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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 신성의 복권 당첨?

예정론

당신은 이길 패를 쥐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어렸을 때부터 도박은 나쁜 것임을 배운다. 부모들과 주일 학교 선생님들은 하늘이 인류에게 소중한 선물들을 베풀었다는 것과 그것들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신성의 의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러한 선물들을 가지고 도박을 하며 낭비하거나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하나의 죄다. 그런데, 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구원 자체가 일종의 복권과 같은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예정론 교리는 프로테스탄트 개혁가 존 칼빈에 의해 16 세기에 처음 도입되었으며, 구원의 좋은 소식을 운이 걸린 신성의 게임, 일종의 주사위 게임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 받는 자들 중 하나로 찍으신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너무 나쁜 것이고, 매우 슬픈 것이 된다. 당신은 버림 받았다. 당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정론을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신념 안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독실하지만, 이 교리는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해석하고 왜곡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이 글은 예정론 교리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에 대해 논할 것이며 어떻게 이 신념들이 계시된 야후와의 말씀과 상충되며, 또한 성경에 계시된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나타내는지 설명할 것이다.

예정론은 다섯 가지 특성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섯 가지 신념은:  

  1. 총체적 타락/무능 – 사람은 희망 없는 악이며; 진정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2. 무조건적 선택 – 우리는 전적으로 완전히 악하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은 전적으로 야후와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정하신 것에 달려 있다.

  3. 제한 속죄 – 야후슈아께서는 야후와께서 미리 구원하기로 정한 사람들만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은 버림 당할 자들 (또한 야후와에 의해 버림 당하도록 미리 정함 받은 자들) 을 위한 것이 아니다.

  4. 불가항력적 은혜 – 야후와께서 구원하기로 미리 정한 사람들은 버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신성의 은혜를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5. 견인 – “영원한 보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언뜻 보면,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내용들 중 일부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과 자세하게 비교하면, 이 내용들이 논리적이며 또한 성경에서 발견되는 내용과 일치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제 야후와의 명백한 말씀과 비교하며 이 다섯 가지 내용들 각각에 대하여 살펴보자.

 

총체적 악

총체적 타락/무능


사람은 희망 없는 악이며 진정한 “선” 을 행할 능력이 없다.

모든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야후와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10 과 23.)  죄가 인류를 낮추었다는 것에 대하여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이사야가 선포한다: “우리는 다 부정한 물건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 같으며” (이사야 64:6)

그러나, 예정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러한 주장에 오류가 나타난다. 만일 사람이 완전히 전적으로 악하다면, 우리는 악으로부터 돌이키고 회개하라는 부름에 순종할 수 없을 것이다:

“야후와 엘로아가 말하노라. 내가 살아 있음을 두고 맹세하노니 사악한 자가 죽는 것을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그 사악한 자가 자기 길에서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오 이스라엘의 집아, 너희는 돌이키라. 너희는 너희의 악한 길들에서 돌이키라.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에스겔 33:11) 

게다가, 만일 사람이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책임 지워질 수 없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잔인하고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무조건적 선택


우리는 전적으로 완전히 악하기 때문에 인류의 구원은 야후와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정하신 것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 주장은 성경적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인류가 논쟁의 여지 없이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누군가의 구원이 전적으로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은 자유 의지의 행사를 원천적으로 막는다. 예정론은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를 미리 정하신다고 가르친다. 전통적 칼빈주의자들은 “이중 예정론”을 가르친다. 그것은 야후와께서 또한 버림 당할 자들도 미리 정하셨다는 신념이다.

그러한 신념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그것은 개인의 책임을 없앤다. 가인이 아벨을 살인한 것에 대한 책임이 가인이 버림 당할 것으로 “미리 정해졌으며” 따라서 그는 그의 형제를 죽이도록 “미리 운명 지어졌다” 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라진다. 이것은 사람의 잘못된 행동들의 결과들로부터 그 사람을 면제시켜 준다. 이렇게 되면, 사람의 잘못된 행위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건들에 대하여 개인의 책임을 추궁할 수 없다. 사실, 그것은 정확히 가인이 시도하려고 했던 바로 그 일이다.

성경은 그 살인 사건 후 야후와와 가인 사이의 대화에 대하여 기록한다: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과 이야기를 하니라. 그 뒤에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자기 동생 아벨을 치려고 일어나 그를 죽이니라.

