드렸다.

John Wayne
존 웨인

그 소문이 퍼졌다. 스튜어트 햄블런이 개심하게 되다! 신문들이 그 이야기를 실었고, 곧 로스엔젤레스의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크리스챤이 된 그 터프가이 스타에 관해 떠들어 댔다. 스튜어트 자신도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그 변화에 관해 조용하지 않았다. 그의 라디오 쇼에서, 그는 자신의 간증을 즐겁게 나누었다. 그는 곧 그의 스폰서들의 노여움을 샀다. 그의 라디오 쇼 시간 중에는 모든 맥주 회사들의 광고를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수 많은 영화에서 함께 주연을 맡았던 동료 연기자 존을 만나게 되었다.

“스튜어트, 내가 너에 관해 듣는 이 소식들이 뭐야?” 존이 물었다.

“어, 듀크,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니지.” 햄블런이 미소를 지었다.

“음, 하나의 노래처럼 들리는 군” 존 웨인이 말했다. 스튜어트는 집에 가서 그 말로 노래 가사를 만들었다. 그 노래가 1989년에 그의 죽음 전까지 그가 썼던 220개의 노래들 가운데 첫 곡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하지만, 하늘 아버지의 사랑이 그분의 은혜로 죄인들을 받아 들이시고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힘찬 진술이었다.

[야후와]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니야.
그분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하신 것을, 당신을 위해서도 하실거야.
두 팔을 넓게 벌리시고, 그분께서 당신을 용서하실거야.
[야후와]께서 하실 수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니야.3

이제껏 살아 온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고귀한 왕이든지 교활한 절도범이든지, 귀하게 여김을 받는 아내든지 냉담해진 창녀든지, 자신의 진정한 가치로 – 또한 자신이 그러한 가치가 없다고 할지라도, 사랑 받고 받아들여지기 원하는 갈망이 있다. 모든 사람은 이해 받기를 간절히 원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모양의 구멍”이 있다고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모든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 창조주와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 때문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종종 인식되지 않는다.  야후와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심이, 그 바램을 간절히 바라지만 충족되지 않는 고통으로 만든다.

이 마음의 울부짖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 일으켰던 한 노래에 잘 담겨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에 표현된 갈망에 동질감을 느낀다.

만일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오직 하나의 요구가 있다면,
그가 나와 같지 않기를 나는 바라네
.
그가 이해해주기를 나는 바라네
. . . 4

죄가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야후와를 아는 지식을 파괴하였다. 그것은 영혼 안에 있는 신성의 형상을 거의 완전히 손상시켰다. 그러나, 야후와를 부르며 용서와 정화를 구할 모든 자는 회복될 것이다. 신성의 형상은 회복되고 사람은 창조주의 영광, 그 품성을 반사할 것이다.

성경에는 야후와의 이름이 포함된 360개의 독특한 이름들이 있다. 각각의 이름은 신성의 다양한 품성들 중에 각기 다른 면들을 반영한다. 길을 잃고, 이 땅에 속박되어 있는 그분의 자녀들에게, 그분의 품성을 나타내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열망이, 이러한 아름다운 이름들 안에서, 그분 자신을 나타내시는 여러 가지 다양한 방식들로 보여질 수 있다.

어떤 이름들은 강하고 남성적인 이름들이다: 나는 너의 힘이요; 나는 너의 방패요; 나는 너의 혈속이요; 나는 전쟁의 사람이다. 이러한 이름들은 그분의 힘과 권능, 모든 필요를 그분의 자녀들에게 공급하실 수 있는 그분의 능력을 확증해준다.

어떤 이름들은 우리가 듣기에 여성적으로 들린다: 샤론의 장미; 계곡의 백합화; 많은 유방을 가진 자. 이러한 이름들은 온화한 이해심, 사랑스런 친절과 양육하는 보살핌이라는 위로의 약속들이다.

그분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고 재창조되어 그분의 품성을 완벽하게 반사할 때, 온 땅이 야후와의 “영광” (품성)의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이것으로 아버지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 신성의 형상으로 회복된 유한한 인간이, 신성의 품성의 다양한 면들을 반사하는 큰 영예를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개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개성은 흡수되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비뚤어진 사탄적 모든 성향들로부터 정화되고, 참 품성이 이제, 그것이 본래 그렇게 되도록 의도되었던 대로 신성의 품성의 독특한 면을 드러내며 빛난다.

