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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사역: 숨겨진 덫을 주의하라!

다양한 종파들이 빛과 함께 전진하기에 실패할 때 많은 독립 사역들이 진리를 전하기 위해 일어났다. 슬프게도, 모두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독립 사역 대부분이 계속 전진하는 빛을 따르는 데에 실패했다. 하늘은 진리의 전진을 방해하는 모든 조직으로부터 구별되어 서라고 모두에게 요청한다.

하스테인 라그나르손

이태리에서 공격하는 하스테인 라그나르손 (1862, 작가: 미상),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asting_859_in_Luna.jpg

재앙적 결과가 나왔지만 만일 성공적 도모에 대해서는 상이 주어진다면, 분명 하스테인 라그나르손에게는 적어도 칭찬이 주어질 것이다. 하스테인은 바이킹이었다. 그는 로마를 정복함으로 얻어질 금, 영광, 전리품을 원했다. 그래서, 서기 859 년에, 그는 금, 영광과 전리품을 얻기 위해 62 척의 배와 함께 출발했다.

처음에, 기습과 약탈은 순조롭지 않았다. 그러나, 연습을 통해 숙달되어, 그들이 지중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그들이 선택한 그 일을 잘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나빴다! 그들은 험악했다! 그들은 바이킹이었다!

로마에 도착해서, 그들은 그 도시를 공격했다. 그들이 오래된 그 성벽들을 뚫고 들어갈 수 없었을 때, 하스테인은 자신의 사람들과 모여 그 성읍 안으로 들어갈 대안을 고안했다.

다음 날, 하스테인은 들 것에 실려 성문 앞으로 갔다. 그의 사람들이 로마의 경비병들에게 소리쳤다: “우리를 도와 달라! 대장 하스테인이 죽어가고 있다. 그는 죽기 전에 크리스챤으로서 침례 받기를 원한다.”

이것은 로마인들에게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한편으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들은 적군을 성문 안으로 들여 놓기를 원치 않았다.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어찌 죽어가는 이교도의 구원을 거절하면서 자신들 스스로를 크리스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인이 아니라, 로마인으로서, 우리는 그들의 말을 믿어주고 그들이 트로이의 목마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 없다고 가정할 것이다. )

그래서, 로마인들은 성문을 열고 그 소규모의 바이킹 대표단으로 하여금 그들의 지도자를 교회 안으로 나르도록 허락했다. 침례를 받고 마지막 의식을 치른 후, 하스테인은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 발을 딛고 일어서, 그와 그의 사람들은 싸우며 성문으로 나아가 그들의 나머지 사람들을 안에 들어오게 했다. 그 저녁, 로마는 전복 당했다…

…그 때 하스테인은 자신이 이제 막 약탈한 성읍이 로마가 아니라, 루나라는 것을 알았다. 로마는 250 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전통적 “실수로 인한 코미디” 였다. 의심할 여지 없이 실제 참가자들보다 관객들에게 더 웃긴 그런 것이다!

성경은 이와 유사한 “실수로 인한 코미디” 를 제시한다. 언뜻 보기에, 그런 극단의 상황은 거의 만화의 줄거리인 것으로 기대할만한 것이다. 이 구절은 무엇인가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를 묘사하려고 시도하며 그와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해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으로 들어가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린 것 같도다.” (아모스 5:19, 킹제임스)

그것은 거의 웃음거리다: 만화 속 작은 아이가, 사자로부터 달아나며 한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 가는데, 바로 앞에서 곰을 만나면서 정지하려다가 미끄러질 뿐이다. 크게 안심하며, 벽을 기대어 미끄러지지만, 뱀에게 물리고 만다. 이것은 단지 아이들을 웃기게 만들었던 만화 속에 그려진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전후 문맥을 함께 읽을 때, 웃음은 사라진다. 무서움이 느껴진다. 묘사되고 있는 것은 수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즐거움이나 기대가 아니라, 공포요 재앙이다.

그 전후 문맥을 함께 읽어보자:

야후와*의 날을 사모하는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날이 너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야후와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 그것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해 도망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으로 들어가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린 것 같도다. 야후와의 날은 어둠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빛이 아니니라. 심지어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 5:18-20)

뱀잠깐. 뭐라고? 이것은 우스운 만화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야후와의 날” 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야후와의 날은 재림 을 말하지만, 그것은 또한 재림에 선행하는 환란의 때 를 말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사용되어, 야후와의 날이 건강한 의미에서의 경외와 두려움으로 비춰질 수 있다. 환란의 가장 두려운 부분은, 재앙들이 부어지는 것으로서, 너무도 상황이 좋지 않아 성경에서 그것은 “야곱의 환란의 때” 로 불린다.