야후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매 (창세기 4:8-9)

이 신념의 오류가 야후와께서 가인의 변명을 거절하실 때 바로 나타난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동생의 피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부르짖느니라.

땅이 자기 입을 벌려 네 손에서 네 동생의 피를 받았은즉 이제 네가 땅에게 저주를 받았나니,

네가 땅을 갈아도 이후로는 땅이 자기 효력을 네게 내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땅에서 도망하는 자가 되고 방랑하는 자가 되리라, 하시매 (창세기 4:10-12)

무조건적 선택과 같은 두번째 문제는 야후와께서 죄를 미리 정하셨다는 것을 암시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칼빈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그러하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 만일 야후와께서 모든 것을 미리 정하셨다면, 그분께서 버림 당할 자를 선택하실 때 그분은 또한 죄도 미리 정하신 것이 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성경과 명확하게 모순된다: “아무도 자기가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야후와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야후와께서는 악으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야고보서 1:13)

잃은 양제한 속죄


야후슈아께서는 야후와께서 미리 구원하기로 정한 사람들만 위해 죽으셨다. 그분은 잃어 버린 자들을 위해서 죽지 않으셨다.

예정론과 일치하는 그런 선택적 구속은 성경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성경은 야후슈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이사야의 숭고한 예언에서, 그는 기록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야후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자기 영혼이 해산의 고통을 치른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기리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리니 그가 그들의 불법들을 담당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로 하여금 위대한 자들과 몫을 나누게 하리니 그가 강한 자들과 노략한 것을 나누리라.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쏟아 부어 죽기까지 하며 범법자들과 함께 계수되었기 때문이니라. 그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였으며 범법자들을 위해 중보하였느니라. (이사야 53:6, 11-12)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널리 인용되는 구절들 중 하나인 다음 구절은, 야후슈아께서 미리 선택된, 운 좋은 소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선포함으로써 이것을 더 강조한다.

야후와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야후와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불가항력적 은혜불가항력적 은혜


야후와께서 구원하기로 미리 정한 사람들은 버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신성의 은혜를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이 신념은 구원의 계획이 놓여 있는 근간 자체를 거절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 신념은 아무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없다고 가르친다.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은 죗된 본성을 물려 받았다. 야후와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 (베드로후서 3:9) 야후와께서 그분의 아들을 희생하셨기에 모든 사람은 그들 스스로 두번째 기회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이 선택권이 어떤 이는 구원 받기로 택하고 다른 이는 버림 당하도록 거절하는 어떠한 신성의 결정에 의해 제거된다면, 야후슈아의 죽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

이 신념은 어떤 사람이 아무리 고집스럽게 반역하고 죄를 사랑하며 죄를 고집할지라도, 야후와께서 구원하시기로 정하셨다면 결코 버림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아무리 야후와를 닮고자 갈망한다고 해도, 그가 버림 받기로 미리 선택되었다면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신념이다. 이 파괴적 신념은 결정권이 오직 각 개인에게 있다는 성경의 명백한 언급들에 의해 지지 받지 못한다. “주의 날이 판결 골짜기 안에서 가까우므로 많은 무리, 많은 무리가 판결 골짜기에 있도다.” (요엘 3:14)


견인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

한번 구원, 영원한 구원“불가항력적 은혜”의 교리와 함께, 일단 구원 받았다면, 그가 어떠한 일을 행해도 버림 받을 수 없다는 신념은 사람의 의지를 노예화한다. 어떤 사람도 “자유로운 도덕적 존재”가 아니다. 사람의 선택의 자유는 그가 구원의 선물을 받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은 버림 당할 가능성에 대해 언급했다 - 심지어 그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준 후라도 그러하였다!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시킴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뒤에 어떤 방법으로든 내 자신이 버림받은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전서 9:27)

예정론 교리는 성경에서 발견되는 다른 원칙들과 모순된다. 성경에 기록된 구주의 말씀들 가운데, 마지막 명령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침례를 주며 . . . . 무엇이든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느니라.” (마태복음 28:19-20) 만일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사람을 이미 정하셨다면, 그들은 어찌하든 구원 받을 것이므로 복음 전파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만일 야후와께서 구원 받을 자들을 이미 정하셨다면 가족이나 친구들도 야후와의 미리-선택하심에 의해 구원 받거나 버림 당하며 누구도 이 문제에 있어 창조주의 생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은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 적절히 설명된 중보 기도라는 성경의 원칙을 부인한다. 이스라엘이 그들 위에 왕을 세우고자 고집했을 때, 그들은 결국 그들의 주권자로서의 야후와를 거절했다. 그 때에, 찢어지는 마음으로, 사무엘이 했던 말이 오늘날까지 울려 퍼진다:

