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발견한 것을 처음에 분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산이 부숴진 파편들이, 수 천년 동안 축적된 먼지와 때에 쌓여, 그것들의 비밀을 빨리 밝혀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 고고학자는 인내심이 있었다. 흙을 체로 치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그가 찾을 수 있는 모든 조각들을 수집했다. 심지어 가장 작은 조각도 인내심을 가지고 분류했다. 마지막 조각까지 파내고 난 뒤, 진짜 일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주의를 많이 기울이며 노련한 기술로, 그 고고학자는 모든 조각들을 꼼꼼하게, 깨끗하게 만들고 복원했다. 마침내 그는 그 조각들을 조립할 준비가 되었다. 한 조각은 여기에 맞추고 다른 조각은 저기에 맞추며, 완벽한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이 천천히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좌우의 정확한 균형의 완벽함이 완벽하게 드러났고 꽃병 위에 균형 잡힌 둥근 면들이 너무도 가늘어서 그것을 지탱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그의 인내심을 기울인 노력들이 보상을 얻었다. 부지런하게 공들인 작업을 통해 뒤죽박죽 되어 있던 깨진 조각들이, 이제껏 발견된 것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우아한 꽃병들 중 하나로 바뀌었다.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은 이러한 고고학자처럼 되어야 한다. 전통의 먼지와 때, 이교의 오물들이 하늘의 아름다운 많은 진리들을 매장해 왔다. 그 오류를 주의 깊이 쓸어내고 진리를 드러내며, 그것을 그것의 온전한 영광으로 회복시키는 것은 매우 부지런한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이 염두에 두어야 하는 한 원칙은 진리는 결코 그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성경의 한 구절이 다른 구절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분명한 초청장이다:여기를 파라!그 불일치를 조정해줄 더 많은 진리들이 거기에서 발견될 것이다.
성경의 학생들을 당혹스럽게 해온 그런 부분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설명들이 요한의 책에 있는 명확한 설명들과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을 “공관” 복음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각 복음서의 자세한 내용들뿐만 아니라 기록된 사건들의 순서에 있어서도 큰 유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은 어떤 특정한 면들에 있어서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이 십자가 사건의 유월절에 관한 기록에서보다 더 잘 나타나는 곳은 없어 보인다. 세 공관 복음서가 모두 유월절 날짜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과는 달라 보인다.
실제로, 거기에 불일치는 없다.진리는 결코 그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이 땅에서 모든 질문들이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야후와께서 개인의 자유를 가치 있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결코 의심에 대한 모든 원인을 제거하시지 않는다. 만약 그들이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결코 사람들을 강요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믿고자 하지 않는 자들에 의한 의심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부분들에 있어, 결코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분에 대한 믿음을 훈련한다는 것은 믿는 자들의 특권이다. 즉, 증거를 자세하게 조사하면 네 개의 복음서의 설명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 밝혀진다. 각 복음서는 퍼즐의 조작들을 제공하며, 올바르게 이해될 때, 거기에 상충됨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사람들을 혼동되게 만들었던 구절들이다:
마태복음 26:17 -“이제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당신께서 유월절 식사를 하시도록 우리가 예비하려 하오니 어디에서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매 (킹제임스버젼1)
마가복음 14:1 -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더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을 흉계로 붙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였으나”
누가복음 22:7 - “그 때에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야 하는 때 곧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 이르매.”
위의 구절들이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마지막 저녁 식사에 관한 요한의 설명과 비교될 때 혼동이 생긴다: “이제 유월절 전에 [야후슈아]께서 자기 때가 이르러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줄 아시고 세상에 있던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복음 13:1)
이것에서, 다른 모든 성경의 퍼즐들에서처럼, 성경이 그 답을 제공한다. 율법을 주신 분, 야후슈아께서 완벽하게 지키신 모세의 율법은 유월절과 무교절 둘 다에 대하여 명백하게 시간의 범위를 제공한다.
