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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저녁 식사: 유월절인가? 아닌가?

마지막 저녁 식사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질문을 일으켜 왔다. 그것이 유월절의 식사였나? 아니면 그것은 구주께서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는 친교 시간으로 제정하신 그냥 일반적인 식사였나?

요한복음을 보면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 전 날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제 유월절 전에,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때가 이르러 그분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던 그분 자신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에 . . .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다 . . . .” (요한복음 13:1, 2, 5)

반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어떤 구절에서는,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제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당신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도록 우리가 예비하려 하오니 어디에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복음 26:17)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더라. (마가복음 14:1)

그때에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야 하는 때, 곧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 이르매, 그분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해 유월절을 예비하여 우리가 먹게 하라.” 하니 (누가복음 22:7, 8)1

어떤 이들은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 식사였다고 추정되어 온 것은 히브리인들의 하루가 동틀녘이 아니라 일몰에 시작한다는 오래된 신념 때문이라고 추론한다. 야후슈아께서 유월절, 안식일 전 날 (요한복음 19:31과 마가복음 15:42참조) 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성경이 밝혀주기 때문에, 만약 그 “날” 이 일몰에 시작한다면, 그 마지막 저녁 식사는 유월절에 이루어진 것이 되고 그것은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였던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그 저녁 식사가 정말로 유월절 식사였다면,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성경에 “예비” 라는 단어의 반복된 사용이 그 십자가 처형의 날에 적용된다는 것이 그 저녁 시간의 유월절 식사 (준비되어야만 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마태복음 27:62, 누가복음 23:54, 요한복음 19:31.)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경상 그 주간의 여섯째날을 “예비일” – 곧 안식일을 위해 준비하는 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그 단어의 사용은 오직 아빕월 14일 또는 유월절을 위해서만 기록되었다. 유월절 식사는 그 저녁에 발생했고,그 식사 날이 “예비” 로 언급되었다.

십자가의 그 시체들을 그렇게 빨리 내리려고 했던 모든 이유는 그 다음 날이 무교절의 첫 날, 큰 안식일일뿐만 아니라, 그 날이 유월절 저녁 식사를 위한 “예비” 였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저녁 식사는 야후슈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날 이루어졌다. 만약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실제로 유월절 식사에 발생했다면,다음 날이 반복적으로 “예비”라고 언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만약 그 저녁 식사가 실질적인, 공식적 유월절 식사였더라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야후와의 어린양” (요한복음 1:29) 이라는lamb 야후슈아의 조화로운 상징성이 깨지게 된다. 그의 피를 통해 우리가 건너 뜀(passed-over) 을 당하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되신 야후슈아의 피의 아름다운 상징성이, 만약 그분이 그 날 저녁 희생의 시간에 죽지 않으셨다면, 깨지게 된다.

성경을 주의 깊이 자세히 연구하면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사실 그 유월절에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 복음서에 주어진 마지막 저녁 식사의 시기에 관한 반대의 주장들에 대한 설명을 이 글에서 다루지는 않겠다. 그와 관련한 설명들은 유월절 퍼즐이란 글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 기사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가 전통적인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는 추가적인 증거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명확하게 그 마지막 저녁 식사의 시간에 그 “절기” (일반적으로 유월절 저녁 식사를 말하는 것으로) 식사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나타낸다. 저녁 식사의 식탁에서, 열두 명의 제자들 중 하나가 그분을 배신할 것이라고 야후슈아께서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제자들은 크게 당황했다. 요한이 “그가 누구입니까?” 라고 조용히 물었을 때, 야후슈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빵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그리고 그 빵을 찍어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요한복음 13:26)

이 때에, 유다는 구주를 배반하기로 완전히 결심했다. 성경은 야후슈아께서 유다에게 다른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말씀하셨을 때 사탄이 완전히 유다를 지배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제자들이 오해했다는 것을 보면, 마지막 저녁 식사가 사실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빵 조각을 받은 뒤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가매 그때에 [야후슈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라. 이제 상에 앉은 자 중에는 아무도 그분께서 무슨 뜻으로 그에게 이것을 말씀하셨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 가방을 가졌으므로 [야후슈아]께서 그에게,절기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라.” 고 말씀하셨거나 또는 그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한다고 하신 줄 생각하더라. (요한복음 13:27-29)

킹제임스 버전은 29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그 가방을 가졌으므로, [야후슈아]께서 그에게,절기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라.” 고 말씀하셨거나 . . . .”

뉴 아메리칸 스탠다드 성경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어떤 이들은 추측하기를, 유다가 돈 가방을 가졌으므로, [야후슈아]께서 그에게 ‘절기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 . . .”