또한 나로 말하건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쉼으로 내가 결단코 야후와께 죄를 짓지 아니하고 선하고 바른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터인즉

야후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얼마나 큰일들을 행하셨는지 깊이 생각하여 오직 그분을 두려워하며 너희 마음을 다해 진리 안에서 그분을 섬기라.

그러나 만일 너희가 여전히 악하게 행하면 너희 곧 너희와 너희 왕이 다 소멸되리라. (사무엘상 12:23-25)

여기에 미리 정해진 것은 전혀 없다. 사무엘은 그들이 만일 계속적으로 그들의 창조주를 반역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임을 설명하고 있다. 모세가 죽기 바로 전,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야후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선택의 자유를 행사하여 의를 선택하라고 애원했다: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야후와 너희 엘로아를 사랑하고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며 또 그분을 굳게 붙들 수 있으리라. 그분은 너희 생명이시요, 또 너희 날들을 길게 하는 분이시니. (신명기 30:19-20)

모세는, 전능하신 분의 친구로서, 야후와께서 마치 “사람이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 얼굴을 마주 대하여” 말씀을 나누셨던 겸손한 종이었다. (출애굽기 33:11) 그것은 각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음으로 예정론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기각된다.

가장 나쁜 것은, 예정론이 야후와의 품성을 잘못 나타낸다는 점이다. 예정론은 선택 받지 못한 자들에게 불공정하다. 그들 자신의 잘못 없이도 “버림 받기”로 미리 정해졌다는 것은 부당하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이 죄로 부패되었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예레미야 17:9)  구원은 야후와의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야후와의 선물이니라.” (에베소서 2:8)  그런데 사람의 선택이 제거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오류이다.

성경은 “야후와는 사랑이시라” 고 선포한다 (요한일서 4:8) 사랑의 엘로아는 그분의 소중한 자녀들로부터 선택의 자유를 거두시지 않을 것이다. 마치 어떤 신성의 베팅 판이 돌아가며 구원 받을 자를 택하고 영원히 버림 받을 자는 훨씬 더 많이 택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은 없다.

창조주께서 그런 행동을 하신다는 것은 가당찮다. 성경은 창조주의 품성을 밝혀준다:

야후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자기 힘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는 자기 재물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자랑하는 자는 이것 즉 자기가 깨달아 나를 아는 것과 또 내가 땅에서 인자함과 판단의 공의와 의를 집행하는 야후와라는 것을 자랑할지니라. 나는 이 일들을 기뻐하노라. 야후와가 말하노라. (예레미야 9:23-24)

예정론 교리는 매우 파괴적인 신념이다. 예정론은 사랑의 창조주를 잔혹하고 무정하고 제멋대로인 분으로 제시한다. 예정론은 성경과 모순된다. 성경은 야후와를 아무도 멸망치 않기 원하시는, 사랑의 아버지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러한 냉정하고 잘못된 신념으로 인해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이러한 품성이 야후와께 속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서고, 야후와와 사람의 원수인 사탄에 의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오히려 그분을 탓하게 된다.

구속주의 품성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이 그 영혼과 창조주 사이에 들어온다. 야후와께서는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신념을 버리고 그분께서 당신을 위해 베푸신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초청하신다. 당신은 당신을 무한한 사랑의 끈으로 그분께 이끌 신성의 품성 안에 있는 심오한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다. 야후와께서는 그분의 창조 법칙을 떠나 임의적으로 누구는 구원하고 나머지 모두는 영원히 버림 받게 선택하시지 않는다!  반대로, 창조주께서는 모든 사람을 그분 자신에게로 이끌고자 적극적으로 관여하신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갈망하시기 때문이다.

잃은 자를 구하는 것 

“옛적에 야후와께서 내게 나타나사 이르시되, 참으로 내가 영존하는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노라, 하셨도다.” (예레미야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