첫째 달 십사일 저녁은 [야후와의] 유월절이요. 같은 달 십오일은 [야후와]께 무교절이니, 너희는 반드시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첫째 날에는 너희가 거룩한 집회로 모이고 그 날에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레위기 23:5-7)
이 구절은 명확하게 두 개의 다른 거룩한 준수를 위한, 두 개의 다른 날짜를 지정한다:
-
아빕월 14에 유월절
-
아빕월 15일에 무교절의 첫 날
요한복음 13장은 명료하게 말한다: “이제 유월절 전에 . . . ." 공관복음서는 심지어 레위기에 주어진 날짜들과도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다!
-
마태복음:이제 무교절의 첫 날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
마가복음: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더라.
-
누가복음:그 때에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야 하는 때 곧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 이르매
이 성경의 퍼즐의 다양한 진리의 조각들을 조립할 때, 유월절과 무교절을 위해 주어진 날짜들이 레위기 23장에 기록된 대로 지켜져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그 퍼즐의 “경계”를 제공한다. 그것들이 무시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서가 왜 유월절과 무교절의 첫 날을 같은 날에 두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어야 한다.
고려되어야 할 첫 사항은 마태복음 26:17과 마가복음 14:1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 추가된 단어들이 있다는 점이다. 아래에서 기울임 효과를 준 단어들이, 그 번역자들이 그 문장에 추가했던 단어들이다. 그것들은 원문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
“이제 누룩 없는 빵의절기의 첫 날에 제자들이 [야후슈아]께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 . . .” (마태복음 26:17)
-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절기더라 . . . .” (마가복음 14:1)
추가된 단어들이 없다면,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말한다: “이제 누룩 없는 빵의 시작에 제자들이 나아와 . . . .” 추가된 단어들을 제거하면, 마가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이틀이 지나매 유월절이었고, 그리고 누룩 없는 빵의 . . . .”
마태복음의 문장에서, “첫”이라는 단어는 “맨 먼저의 (시간, 장소, 순서 또는 중요성에 있어)”를 의미하는 πρώτος (prōtŏs)에서 왔다.2 그것은 “시작”과 “가장 좋은”을 의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은 “전”으로 올바르게 번역될 수도 있다. πρώτος (prōtŏs)가 “전”으로 번역될 때, 마태복음 26:17은 다음과 같이 된다: “이제 누룩 없는 빵 전에 제자들이 나아와 . . . .” 이것은 요한복음 13:1과 일치한다: “이제 유월절 절기 전에 . . .”
한편, 마가복음은 시몬의 집에서 그 절기 동안, 베다니에서의 야후슈아의 향유와 관련된 설명으로 바로 이어지는 문맥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수난 주간의 윤곽을 연구하면 . . . 신약 성경의 τά ἄζυμα(“누룩 없는 빵”)라는 문구가 유월절 시즌에 대한 복음서의 몇 군데의 언급들에서 나타난다 . . . 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 표현은 전형적인 공관복음의 용어다; 그리고 여전히, 마가와 누가는 그들의 복음서가 기록될 때에, 그 절기의 이름들이 τò πάνοχα 와 τά ἄζυμα로 일반적인 의미에서 바뀌어 사용되고 있었음을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다.3 그런데, 누가는 유월절 시즌을 나타내는 데에 이러한 [용어들]의 두번째 것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4 마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5 요세푸스 역시 자신의 시대에, 절기에 대한 이러한 두 개의 용어들의 선택적인 사용을 알고 있었다.6그는 심지어 그 “십사일”을 누룩 없는 빵의 날”로 부른다.”7,8
언어는 유동적이며 용어들은 종종 한 가지 방식보다 많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크리스마스”가 12월 25일에 적용되면서, 또한 일년 중 그 때 또는 12월의시즌에도 종종 적용되는 것과 같다. 메시야의 시대까지, “누룩 없는 빵”과 “유월절”이라는 용어들은 절기의 용어들로서 그 주간 전체에 적용되었으며, 유월절 (아빕월 14일)에 시작하여, 아빕월 15일에 시작되는 무교절의 칠일 전 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서기 1세기의 유명한 두 저자는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절기”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때로는 “누룩 없는 빵”을 유월절에 적용하고; 다른 때는 “유월절”을 그 절기 전체에 적용했다. 두 저자는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기원전 20 - 서기 50년)와 요세푸스(서기 37년 – 약 서기 100년)다.
