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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스쿨: 하늘을 위한 교육

어린 시절 교육의 중요성은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자녀를 세상으로 이끄는 것은 중요한 책임이다.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는 모든 자는 자녀를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되기에 적합하도록 훈련시키고 꼴 지을 엄숙한 의무를 야후와 앞에 갖는다.

부모와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자녀들

삶 전체를 위한 토대가 놓여지는 시기는 어린 시절이다.

너무도 종종 부모들은 어린 시절의 아이들은 품성을 형성하기에, 지속적인 인상이 형성되기에는 너무 어리다라고 추정하며 어린 시절을 간과한다. 그러나, 삶 전체를 위한 토대가 놓이는 시기는 어린 시절이다. “태어나서부터 여덟 살까지의 기간이 어린 시절이라고 전통적, 국제적으로 정의된다. . . . 이 기간에 한 사람의 미래 신념과 태도들이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Tricia David, “What is early childhood for?” http://www.mcgraw-hill.co.uk.) 

로마 카톨릭 신자들은 어린 자녀의 정신과 품성 형성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제수잇 조직 설립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의 다음 표현이 종종 인용된다: “한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나에게 맡기라, 그러면 그를 인물로 만들어주겠다.” 어린 시절에 형성된 행동의 습관, 태도와 신념이 어른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폭력적, 반-사회적 행동을 보이는 많은 범죄 행위들의 뿌리를 추적해보면 그들이 어린 시절에 받았던 학대와 무시를 발견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부적절한 교육이 극복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극난, 투지, 야후와로부터의 은혜뿐이다.

어린 시절 교육이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부부는 몇 명의 자녀를 가질지 또한 고려해야 한다. 자녀를 너무 많이 가지면 모든 아이들을 적절하게 교육시킬 수 없게 된다. 아버지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느라 너무 바쁘고; 어머니는 너무 많은 의무를 지게 되어 각 아이들의 필요를 살피고 돌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불행한 자녀들은 너무도 종종 그들 홀로 남겨지게 되고, 그저 사탄의 왕국 구성원의 수를 늘리게 된다.

너무도 많은 부모들이 어린 시절에 받는 교육과 훈련의 중요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반면, 세상 정부들은 그런 교육의 영향력을 매우 잘 인지하고 있다. 야후슈아께서 친히 유감스러운 듯 인정하셨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들의 세대에서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니라.” (누가복음 16:8) 정부들은 종종 그들 자신의 정치적 안건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을 세뇌한다. 진리를 위해 서고,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독립적-사고를 가지고 생각할 수 있도록 훈련 받아온 젊은이들은 악한 정부의 권세들에게 하나의 위협이 된다.

표정 없이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들

학교는 정부가 다음 세대를 사상적으로 훈련시키며 독립성과 반대 의견을 근절하는 주요 수단이다.

오늘날, 홈 스쿨은 독일에서 불법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젊은이들 전체를 학교에서 세뇌시키며 그의 정치적 목표를 수용하도록 만들기 원하며 홈 스쿨을 처음으로 금지시켰다. 자녀들을 가정에서 교육시키고자 했던 부모들의 자녀들은 끌려갔고 테스트를 위해 정신 병원에 수감되었다.

2003년에, 프리츠와 마리안나 콘라드는 유럽 인권 위원회에 그들의 자녀들을 가정에서 교육시킬 권리를 달라고 호소하였다. 왜냐하면 정부의 교육 체계의 노골적 성 교육이 그들의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보았을 때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콘라드 부부는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누구도 교육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해서는 안 된다. 교육과 관련된 기능들의 행사에서, 정부는 부모의 권리를 존중하여 그들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철학적 확신과 조화를 이루는 교육과 가르침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어야 한다.

삼 년 후, 위원회는 독일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유럽 인권 위원회의 새로운 관리 방안은 독일의 나치 정권의 홈 스쿨에 대한 금지를 인정하며, 사회는 “별도의 철학적 확신”을 통한 반대 의견의 진전을 막는 데에 중요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 . .