컴플릿 유대인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유다가 공동 자금을 맡고 있었으므로, [야후슈아]께서 그에게 ‘축제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사라’고 말씀하셨다 . . . .”

명백하게, 만약 야후슈아와 그분의 제자들이 유월절 식사를 그 때 막 마쳤던 것이라면, 제자들은 유다에게 하신 그분의 언급을 잘못 해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유다가 유월절을 위해 무언가를 구매해야 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었다.

훨씬 더 강력한 증거가 야후슈아께서 그분의 몸의 상징으로서 나누셨던 빵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된 실제 단어들에서 발견된다.

unleavened bread히브리 공동체에서, 이스트 (또는 누룩)는 죄의 상징이었다. 이스트의 적은 양으로 큰 빵의 형태로 변형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그것은 마음 속에 소중하게 여겨진, 심지어 하나의 작은 죄가 그 영혼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파괴시키는 지에 대한 적절한 상징이었다. 이 상징이 야후슈아께서 제자들에게 충고하실 때 사용되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고 주의하라.”  (마태복음 16:6)

제자들은 이 묘사를 쉽게 이해해야 했지만, 그들은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추론하기를, “우리가 빵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 . . [야후슈아]께서 그것을 아시고, “내가 너희에게 빵에 관하여 말한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한 것임을 어찌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느냐?” 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그들은 그분께서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교훈을 말씀하신 것임을 이해했다. (마태복음 16:7, 8, 11, 12)

unleavened bread and grape juice야후슈아께서 교만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야후와의 율법보다 더 위에 두었던 죄 많은 “사람들의 교훈”에 대한 상징으로 누룩을 사용하고 계셨다. 오늘날도 여전히 잘못된 “사람들의 교리들” 이 많은 신념들의 체계에 영향을 미친다. 조직화된 종교의 신조, 교리, 전통들의 오류가 알지 못한 채로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 주의 깊이 연구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신념이 수 백 년간 고수되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의 유효성이나 성경의 근거에 대한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진리 전체를, 또한 진리만을 알고자 갈망하는 모든 자는 성경의 빛으로 그들의 신념들의 각각을 주의 깊이 연구할 것이다.

야후와의 명령에 의해, 무교절 기간 동안 이스트를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트와 부풀게 하는 누룩과 같은 모든 첨가제들이 집으로부터 제거되어야 했다. 그 절기의 첫 날이 일곱째 날 안식일에 시작했기 때문에, 이스트를 제거하는 일은 예비일 (아빕월 14일) 에 행해지는 “예비”하는 일의 부분이었다.

유월절 식사는 언제나 무교병과 함께 먹었다. 그것은 어떤 죄도 알지 못했던, 생명의 떡이신 야후슈아에 대한 아름다운 상징이었다. 따라서, 만약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공식적인 유월절 식사였다면, 그것은 누룩 없는 빵과 함께 먹었어야 했을 것이다.

히브리어에서, 영어의 “누룩이 들어간 빵”을 묘사하는 오직 하나의 단어가 있다. “누룩 없는 빵” 이라는 영어 문구 역시 하나의 히브리 단어에서 왔다.누룩이 들어간’ ‘누룩 없는 빵’ 이라는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추가적인 단어가 영어에 더해져야 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서는 그 개념이 하나의 단어로 해결된다. 아람어와 그리스어에서도 마찬가지다.2 

히브리어

누룩 없는 빵 =matzah(하나보다 많을 때는 matzot.)

누룩이 들어간 빵 =lekhem(하나보다 많을 때는 lekhemim.)

아람어

누룩 없는 빵 =patireh

누룩이 들어간 빵 =lakhma

그리스어

누룩 없는 빵 =azumos(하나보다 많을 때는 azumon또는azuma.)

누룩이 들어간 빵 =artos(하나보다 많을 때는arton.)

무교절을 말할 때, 언제나 예외 없이, 성경은 이스트가 들어가지 않은 빵 – 누룩 없는 빵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출애굽기 12:18은 그 첫 달의 14일에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것에 관해 말한다.

출애굽기 23:15은 다시 이스트 없는 빵을 위한 단어를 사용하는 누룩 없는 빵의 절기를 말한다.

레위기 23:6은 누룩 없는 빵의 절기 동안 이스트 없는 빵을 먹으라고 명령한다.

민수기 28:17은 누룩 없는 빵을 칠일의 절기 동안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basket of unleavened bread예외 없이, 누룩 없는 빵의 절기에 대한 각 설명에서, 그 절기 동안 먹어야 하는 이스트 없는 빵을 말하며 matzot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것은 14일 저녁 유월절 식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반대로, 레위기 23:17은 오순절에 야후와께 드려져야 하는 두 덩이의 빵에 관해 말한다. 그 구절은 정확히 설명한다: “그것들은 고운 밀가루에 누룩을 넣어 구운 것이요.” 이 실례에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lekhem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누룩을 넣어 부풀려진, 이스트를 넣은 빵이었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그것이 아람어가 사용되었든지 그리스어가 사용되었든지, 성경의 설명은 일관된다.