1세기의 저자들에 의한 유월절 언급들을 이해하기 위해, 절기에 관한 그들의 용어들을 분류하고 해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예식과 관련된 이러한 단어들과 문구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언어들이며, 그것이 영어로 번역되면서 꽤 다른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πάσχα, 또는 ϕάσκα라는 그리스 단어는, 때때로 발생하는 대로, 요세푸스의 글에서 약 12번 발견된다. 우리는 그것을 일반적으로 유월절의 저녁 식사를 의미하는유월절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일반적으로, 요세푸스는,그 단어를 누룩 없는 빵의 팔일간의 절기에 사용하며, 오직 세번만 그 단어를 닛산월 [아빕]의 14일에 직접적으로 연관시키며, 오직 세번만 그 단어를 유월절의 어린양을 나타내는 데에 사용한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유월절의 희생 제사와 저녁 식사를 함께 말하고 있다할 지라도, πάσχα가 그 저녁 식사만을 가리키는 곳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요세푸스의 글에서, 이 희생 예식에 관한 약 25개의 언급들이 있다.9
요세푸스가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절기”라는 용어들을 서로 바꾸어 사용하는 예가 전쟁사 II.I.1-3에서 발견된다. 그는 말한다:
이제 유대인에 의해 파스챠 [유월절]라고 불리는 누룩 없는 빵의 절기가 이미 이르렀고, 많은 수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수 많은 사람들이, 한편으로는, 그 예식을 위해 그 나라로부터 왔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의사들을 위해 애도하는 자들은 그들의 분파를 위한 것을 확보하며 성전에 서 있었다.10
이 문장에서, 요세푸스는 헤롯 대왕의 죽음 후, 아빕월 14일, 유월절에 발생한 이스라엘의 소생에 대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시작하고 있다. “누룩 없는 빵의 절기가 이미 이르렀고”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절기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파스차/유월절”이라고 불렸다는 것을 설명한다. 공관복음서들도 정확히 이 같은 방법으로 그 문구를 사용한다.
요세푸스가 그 두 개의 절기의 기간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용어들이 서로 혼용될 수 있는 정도까지 부정확하게 되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요세푸스는 이 팔일간의 기간을 한 곳에서 누룩 없는 빵의 절기로 말했고, 다른 곳들에서는 유월절을 누룩 없는 빵의 절기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하거나 유월절이 유효함을 확인하며 간단하게 그 기간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사용했다 . . . 일반적인 사용에서,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의 절기 사이의 차이점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았고 닛산월 14일이 그 절기의 기간에 동화되었다.11
그 용어들이 그렇게 자주 혼용되어 사용되는 이유는 간단하게, 누룩 없는 빵이 이어지는 칠일간 동안 만이 아니라 유월절에도역시 먹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τά ἄζυμα [누룩 없는 빵]이라는 문구는 의심의 여지 없이 구약의 관례로부터 유래했으며, 그들의 본래의 율법들이 누룩 없는 빵을 유대인의 첫 달의 십사일에 구운 양과 함께 먹어야 함을 규정한다.”12 누룩 (이스트)이 14일에 집에서 제거되었고, 그 유월절 저녁에는 누룩 없는 빵을 먹었다.