Moses and ten commandments성경은 모세를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그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니,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민수기 12:3) 현대의 많은 성경들이 그 단어를 “겸손한”으로 번역하는데, 그것은 불행한 일이다. ‘겸손한’ 이라는 단어는 ‘온유한’ 이라는 단어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겸손한’이라는 단어는 ‘낮은’, ‘순종적인’을 포함하여, 낮아지는 것 그리고 낮추어 지는 것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된다. 사람들은 종종 그들의 마음에서 ‘온유한’과 ‘겸손한’을 동일시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단순히 겸손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온유함은 너무도 자주, 약하거나 줏대가 없는 것으로 비하되어 여겨진다. 특별히 이것이, 개성이 높이 존중되며 “나는 나의 방식대로 했다”와 같은 노래들이 인기를 끄는 서구 문화권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실제로, 자신의 감정들과 혀를 통제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노예가 된 사람들보다, 언제나 더 큰 품성의 힘을 갖는다.

자주 평가 절하되는 이 소중한 신성의 품성의 특성을 사전적 정의가 해명해준다.

온유한: 온순한 기질; 부드러운; 온화한; 쉽게 화내거나 짜증내지 않는; 양보하는; 피해를 당한 상황에서 관대한 것.5

온유한 사람은 나약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모세는 성질이 꽤 있었다! 그의 그런 기질이 한 애굽인 관리자를 죽인 것에서 드러난다. (출애굽기 2:11, 12) 8년 후, 그의 기질로 인해 (극도의 도발적인 환경하에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는 특권을 잃게 된다. (민수기 20:12) 그러나, 역사 상 가장 위대한 교사께서 지도하시는 신성의 학교에서, 모세는 그의 기질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다.

그의 품성에서 큰 약점이었고 살인 행위로 이어졌던 그것이, 신성의 영향 하에서 거룩해졌다. 모세는 자신을 통제하는 귀한 법을 배웠다. 그는 “피해를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관대함을 유지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다.6  “관대함”은 “자신을 참을성 있게 통제하는 것이다.”7 온유함은 잘못되거나 불의한 것이 행해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손상과 상해를 입힌 것을 인정하는 사람 앞에서,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통제”하고 인내하며 용서한다. 모세의 품성은 줏대가 없거나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결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품성의 진정한 힘 안에서 전보다 더 강해졌다.

이 땅의 누구보다 더, 모세는 사람의 아들들 안에서 거의 보여지지 않았던, 신성의 품성의 아름다움을 반사하는 특권을 가졌다. 야후와 그분은 매우 온유하시다. 그분께서는 자기 child with flower통제를 매우 잘 하시며 개인적인 피해들 속에서도 인내하신다. “나는 [야후와]라, 나는 변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너희 야곱의 아들들이 소멸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라기 3:6)

구원 받은 각 개인은 잘 균형 잡힌 품성을 갖게 될 것이다. 각 개인은 신성의 품성의 어떤 독특한 면의 높은 수준까지 개발되는 구별된 개성을 갖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선하게 대하는 마음을 갖고, 그들의 요구들을 들어주며 그들의 필요들을 공급하고 고통 중에 있는 자들을 도와줌으로써 그들을 행복하게 만드는”8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품성을 나타내는 자녀는 그의 이마에 친절한 이라는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친절함이 그 사람 자신의 품성 안에서 특별히 개발되어온 신성의 특성이다.

야후슈아를 믿음으로,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행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그것을, 비용이나 두려움이나 위험에 관계 없이, 언제나 행하는 신성의 능력을 개발해온 사람은 그의 이마에 용기 있는 이라는 이름을 갖게 될 것이다. 용기는 그의 삶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 신성의 품성의 특정한 측면이다.

