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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탄의 정신 통제

인류의 영혼에 대한 전투는 정신에 대한 전투로서 시작된다. 사람의 생각은 그의 감정과 사상에 영향을 미치고 혼합된 감정들은 성품을 형성한다. 만약 생각이 불순하다면, 비록 겉으로 드러난 죄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사탄은 그 영혼에 대한 전투에서 이미 승리한 것이다. 가장 지혜로웠던 사람은 마음의 법칙에 관하여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듯이 그도 실제로 그러한즉” (잠언 23:7.) 

담요를 덮고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남자사탄이 영혼을 타락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 중 하나가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발견된다. 사람이 영화를 볼 때, 그의 감정이 개입된다. 만일 영웅이 악당을 치거나 죽이면, 보는 사람의 감정은 그 영웅과 공감하게 되고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것이 거짓말이든, 도적질이든, 신체적 폭력이든, 살인이든, 간음이든, 다른 어떠한 종류의 죄든지, 그를 응원하게 된다. 영화와 텔레비전은 사탄이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범죄를 행동으로 표출하는 배우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도 그와 같은 죄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가 1986년에 출시된 탑건이라는 영화에 대한 초기 반응들에서 보여진다. 그 영화의 시사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일반 대중들에게 상영되기 전에 그 영화를 본 사람들로서, 그 영화 속에 섹스 장면이 충분치 않다고 비평했다. 그 반응으로, 음란을 보기 원하는 사람들의 바람을 만족시키기 위해 섹스 장면이 그 영화에 추가되었다.

영화들 속에서 펼쳐지는, 죄는 영혼을 더럽힌다. 비록 시청자가 취한 행동은 그것을 보기만 한 것뿐인데도 그러하다. 엔딩 자막이 올라가도 그 영화를 본 것의 영향력은 멈추지 않는다. 종종,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 줄거리에 관해 계속 생각하고, 그 영웅이나 여걸의 역할에 관해 상상한다.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는, 묘사되는 배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 주간 연속극에 실제로 중독된다. 사람들은 친구들에게 그 배우들에 관해 말하고, 그 줄거리가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사로잡을 때까지 그 줄거리를 음미한다. 언제나, 사탄은 그들을 자신의 모습으로 꼴 지어 간다.

영화 속 극적 사건은 악의 가장 위험한 형태다.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악으로 보였던 것이, 계속된 노출 후에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죄와 악이 계속적으로 정신에 노출될 때, 정신은 죄와 악에 무뎌지게 된다. 한 때는 충격적이었던 장면들이 이제는 일상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살금 살금 진행된 타협이 정신으로 하여금 같은 수준의 정신적 흥분을 얻기 위해 더 심한 타락을 받아들이게 길을 터준다.

영화 (또는 심지어 텔레비전)을 보는 것의 해로운 결과들은 다른 많은 분야에서도 감지된다. 199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미국에서의 연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 중 삼분의 일, 중학교 3학년 학생들 중 사분의 일, 그리고 중학교 1학년 학생들 중 칠분의 일이 2주마다 적어도 한 번은 술에 취한다고 보고했다. 미성년자들이 술을 마시는 것 중 높은 비중이 텔레비전에서 술 마시는 것을 본 것에 대한 영향 때문이다.

[미국] 의무감 1982년 보고서는 알코올이 텔레비전 쇼 주요 시간대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음료라고 보고했다. . . . 1990년에, 주요 시간대에 시간당 술 마시는 것에 대한 8.1의 언급이나 묘사가 있었다. 의무감은 깊이 우려하며 말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악당이나 조역이 아니라; 선하고, 안정적이고, 좋아할 만한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다.” . . .

뉴질랜드 연구가들은 . . . 13세에서 15세의 아이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것과 18세에 술을 마시는 양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발견했다. 십대 초반에 TV를 더 많이 볼수록, 삼년에서 오년이 지났을 때 그들은 더 많은 술을 마셨다. (Lawrence Kelemen, The Dangers of TV.)

오래 진행된 한 연구는 텔레비전이 도입되면서 해당 나라들에서 살인 사건이 (몇 개의 나라들에서는 92-93% 증가) 크게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더군다나, 텔레비전과 영화를 보는 것은 IQ를 실제적으로 감소시킨다 – 비교적 적은 시간만 보는 사람들도 그러하였다.

생각 없이 텔레비전 앞에 앉아있는 남자캘리포니아의 한 통계는 학생이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볼수록, 학교에서 더 좋지 않게 행동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캘리포니아 교육감, 윌슨 라일즈는 말했다 . . . 학생들이 얼마나 숙제를 잘 하는지, 얼마나 지능이 뛰어난지, 그들의 부모의 수입이 어느 정도인지에 관계없이, 텔레비전과 시험 성적과의 관계는 실제적으로 같다. 그 통계에 기초하여, 라일즈씨는 교육적 목적들을 위해, 텔레비전은 “좋은 것이 아니며 그 전원을 꺼야만 한다.” 라고 결론지었다.  (Lawrence Kelemen, The Dangers of TV.)

드라마는 음탕함과 부도덕함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서구의 극장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그 기원을 갖는다. 그곳은 이교의 종교 의식들이 발전된 곳으로 적어도 기원전 12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중세 시대와 19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도, 남 배우들과 여 배우들은 일반적으로 부도덕적인 사람들로 비춰졌고 품위 있는 사람들은 그들과 관련되지 않으려 하였다.