독일 법원은 이미 “의무적 학교 출석보다 더 중요한” 이유 없이 가정에서 자녀들을 자라게 하고자 하는 부모의 “희망”을 규제했었다. 그 결정은 또한 부모가 자신의 자녀들의 교육을 지도할 “독점적” 권리가 없다고 밝혔다. (World Net Daily, http://www.wnd.com/2006/09/38145/.)

그 고등 법원의 판결에 동요되어, 스웨덴 또한 사실상 홈 스쿨을 불가능케 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 결과 많은 스웨덴인들이 홈 스쿨이 여전히 합법인 다른 나라들로 달아났다.

홈 스쿨 –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아빠

비록 온 세상이 진리에 반대하며 연합되었다고 할지라도, 자녀들에게 진리를 위해 서도록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의무다.

학교 교육 제도는 다음 세대를 사상적으로 훈련시키고 독립성과 분리를 근절하는 정부의 주요 수단이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참된 기독교인은 언제나 소수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온 세상이 진리와 반대하여 연합할지라도 자녀에게 진리를 위해 서도록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의무다. 젊은이가 진리를 위해 설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 생각을 가지고,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가 야후와와 함께 올바른 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개의치 않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완전히 반대된다. 쉽게 외부의 영향을 받는 아이들은 학교에서 다음과 같이 배운다:

  1. 진리는 권위로부터 나온다.

  2. 지능은 기억하고 반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3. 정확한 기억력과 반복은 보상을 받는다.

  4. 이행치 않으면 형벌이 따른다.

  5. 순응하라: 지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이러한 훈련으로 젊은이들은 진실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 성경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오히려 “실세” 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진리를 위해 그들 스스로 생각하고 진리를 위해 홀로 서라고 가르치지 않고, 세상적 기준에 순응하고 외부적 압박을 따르라고 가르친다.

현대의 학교 교육 제도는 그리스의 교육 제도에 기초한다. 그것은 여러 방식으로 불행한 환경을 조성한다. 야후와께서는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교육 받으며 배우는 모든 것에 있어서 영적 교훈들을 얻을 수 있도록 의도하셨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 제도는 (종교적 교육 뿐만 아니라) 학습 환경으로부터 부모를 배제시킨다. 선생님의 영향력과 권위가 더 위에 있게 된다.

너무도 종종 부모들은 긴 하루의 업무로부터 지쳐, 자녀의 모든 교육을 학교 선생님에게 맡긴다. 그러나, 선생님은 종종 정부의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편향된 - 정부가 승인한 내용만을 가르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학교 선생님은 하늘을 위한 품성을 훈련시키도록 준비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선생님의 일이 아니며, 또한 선생님은 학생들로 꽉 찬 교실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도, 기회도 얻을 수 없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품성의 형성은 세상적 기준에 순응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젊은이가 진리를 위해 설 용기를 갖고자 한다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독립적 생각을 가지고, 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가 야후와와 함께 올바른 한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개의치 않는 훈련을 받아야 한다

또한 다른 학생들로부터 받는 영향이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선생님이 아무리 좋은 분이라고 해도, 친구들에게 순응하라는 유혹은 거의 압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집에서, 자녀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부모님과 또한 자신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은 형제 자매와 함께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자녀들이 20-40 명 정도의, 모두 같은 나이의 친구들과만 함께 하게 된다. 이것은 독립적인 의견을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불행한 환경을 조성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을 예의 바르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도록 주의 깊이 훈련시키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자녀들과 같은 반 친구들의 영향으로 그들의 세심한 훈련이 실제적으로 전부 소용없게 된다는 것을 발견해왔다. 당신이 당신의 자녀를 학교에 보낼 때, 그들은 여러 배경의 다른 자녀들과 함께 하게 된다. 단지 몇 분의 시간만으로도 나쁜 단어들과 나쁜 행동들은 매우 쉽게 자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그런 것들은 부모가 몇 시간의 공을 들이더라도 원상태로 돌릴 수가 없다.