그녀의 삶에서, 야후와 그분의 “사람들로 하여금 결점들을 너그럽게 여기게 만들고, 피해를 준 자를, 그에게 마땅한 것보다 더 잘 대해주는, 마음의  자애로움, 온순함, 부드러움” 9을 나타내는 사람은 그녀의 이마에 자비라는 이름을 받는다. 이는 그것이 그녀 자신의 품성 안에서 그녀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야후와의 품성의 측면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한 자매는, (그 때 그녀는 젊었을 때였는데), 구주께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사셨다”는 것을 읽었고, 그 때, 그녀는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하며 마음 속으로 그렇게 되기로 결심했다고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수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이기심이 없고, 관대한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그녀의 관용은 환경적으로 돈이 필요한 때에도 그것에 구애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돈에 있어서만 관대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다양한 방식들로 자신을 헌신한다. 정말로, 그녀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산다.

성경은 한 가지 약속으로 마쳐진다. 영원한 미래에 휘장이 제쳐지고, 경계가 없는 환희의 영역을 바라보도록 허락된다. “그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정같이 맑은” (요한계시록 22:1) 생명의 물을 묘사한 후, 영원한 미래를 위한 약속이 주어진다: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오직 [야후와]와 어린양의 보좌가 그것 안에 있으리니;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섬기며: 그들이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요;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 안에 있으리라.” (요한계시록 22:3, 4)

group of smiling people죄가 들어온 후, 야후슈아께서 아담의 타락한 본성을 취하셨다. 만약 아버지께서사람이셨다면 그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생애하셨을 지를 그 아들께서 보여주셨다. 야후슈아께서는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분은 생애하시면서, 극복되어야 할 나쁜 성향들을 만들지 않으셨다. 선과 악, 거룩함과 사악함 사이에 오래 지속되어 온 쟁투는, 야후와께서 그분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깨끗하게 되고 신성의 형상으로 회복된 한 그룹의 사람들을 가지실 때 마쳐진다. 죄를 지어 왔지만 회개와 용서를 통해 이제 그들의 잠재의식적인 뇌 속에, 그들의 이마 안에 신성의 날인, 곧 그분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분의 품성이 그분을 기다리는 백성들 안에서 나타날 때 이 땅은 그 영원하신 분의 영광으로 밝아질 것이다.

55세의 한 남성이 안식일을 범하기를 거절하여 그의 직업을 잃게 되는 상황에서, 야후와라면 어떠셨을지, 그분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지, 그분께서 어떻게 행동하셨을 지를 세상은 알게 될 것이다. 세 아이의 엄마로서 34세의 한 여성이 진리를 따르기 위해 결혼생활이 깨지게 되는 상황에서, 만약 야후슈아께서 그녀였다면 그분께서 무엇을 하셨을지, 세상은 야후와 그분의 반응들을 보게 될 것이다. 앞으로 좋은 직장을 갖기에 유망한, 한 젊은이가 진리의 원칙 안에 머물기 위해 모든 것들을 기꺼이 잃고자 할 때 신성의 품성이 그 안에서 보여질 것이다.

세상은 야후와께서 모든 환경들 속에서, 그리고 모든 상황들 안에서 어떻게 행동하셨을 지를 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의 품성, 그분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그분의 백성들의 생각들과 감정들, 말과 행동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들어가는 모든 사람은 이마 안에 야후와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다. 기록된 거기에, 그분께서 그들의 생각들의 중심이시기 때문이다. 어떤 누구도 스스로 준비될 수 없다. 오직 야후와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약속이다. 준비되기 위하여, 그분께서 친히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되실 것이다.

야후와의 이름을 부르세요. 그분을신뢰하세요. 당신도 역시 그 신성의 품성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그분은 또한 그분을 통하여 [야후와]께 나아오는 자들을 끝까지 구원하실 수 있느니라.” (히브리서 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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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 Second ed., 1983.

2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ed., 1828.

3 Adapted from “It Is No Secret (What God Can Do)” by Stuart Hamblen, copyright © 1950 (Renewed) Songs of Universal, Inc.

4 "With Arms Wide Open," written by Scott Stapp.

5 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ed., 1828.

6 Ibid.

7 Webster's New Universal Unabridged Dictionary, 1983.

8 "Kind,"American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Noah Webster, ed., 1828.

9 "Mercy,"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