그러나 그와 같은 때조차도, 그 구절 다음엔 바로 구원에 대한 약속이 나온다: “아아,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그것과 비길 날이 없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로다.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예레미야 30:7)

아모스의 구절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너무도 위험한 것이어서, 그 구절을 부드럽게 하는 위로란 없다. 그것은 직설적인 경고다. 그것은 경고일 뿐이다.

아모스의 두려운 경고 안에 있는 주제를 반복하는 것은 야후와의 날이 빛이 아니라 어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어 언급된다. 성경에서 반복되는 것은, 야후와께서 그것을 확실히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신은 그것을 주목해야 한다. 요셉은 바로에게 이 원칙을 설명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야후와께서 그 일을 굳게 정하셨기 때문이니이다. 야후와께서 곧 그 일을 행하실 터이니.” (창세기 41:32)

아모스에서 어둠의 경고가 세 번 반복된다. “야후와의 날을 사모하는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야후와의 날은 어둠이요 빛이 아니니… 야후와의 날은 어둠이 아니겠느냐? 그것은 빛이 아니니라. 심지어 너무 어두우므로 그 날에는 밝음이 없지 아니하겠느냐?” (아모스 5:18-20, 킹제임스) 그 위협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진짜이며 영혼에게 그 위험은 극한 것이다. 여기에서 실수로 인한 코미디란 없다. 그 위험은 실제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어둠이 위험할 수 있나? 달이 어두워지고 태양이 달에게 빛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레미야는 의인이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영적 어둠여기서 말하고 있는 위험은 물리적 어둠이 아니다. 그것은 영적 어둠으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다윗은 기록했다: “당신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만일 진리인 야후와의 말씀이 빛으로 표현된다면, “어둠” 은 오류라는 것이 논리적이다. 환란의 때 야후와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영적 오류다. 그 위협이 너무도 커서 아모스는 그 경고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 경고는 예기치 않은 것이다! 결국,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약속했다: “지식이 증가하리라.” (다니엘 12:4)

그러나, 빛이 증가하면 위험도 증가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는 것에 안주하고 자신하게 된다. 라오디게아인들은 자신들이 부유하며, 재산이 늘어났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뽐내지만, 참된 증인은 선포하신다: “너는 비참하며 가련하고 가난하며 눈이 멀었고 벌거벗었도다.” (요한계시록 3:17)

이 마지막 때에 사람이 빠질 수 있는 최악의 영적 어둠은 어떤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진리를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는 오만한 추정이다. 이 신념은 심지어 더욱 위험한 상태로 이끈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빛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음으로, 어떤 새로운 빛도 원천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추정은 야후와의 영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추가적 광선을 받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닫는다. 밝고, 명확한 광선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빛에 대하여 완악해진 마음을 침투할 수는 없다.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끄럽지 않을 위치에 꼭 붙어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야후와] 께서 보내고, 말씀하시는 새로운 빛을 의심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안 된다. 정말로 우리는 우리가 이미 받았고 그 안에서 정착한 진리 외에 더 이상 빛이 필요 없다고 볼 수 없다. 우리가 이 위치를 고수하는 한, 참 증인의 증언이 바로 우리에 대한 꾸짖음이 되기 때문이다. “네가 불쌍하고 비참하며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부요하고 좋은 것이 많아져서 필요한 것이 전혀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야후와] 앞에서 그들의 진정한 상태에 눈이 멀어있는 것이다.1

영적 오만함의 어둠 속에 빠지는 위험은 너무도 커서 WLC 는 그 경고 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이 위협이 가장 큰 분야가 하나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인식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독립 사역 부분이다.

나팔로 분명한 소리를 내게 하라

독립 사역들은 진리를 전함에 있어 야후와를 위해 놀라운 일을 행해왔다. 교회가 더욱 세속화되고 진리로 나아가기를 실패함에 따라, 하늘은 서로 다른 여러 개인에게 증가된 빛을 위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빛을 나누기 위해 열심히 일해왔다. WLC 역시 여러 독립 사역 사이에 흩어진 소중한 광선들을 모음으로써 축복을 받았다.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은 평범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전보다 훨씬 더 멀리 진리를 전파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런 많은 개인들과 그들의 사역은 조직화된 종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교회들은 이러한 겸손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영향력으로 인해 위협을 느꼈다. 독립 사역은 강대상과 교회 출판물을 통해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타락한 교회들에 의해 법정에까지 불려갔다.