영화가 생겨나면서, 평범한 사람들에게 드라마를 보는 것은 훨씬 더 널리 이용 가능하게 되었지만, 그 기원은 여전히 부도덕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초기 영화들은 술집이나 사창가에서 상영되었다. 그 후로 영화관들이 할리우드나 발리우드의 최신 영화들을 상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영화들은 여전히, 드라마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이끌고 황홀한 상상을 하게 하는 악의 효과적인 수단이다. 극장에 결코 가지 않는 사람도 그와 같은 영화들을 비디오나 텔레비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집에서 보기도 한다.

성경은 야후와의 의인들을 “별들”로 묘사한다:

땅의 티끌 속에서 잠자는 자들 중의 많은 사람이 깨어나 얼마는 영존하는 생명에 이르고 얼마는 수치와 영존하는 치욕에 이르며 지혜로운 자들은 궁창의 광채같이 빛나고 많은 사람을 의로 돌아서게 하는 자들은 별들과 같이 영원무궁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2, 3)  

할리우드와 발리우드의 “별들”은 야후와의 별들에 대한 사탄의 모조품이다. 대중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별들”을 우상화하고 그들의 타락한 생활 방식을 따라감으로써 죄를 짓도록 유도된다. 영화들과 영화 스타들은, 생각을 사로잡고 야후와에 대한 애정을 빼앗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야후슈아 안에서의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피해야만 할 우상 숭배의 한 종류이다.

성경을 가까이에 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자

영화들과 영화 스타들은, 생각을 사로잡고 야후와에 대한 애정을 빼앗는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야후슈아 안에서의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이 피해야만 할 우상 숭배의 한 종류이다.

영화들과 동영상들은, 그 자체로서, 본질적으로 죗된 것은 아니다. 책이나 다른 종류의 미디어와 같이, 영화도 야후와의 영광을 위한 교육과 정보 전달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순결한” 것이 되면 일상을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어렵다. 현실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삶의 모든 순간에서 직면하는 유혹이다. 어떤 이들은 마약, 술 또는 불법적 성 관계를 통해 일상을 탈피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을 어떤 다른 현실에 몰두함으로써 일상을 탈피하고자 한다. 이것이 책이나 컴퓨터 게임을 통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가장 대중적인 방법은 영화를 통해서이다.

삶은 고단하다. 이 삶은 세상 마지막까지 더 고단하여질 것이며 계속 힘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야후와께서 세파에 시달린 영혼을 위한 위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시다.  

[야후와]께서는 또한 학대 받는 자의 피난처가 되시며 고난의 때에 피난처가 되시리로다. [야후와]여, 당신의 이름을 아는 자들이 당신을 신뢰하리니, 당신께서 당신을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시편 9:9, 10)

영화를 통한 일상 탈피는 오직 그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만 지속된다. 삶의 스트레스는 그 영화가 끝나고 현실이 시작되면서 바로 다가온다. 영화나 다른 어떤 종류의 일탈을 통해 현실로부터 숨는 것은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오직 야후와께로 향함을 통해서, 힘과 도움을 위해 구속주께로 향함으로써,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

당신을 향한 그분의 약속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엘로힘]이니라. 내가 너를 강하게 하리라. 참으로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내가 내 의의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시험 외에는 너희가 어떤 시험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엘로아]께서는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시험 당하는 것을 너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그 시험과 함께 피할 길을 내사 너희가 능히 그것을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런즉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를 피하라. (고린도전서 10:13, 14)

야후와의 사랑 안에서 쉬며 그들을 돌보시는 그분을 신뢰하면서, 그들의 믿음을 야후와께로 두는 자는 사탄이 일탈을 통해 제공하는 스트레스로부터의 일시적 “안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영존하시는 [엘로힘], 야후와 곧 땅 끝들의 창조자께서는 . . . 그분께서 기진한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며 힘이 없는 자들에게 힘을 더하시느니라. 심지어 소년들도 기진하고 피곤하며 청년들도 완전히 쓰러지되 오직 [야후와]를 기다리는 자들은 자기 힘을 회복하리니 그들은 독수리같이 날개 치며 올라갈 것이요, 달려가도 피곤하지 아니하고 걸어가도 기진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40:28-31)

성경을 읽고 있는 젊은 남자이러한 축복은 자신의 뜻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과 야후와께 대한 그들의 바람들을 내어드리고 그들의 삶,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그분의 계시된 뜻에 순응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성경은 모두에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마태복음 5:48) 그에 대한 상급은 이 세상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상급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야후와]를 볼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5:8)

거룩한 천사들의 무리와 거룩하신 엘로힘과 함께, 순결한 환경에서 영원을 보내고자 하는 자들은 그들의 생각을 야후와와 일치시키고자 그들의 힘껏 모든 것을 할 것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열망해야 할 높은 기준을 제시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이든지 진실한 것과 무엇이든지 정직한 것과 무엇이든지 의로운 것과 무엇이든지 순수한 것과 무엇이든지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좋은 평판이 있는 것과 덕이 되는 것과 칭찬이 되는 것이 있거든 이런 것들을 곰곰이 생각하라. (빌립보서 4:8, 킹제임스)

이것이 모든 영화들이 검열 받아야 할 기준이다. 진실된 영화들도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그 이야기가 폭력을 정당화한다면, 그것을 봐야 하겠는가?

빌립보서 2:5은 모두에게 권고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야후슈아 안에도 있던 마음이니.” 진실된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세상이 제공하는 일탈과 유혹을 버리고 야후와를 선택하는 모는 자에게 구주께서 승리를 주실 것이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에 있는 모든 것 -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

세상도, 그것의 정욕도 사라지되 오직 [엘로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토록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