이러한 문장들과 관련하여 생긴 어려움은 필로와 요세푸스가 사용한 πάσχα [파스차/유월절]이라는 단어가 언제나 닛산월 [아빕] 14일의 유월절의 예식을 말한다는 가정으로부터 주로 기인한다. 그와는 반대로, 지적된 바와 같이,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누룩 없는 빵의 절기 전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 문장에 제시되어 있지 않는 한, 다른 의미가 그것에 부여돼서는 안 된다.13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이 그 절기의 기념에 있어 개별적인 날짜들뿐만 아니라 그 시즌 전체에 적용하기 위해, 혼용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이해되면, 이제 마가복음 14:1과 그 뒤에 바로 이어지는 문장들을 살펴볼 시간이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더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을 흉계로 붙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였으나, 말하기를, “백성의 소동이 있을까 염려되니 명절날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그분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시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그분의 머리에 부으매 (마가복음 14:1-3)
이 구절이 일부 혼돈을 일으켜온 이유는 그것이 요한복음의 설명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야후슈아]께서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이르셨는데 거기에는 이미 죽었던 나사로 곧 그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자가 있더라. 거기서 그들이 그분을 위해 저녁 식사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섬기고 나사로는 그분과 함께 상에 앉은 자들 중에 있더라.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야후슈아]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요한복음 12:1-3)
정확히 어디에 마리아가 그 향유를 부었는지에 관한, 서로 다른 설명들에 대해 트집을 잡는 데에 시간이 낭비되어서는 안 된다: 마가는 야후슈아의 머리라고 말하고, 요한은 그분의 발이라 말한다. 모든 경찰관들은, 심지어 눈으로 목격한 설명들이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한 사람은 어떤 한 가지에 주목하고, 다른 사람은 어떤 다른 것에 집중하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설명이 모두 진실일 수 있다. 답변은 간단하다. 마리아는 그 향유를 구주의 발과 그분의 머리 두 곳에 부었다.
외견상의 진짜 상충은, 유월절이이틀 후였다는 마가의 명백한 설명과 야후슈아께서 유월절엿새 전에 베다니에 오셨다는 요한의 설명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 외견상의 모순을 해결하는데 있어, 성경을 거기에 있지 않은 추가적인 의미를 더하지 말고,그들이 읽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 문장 자체가 “불가피한 결론”을 . . . 제시하지 않을 때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쉽다. 그 베다니 문장들이 그 경우다.요한이 향유가 부어진 것이 유월절 엿새 전이었다고 말하는가? 아니다! 그 문장이 말하는 것은, “유월절 엿새 전에 [야후슈아께서] 베다니에오셨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2:1). 그리고 이 설명 후, 향유에 대한 설명이 “그 다음에, 그러므로, 따라서,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는 이러한 것들”(Thayer)을 의미하는 그리스 단어oun과 함께 시작된다.Oun 은 그 후에 발생했던 것에 관해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그 다음의 일을 말한다. 그것은 그 식사가 [야후슈아]께서 베다니에 오신 날과 같은 날에 발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4 반대로, 마가는 사건을 연속적으로 기록한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마가복음 14:1a)는 때에, 유대인 지도자들이 [야후슈아]를 죽이려고 음모했다. (마가복음 14:1b) 이런 일이 [야후슈아]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마가복음 14:3) 발생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베다니에서의 향유가 부어지는 일이 유월절 이틀 전에 발생했다는 것과 [야후슈아]께서 베다니에 유월절 엿새 전 (또는 이로부터 나흘 전)에 오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에 있는 설명은 마가복음의 있는 설명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하여 요한복음과 마가복음 사이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성경에 가장 먼저 기록된 유월절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설명해왔던 대로,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이라는 용어가 그 절기 전체 시즌에 적용되면서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러나, 종종 간과되는 것이 그 “시즌”이 그 달의 14일에 시작하지 않고, 오히려 매우 중요한 예비 작업이 수행되는 10일에 시작됐다는 것이다.