사탄은 진리를 전파함에 있어 독립 사역의 성공을 잘 인지하고 있다. 사탄은 그들을 대적하여 은밀히, 비참하게, 매우 효과적인 공격을 시행했다. 사탄의 공격은 두 가지 타겟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사탄은 이들을 공격했다:

  1. 독립 사역의 지도자들.

  2. 독립 사역으로부터 빛을 받은 개인들.

지도자들: 슬픈 사실은 그러한 독립 사역들 대부분도 그들을 핍박했던 교회들의 본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추종자들의 경제적 후원에 의존하기 때문에 새로운, 인기 없는 진리를 수용하는 데에 대부분 망설이게 된다. 그리하여, 대부분은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보다 앞서는 것은 어떤 빛이든지 거절해왔다. 새로운 빛이 그들에게 제시되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향력을 사용하여 추종자들에게 그것을 비난한다. 특정 분야에 대하여 독립 사역의 웹사이트나 그 출판물들을 살펴보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점은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지도자들이 다른 모든 빛을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할 때 발생한다.

독립 사역의 지도자들 

추종자들: 다양한 독립 사역자들에게 위임된 빛은 정직하게 진리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축복이 되어왔다. 하늘은 한 개인에게 모든 진리를 주지 않기에 모든 사람은 발견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개인이나 독립 사역도 다른 이에게 주어진 빛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찾는 정직한 많은 자들이 한 교회에서 다른 교회로 인도되고, 또 한 독립 사역으로부터 다른 독립 사역으로 인도되면서, 여기서 이 빛을 모으고, 또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빛을 모은다. 모든 이는 각자의 여정에 있어서 출발점이 서로 다르다. 문제는, 진리를 찾는 자가 독립성을 가지지 않고 조직을 따라가게 될 때 발생한다.

양 

사람이 “추종자” 정신을 가질 때, 그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진정으로 따라가고 있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그는 사람의 권위를 따라가고 있다. 이것이 사탄이 독립 사역을 공격하는 이유다. 사탄은 그들의 영적 교만에 호소함으로써 다른 이들에게 위임된 빛을 오만하게 비난하도록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이끈다. 하늘이 당신에게 은혜롭게 빛을 수여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더 이상 밝혀질 빛은 없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 위험은 매우 실제적이며 그것이 바로 WLC 가 요한계시록의 넷째 천사의 선포에 함께 참여하는 이유다. 그 외침은 이것이다: “내 백성아 너희는 그녀에게서 나와 그녀의 죄들에 참여하는 자가 되지 말고 그녀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 18:4)

이 구절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그녀에게서 나오라” 라고 잘못 번역되었다. 그러나, 나아 온다 는 것은 초청이다. 그것은 초청을 하는 조직은 어쨌든 예외가 되며 거기에 참여하는 것은 안전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듣는 사람의 마음에 일으킨다. 이로 인해 진리로부터 더 나아갈 수 없다. 누구도 이 신성의 명령으로부터 예외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긴박한 명령이다: 가라!

“바빌론의 한가운데서 나와 도망하고 각 사람이 자기 영혼을 건질지어다. 이때는 야후와의 원수 갚는 때니 그녀의 불법 가운데서 끊어지지 말라. 그가 그녀에게 보응하리로다.” (예레미야 51:6, 킹제임스)

그 위험은 실제적이다

과거에 교회, 그룹이나 독립 사역으로부터 소중한 빛을 받은 사람은 그곳에 대한 충성과 애정에 얽히는 위험에 놓여 있다. 그 그룹이 전진된 빛을 거절함에도, 진리가 어디로 인도하든지 그것을 따라 그곳을 벗어나기 보다는, 그 그룹에 머물러 있도록 유도한다.

이와 정확히 동일한 상황이 마지막 세대를 위한 선지자, 엘렌 화잇 의 계시에서 묘사되었다.