마태복음 26:17이제 누룩 없는 빵의 첫 절기의 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당신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도록 우리가 예비하려 하오니 어디에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 구절은 유월절 퍼즐에서 설명된 것처럼, 약간의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위에서) 기울임 효과를 준 단어들은 원본에는 없으나, 번역자들에 의해 추가되었다. 또한, “첫”이라는 단어는 실제로 “전” 을 의미한다.3 그러므로 그 문장은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야 더욱 정확하다: “이제 무교절 전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와서.” 여기에 사용된 단어들은, 아람어이든지 그리스어이든지, 유월절과 무교절을 위해 사용되는 이스트 없는 빵을 말한다.

마가복음 14:1 12–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절기더라. . . .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첫 날 곧 그들이 유월절 어린양을 죽이는 때에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께 이르되, “당신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도록 우리가 가서 예비하려 하오니 어디에서 하기를 원하시나이까?”4

다시, 그리스어와 아람어 둘 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들이 이스트 없이 구워진 빵,  누룩 없는 빵을 말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누가복음 22:1 7 – “이제 유월절이라고 불리는 누룩 없는 빵의 절기가 가까이 다가오매 . . . 그 때에 누룩 없는 빵의 날이 이르렀으니,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때라.”

그리스어와 아람어의 단어들이 다시 동의한다: 이러한 구절들이 이스트 없는, 누룩 없는 빵을 말하고 있다.

만약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이었다면,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들이 구주께서 나누어 제자들에게 주신 그 “빵” 이 누룩 없는 빵을 위해 위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단어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loaves of bread마지막 저녁 식사와 관련된 복음서를 주의 깊이 검토하면 깜짝 놀랄만한 단어 선택이 드러난다: 사용된 빵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는 점이다! 이스트가 들어간 빵!

마태복음 26:26 – “그들이 먹을 때에, . . . [야후슈아]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기에서 “빵”을 위해 사용된 단어는 누룩이 들어간 빵이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아람어와 그리스어 둘 다 일반적인 이스트 빵을 위한 단어를 사용한다.

마가복음 14:22 – “그들이 먹을 때에, . . . [야후슈아]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아람어와 그리스어 단어들이 그 빵이 누룩을 넣어 굽는 일반적인 빵이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누가복음 22:19 – “또 그분께서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시고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준 내 몸이라.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다시, 아람어와 그리스어가 그들의 단어 선택에 있어서 그 빵이 누룩 없는 빵이 아닌, 일반적인 빵이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요한복음은 그 빵에 관해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에 발을 씻겨주는 것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바울의 글들은 그 마지막 저녁 식사에 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고린도전서 11:23-24–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내가 [야후와] 께 받은 것이니 곧 [구주, 야후슈아]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bread and juice그 밤에 빵을 집으사 감사를 드리신 뒤에 그것을 떼시고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것을 행하라.’ 하시고”

바울의 설명은 복음서의 단어 선택에 동의한다: 사용된 빵은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

고린도전서 11:26 – “이는 너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야후슈아의] 죽으심을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이니라.”

또 다시, 아람어와 그리스어 둘 다 여기에 언급된 그 빵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었다는 것에 동의한다.

고린도전서 11:27 – “그러므로 누구든지 [야후슈아]의 이 빵과 이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야후슈아] 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가 있으리로다.”

아람어와 그리스어가 동의한다: 사용된 단어는 누룩이 들어간 일반적인 빵을 위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11:28 – “오직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뒤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지니.”

아람어와 그리스어가 다시 동의한다: 사용된 단어는 누룩이 들어간, 일반적인 빵을 위한 것이다.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의 국가적인 축제였거나 사용된 그 빵이 누룩 없는 빵이었을 길이 없다. 명백하게, 그 마지막 저녁 식사는 유월절 날에 발생했다.

야후슈아께서는 자신이 유월절 식사가 이르렀을 때 죽어있을 것을 아셨다. 그 마지막 저녁 식사는 그분께서 야후와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마지막 식사였다. 유월절 저녁 희생의 정확한 때에 이루어진 그분의 죽음은 완벽한 성취였다. 아담과 이브가 처음 에덴으로부터 그들의 연약한 발걸음을 내디디며 떠난 이후로 죽임을 당해온 모든 어린양들의 위대한 표상이었다.

이 상징의 아름다움이 바울에 의해 그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충고할 때 상술된다: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를 부풀게 함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작은 죄가 그 사람 전체를 손상시킨다.]