야후와의 백성들은 언제나 따로 있고 홀로 서라고 불러냄을 받아왔다. 그들의 사역을 위한 이러한 의의 영웅들을 준비시키는 교육은 정부가 운영하거나 승인한 교육 제도 안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파라오의 딸의 양자로서, 모세는 애굽의 모든 지식을 배웠다. 그것들 중 많은 것이 그가 애굽으로부터 야후와의 백성들을 이끌고 나오라는 부름을 받을 때 유용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것들 중 많은 것이 야후와께서 그로 하게 하고자 의도하셨던 사역에 적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야후와께서는 모세를 세상 왕궁으로부터 한 목자의 소박한 삶으로 이끄셨다. 철저한 고독 가운데, 그의 양들과 홀로, 모세는 하늘 학교에서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모세의 삶은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교육을 잘 받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친다. 교양과 문화를 세속적인 것으로 피해서는 안 되지만, 사실, 그것들은 하늘의 기준에 일치하는 선에서만 바람직하다.

어떤 이들은 야후슈아께서 성전에서 하신 다음 말씀으로 인해 그분께서 교육을 받지 않으셨다고 추정해왔다: “유대인들이 놀라서 이르되, 이 사람은 결코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매” (요한복음 7:15)

이 구절은 구주께서 문맹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장, 요한복음에서는 야후슈아께서 “허리를 굽히사 땅에 쓰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8:6 과 8.) 오히려, “이 사람이 결코 배우지 않았거늘, 어찌 글을 아느냐? 라는 질문은 야후슈아께서 그분 시대의 학교에 참석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분께서는 집에서, 어머니의 무릎에서 교육을 받으셨다. 랍비의 교육은, 야후와의 율법 보다는 그들의 전통을 강조하는 것으로, 그분의 위대한 사역을 위한 그분에게 적합하지 못했을 것이다.

성경을 함께 읽는 아빠와 아들오늘날 진리를 위해 서고자 하는 자들에게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세속적 기관들로부터 얻은 교육은 진화론, 성적 부도덕성과 심지어 각 정권의 정치적 안건들을 가르친다. 또한, 학교들은 생각의 독립성과 개성을 근절하며 순응할 것을 권장한다. 이것은 품성을 왜곡하여 야후와께 가납되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는 것이 더 중요하도록 만든다. 만일 젊은이들이 순응하도록 양육을 받는다면, 환경이 그것을 요구할 때 어찌 그가 진리를 위해 독립적으로 설 수 있겠는가?

창조 시의 참 일곱째 날 안식일 에 예배할 의무와 특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를 정규 학교에 보내기가 극히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 달력의 주간 싸이클이 태음태양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홈 스쿨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상황을 지혜의 원천이신, 야후와의 보좌 앞에 내려 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안전하게 따를 수 있는 길이 당신 앞에 열릴 것이다.

야후슈아의 축복을 받고자 부모들이 자녀들을 그분 앞에 데리고 왔을 때, 제자들은 구주를 “방해한다” 면서 나무랐다. 그러나, 야후슈아께서는 반대로 제자들을 나무라시며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Suffer) 그들을 막지 말라. 하늘 나라는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마태복음 19:14)

“허락하다 (Suffer)” 라는 단어는 아피에미 (aphiēmi) 로부터 왔으며 이것은 허락하는 것, 막지 않는 것 또는 멈추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자녀들과 젊은이들은 이상주의적이다. 그들은 높은 가치가 필요하다. 그들을 막지 않는다면 그들은 야후와께로 나아올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교육과 훈련은 고상한 부르심이며 중요한 의무입니다. 당신의 자녀를 야후와를 위해 훈련시키겠다고 다짐하세요. 그리한다면 전능하신 분으로부터 모든 자원들이 당신의 필요에 따라 공급될 것입니다. 소중한 영혼들을 훈련시키는 일에 천사들이 당신과 협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