나는 줄로 함께 묶여 있는 듯한 무리들을 보았다. 이 무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한 흑암 가운데 있었는데 그들의 눈은 아래로 땅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들과 [야후슈아]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들 같지 않은 무리들 가운데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용모는 빛나고 그들의 눈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야후슈아] 에게서 나온 빛 줄기가 햇살처럼 그들에게 비추고 있었다. 한 천사가 나에게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그 빛 줄기를 받고 있는 개개인을 천사가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반면에 악한 천사들 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거절나는 한 천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 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때 한 영광스러운 빛이 그 기별을 받아들인 모든 자들을 환하게 비추었다. 어두움 속에 있던 자들 중 어떤 이들은 그 빛을 받고 기뻐하였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온 빛을 거절하면서 그것은 자기들을 흩어버리는 빛이라고 말하였다. 그 빛이 그들을 떠나자 그들은 암흑 속에 남게 되었다. [야후슈아] 께로부터 온 그 빛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들에게 임하는 귀중한 빛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였다. 그들의 얼굴은 거룩한 기쁨으로 빛났으며 그들은 진지한 태도로 [야후슈아] 를 쳐다보면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 고 외쳤다. 그들이 이렇게 외칠 때 나는 어두움 속에 있던 자들이 어깨와 옆구리로 그들을 밀어내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거룩한 빛을 지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을 매고 있던 줄을 끊어 버리고 그 무리에서 이탈하여 따로 섰다.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다른 무리에 속해 있으면서 그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사람들이 각기 아첨하는 말과 무서운 눈초리와 위협하는 제스처를 하면서 그 사이를 빠져 나와 약해진 줄을 팽팽하게 잡아 다녔다. 이들은 쉬지 않고 ‘[야후와] 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는 말을 되풀이하였다. 내가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묻자 그들은 스스로 그 빛을 거절한 목사들과 지도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조차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 그 때에 나는 조롱 당하던 자들을 향하여 ‘그들에게서 나와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고 외치는 한 음성을 들었다. 이 외침에 따라서 수많은 무리가 그들을 두른 줄을 끊어 버리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무리들을 떠나 이미 자유를 얻은 자들과 연합하여 기꺼이 그들의 외침에 동참하였다. 나는 아직 흑암 중에 있는 무리들 가운데 남아서 진지한 번민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소수의 무리를 보았다. 목사들과 지도자들이 이 여러 무리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줄을 더 굳게 잡아매었지만 여전히 그 열렬한 기도 소리는 그치지 않고 들려왔다. 그 때 나는 간구하던 자들이 손을 내밀어 [야후와] 안에서 즐거워하며 자유를 누리는 가운데 연합된 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하늘을 우러러 보며 위를 가리킬 때 ‘그들 가운데서 나와 따로 있으라.’ 고 대답하였다. 나는 자유롭게 풀려 나오기 위하여 투쟁하는 사람들을 보았는데 마침내 그들은 그들을 두르고 있던 줄을 끊어 버렸다. 그들은 끈을 더욱 더 조여 매는 힘에 저항하며 ‘[야후와] 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우리는 진리를 가지고 있다.’ 고 반복하는 주장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홀로 예배 드린다는 두려움으로 인해 뒤로 물러서지 말라. 함께 예배 드릴 그룹이 없다는 것이 진리를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조직이나 사람과 계속 연합해도 된다는 구실은 되지 못한다.

어두움 속에 있는 무리를 떠나서 보다 넓은 평지에 모여 있는 자유로운 무리에 가담하는 자들이 계속적으로 늘어났다. 그들의 눈은 위로 향하고 [야후와] 의 영광은 그들 위에 임했으며 그들은 기쁨으로 찬양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밀접하게 연합되어 하늘의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리들 주위에는 빛의 영향을 받긴 받았으나 그 무리와는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지 않은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주어진 빛을 사랑하는 자들은 모두 진지하게 위를 응시하고 있었으며 [야후슈아] 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시는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그들은 그분께서 어서 속히 임하시기를 고대하였다.2

그런 잘못된 충성심에 갇혀있지 말라. 당신의 충성은 야후와를 향해야 하고 그분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혼자 예배 드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현재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을 떠나지 못해서는 안 된다. 함께 예배 드릴 그룹이 없다는 것으로 인해 빛을 거절하는 조직이나 사람과 계속 연합해서는 안 된다. 진리를 찾는 자가 바벨론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광선이라도 (다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은 몇 가지의 광선을 거절해왔다) 거절하는 타락한 교회와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은 합당치 않다.

용감한 자로 서는 것                                                                          

야후와의 자녀들은 오늘날 홀로 서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것은 조직화된 사역, 그룹이나 종파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하는 것 을 의미한다. 어떤 누구도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른 누군가의 말을 취하여, 자기 자신의 마음이나 양심을 다른 이에게 굴복하여서는 안 된다. 야후와께서는 각 사람을 개별적으로 인도하신다. 각 사람은 개별적으로 인도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각 사람의 배경이 서로 다르며 신념 체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지식이 증가함에 따라, 신성의 지혜의 필요성도 증가한다. “새롭다” 고 해서 그것이 모두 진리는 아니다. 수용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별하는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어떤 누구도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른 누군가의 말을 취한다거나,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양심을 다른 이에게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

독립 사역의 지도자나 영적 친교를 따라갈 유혹에 빠지지 말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욕구다.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예배 드리고자 하는 것 또한 자연스런 일이다. 당신의 현재 신념과 일치하는 글들을 읽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독립 사역의 추종자가 되는 위험은 특정 교리에 묶인 조직화된 종파의 구성원으로 존재하는 위험과 정확히 동일하다. 당신이 존경하는 지도자나 당신이 진리를 배운 조직이 다른 진리들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할 때, 그들의 본을 너무도 쉽게 따르게 된다. 무엇이 진리인지에 대해 결코 사람의 말을 따르지 말며 당신 스스로 그것을 연구함 없이 어떤 다른 빛도 거절하지 말라.