그러므로 너희는 참으로 누룩 없는 자들인즉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제거하라.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야후슈아]께서 진정으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기 때문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 절기를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의와 사악함의 누룩으로도 말며, 오직 진실과 진리의 누룩 없는 빵으로 하자. (고린도전서 5:6-9)

마지막 저녁 식사 때에 야후슈아에 의해 제정된 그 친교의 예식은 그분의 죽음을 기념한다. 야후슈아께서 누룩이 들어간 빵을 사용하셨다는 이유만으로 그 예식을 진행할 때 누룩이 들어간 빵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유월절의 누룩 없는 빵과 포도 주스5를 사용하는 것은 두 예식에 있어 매우 본질적인 것이다.

야후슈아는 완벽하셨으며, 야후와의 죄 없는 아들이셨다. 생명의 빵으로서, 룩 없는 빵이 그분에 대한 완벽한 상징이었다. 그분께서는 분명히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했던 그분의 마지막 식사를 위해 누룩 없는 빵을 요구하실 수 있으셨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깨어지는, 그분의 몸에 대한 상징으로서 누룩을 넣어 구운 일반적인 빵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그분께서 우리의 대속자시라는 사실에 의해 이해될 수 있다.

[야후와] 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야후와]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5:21)

Grape Juice and Bible야후슈아께서 누룩이 들어간 빵을 그분의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나의 몸이라.” (누가복음 22:19) 야후슈아께서는 거룩하셨고 죄가 없으셨다. 그러나 우리의 대속자로서,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떠 맡으셨다. 그 결과는 그분을 믿는 모든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분의 흠 없는 의가 우리를 위한 그분의 희생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모든 자에게 값없이 주어진다. 이것이 그 예식에서 누룩 없는 빵의 사용에 의해 상징화되었다. 우리는 안전하게 건너 뛰어(passed-over)지고, 깨어진 율법의 요구들이 우리를 위해 흘려진 그분의 피에 의해 충족된다.

우리가 야후슈아를 기억하며 누룩 없는 빵을 먹을 때, 우리는 그분께서 오실 때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한다. 우리는 사람에게 주어졌던 것 중에 가장 큰 선물,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야후와의 어린양을 기념한다.


관련 내용:

유월절 퍼즐


1 누가복음 22:11, 13, 15도 참조하세요.

2 그 추가적인 단어들은 같은 단어에서 형태만 다른 것뿐이다. 즉, 같은 단어의 단수형과 복수형이다.

3 “첫” 이라는 그 단어는 “맨 먼저의 (시간, 장소, 순서 또는 중요성에서)” 를 의미하는 πρώτος (prōtŏs)라는 단어에서 왔다. 그것은 “시작” 과 “가장 좋은” 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 으로도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다. πρώτος (prōtŏs) 이 “전” 으로 번역될 때 마태복음 26:17은 설명한다: “이제 누룩 없는 빵 전에 제자들이 나아와 . . . .” 이것은 요한복음 13:1과도 같다: “이제 유월절 전에 . . .” (#G4413, 뉴 스트롱스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4 기울임 효과를 준 단어들이 번역자들에 의해 추가되었다. 뉴 킹제임스 버전이 사용됨.

5 유월절에 마신 “와인” 은 발효되지 않은, 순수한 포도 쥬스였다. 야후와 앞에 예배 드릴 때 술을 마시는 것은 엄격한 금지 사항이었다. 나실인의 서원에 구속되어, 어떤 이들은 술 마시는 것이 아예 금지되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와인이 섞인 진통제를 거절하셨던 (마태복음 27:34) 야후슈아께서 그 희생의 어린양으로서의 사명을 성취하시려는 바로 그 때에 발효된 와인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셨을 것이다. - 다음의 글을 참조하세요: http://www.worldslastchance.com/ecourses/lessons/the-book-of-daniel-ecourse/15/daniel-chapter-1-lesson.html. (영어) (발췌: 와인의 금지는 나실인 서원을 말한다. 또한 제사장직에도 해당된다. 레위기 10:9절에 언급된 것과 같다: “너나 혹은 너와 함께한 네 아들들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니 그것은 너희 대대로 영원한 법규가 될지니라.” 고대 시대의 사람들 사이에 어느 정도의 와인은 용인되었지만, 술에 취하는 것은 죽음의 형벌에 처해졌었다. 새로운 언약 하에서,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며 왕이다. 모든 제사장들의 몸은 성령의 전으로서, 와인을 철저하게 절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레위기 10:9 역시, 하늘에 있는 지성소의 사역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알코올이 들어간 물질을 물리쳐야 함을 암시한다. 알코올이 들어간 물질이 우리가 우리의 기도들로 참여하는 그 성전 봉사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