진리를 향한 사랑이 어떤 그룹에 속하고자 하는 욕구보다 우선되어야 한다. 사탄은 소속되고자 하는 욕구를 이용하여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킨다. 이것이 성령의 음성을 침묵시킬 수 있다.

그런 그룹의 특성이 우리 그들 이란 논법을 만든다. 구성원들은 다수의 신념을 수용하라고 배운다. 더 나쁜 것은, 질문도 하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리를 적극적으로 찾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진다. 이의를 계속 제기하는 사람은 종종 소외 당한다. 그렇게 소외 당해도 순응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들은 조직으로부터 추방당한다. 그러한 정서적 협박을 통해 순응이 강요된다.

당신이 조직으로부터 추방 당한다고 해도, 낙담하지 말라. 기만 당하고 있는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당신은 분명 계속 기도할 수 있지만, 야후와의 모든 영웅들, 과거의 모든 영적 위인들은 홀로 서라는 부름을 받아왔다. 침례 요한은 고독한 사람으로 광야의 황무지에 거했다. 홀로 있으며, 그는 자신의 영혼을 향해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었고,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위대한 사역을 준비할 수 있었다. 존 번연은 그에게 주어진 빛에 침묵하지 않아서 베드포드 카운티 감옥에서 12 년을 보냈다. 그러나 그 12 년 동안, 야후와의 성령은 천로역정을 기록할 수 있도록 그에게 영감을 주었다. 차가운 감옥 속에서 그가 그려낸 책은 그 후로 여러 세기 동안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적 진리를 전해준 축복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마틴 루터도 사제들과 성직자들 앞에 홀로 서라는 부름을 받으며 많은 영혼들을 자유케 하는 진리를 위임 받았다.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매우 고독한 길 이다. 홀로 서라는 부름을 받을 때, 뒤로 물러서지 말라. 당신이 하늘로부터 존귀함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라. 모든 빛과 진리의 원천으로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으로 그 시간을 활용하라.

모든 진리를 수용하라!

하늘에서 보았을 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원에 걸쳐, 구속 받은 자들은 야후와의 깊은 것들을 연구하고 그분에 대하여 계속 배워나갈 것이다.

월드 라스트 챈스는 우리에게 밝혀진 모든 진리를 전파하기 위한 플랫폼이다. 그런 진리들에는 인기 없는 진리도 포함된다. 때때로, 어떤 독자들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은 반응을 보인다: “내가 이런 오류를 받아들이기 위해 WLC 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 형제들이여, WLC 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야후와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한다. 빛이 우리에게 밝혀진 한, 야후와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한, 우리는 그 빛을 더 멀리 더 넓게 전파할 것이다.

홀로 서는 것 

하늘은 오늘날 모든 빛을 수용하지 않는 모든 조직으로부터 분리되라고 모두에게 명하신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뽐내고 추가적인 빛을 거절하는 영적 교만만큼 부정한 것도 별로 없다.

참 되신 증인이 우리보다 더욱 우리의 상태를 잘 아신다는 것을 우리가 인정할 때, 그분께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덮어줄 그분의 의와, 우리의 죗됨을 위한 그분의 순결과, 하늘 믿음의 금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중한 약속이 성취될 것이다:

보라, [야후와] 가 말하노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엘로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야후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31:31-34)


* 모든 성경 인용문에 성별된 이름을 사용하였다.

1 E. G. 화잇, 리뷰 & 헤럴드, 1894년 8월 7일.

2 E. G. 화잇, 초기문집, 240-243쪽, 강조 글씨체 적용. 이 특정한 계시는 초기 재림 교인들의 경험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 때 그들은 야후슈아께서 기대했던 때에 오시지 않아 실망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험을 통해 배운 교훈들은 모든 시대를 위한 것이며, 그 때 그 교훈들이 그러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야후와의 백성들에게도 적용된다. 그 계시들이, 어느 정도로, 주어져서 야후와의 백성들이 오늘날 과거로부터 그 교훈들을 배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