야후와께서 이집트 땅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 달이 너희에게 달들의 시작이 될지니 곧 그것이 너희에게 한 해의 첫 달이 될지니라. 너희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 달 십일에 그들은 자기 조상들의 집에 따라 자기들을 위해 각 사람이 어린양을 취하되 한 집에 어린양 한 마리를 취할지니라 . . . 너희의 어린양은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으로 하라. 너희는 양이나 염소 중에서 그것을 취하고 같은 달 십사일까지 그것을 간직하였다가 황혼녘에 이스라엘 회중의 전체 집회에서 그것을 죽이라.” (출애굽기 12:1-3, 5, 6.)
첫 달의 10일은 각 가정이 그들의 희생 제물을 위해 온전한 어린양이나 염소를 선택하는 날이었다. 구주에 대한 상징으로서, 각 동물은 온전하고 하나의 흠도 없어야 했다. 이러한 어린 동물들을 집에 가져와, 씻기고, 귀여워했으며, 먹을 것을 주었다. 이런 일들이 행해지면서, 가족들의 감정이 그 작은 동물과 결속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물이 죽임을 당할 때, 세상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야후와의 어린양의 상징으로 가족들에게 훨씬 더 깊은 효과를 끼칠 수 있었을 것이다.
“유월절”이라는 단어가 아빕월 14일이라는 특정 날짜만을 단순히 언급하기 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이해하며, 어떤 학자들은 야후슈아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날이 사실 그 달의 십일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 날이 바로 희생 동물들이 언제나 선택되어왔던 날짜기 때문이다. 히브리인들이 그들의 날짜를,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포함하지 않는 방식이 아닌,포함하는 방식으로 계산하는 것을 기억할 때, 시몬의 집에서의 그 절기의 타이밍은 그 달의 10일에 발생했다는 시간 구성에 완벽하게 들어 맞는다.
구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도 그분이 마리아의 향유를 붓는 일의 중요성을 이 빛 안에서 이해하셨음을 암시한다. 제자들이 마리아의 관대함을 비난하기 시작했을 때, 야후슈아께서 말씀하셨다: “그녀를 가만 두어라. 어찌하여 너희가 그녀를 괴롭게 하느냐? 그녀는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6)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바로 나흘 전에 예고하시면서, 그분은 덧붙이셨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언제라도 너희가 원하는 대로 그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거니와,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아니하니라. 그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으니 곧 장사 지내는 일을 위하여 미리 와서 내 몸에 기름을 부었느니라.” (마가복음 14:7, 8)
결과적으로, 그 연회는 시몬의 이름으로, 한 부유한 바리새인에 의해 구주께 드려진 “감사”의 저녁 식사였다. 야후슈아께서 나병환자 시몬을 치료하셨고 (마가복음 14:3 참조) 시몬이 그에 대한 감사로서, 구주와 그분의 제자들과 나사로에게 풍성한 식사를 대접했다. 시몬 자신의 아들도 열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바로 그가, 자신의 집이기 때문에 편안함을 느끼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마리아의 귀한 선물에 대해 비난했다. 마리아의 귀한 선물과 구주께서 그것을 수용하신 것의 관련성을 볼 때 그러하다.
그분께서 베다니에 계실 때에 나병 환자 시몬의 집에서 음식 앞에 앉으시니, 한 여자가 매우 귀한 나드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려 그분의 머리에 부으매 (마가복음 14:3)
이에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로 그분을 배반하여 넘길 시몬의 아들15 가룟 유다가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며 돈 가방을 맡고 있었고, 그 안에 넣어지는 것을 그가 가져가곤 했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야후슈아]께서 이르시되, “그녀를 가만 두어라. 나를 장사 지낼 날을 대비하여 그녀가 이것을 간직해왔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는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2:4-8)
유다의 부유함, 교양과 품위를 칭찬했던 다른 제자들이 빠르게 그의 본을 따랐다. 자신의 아버지의 저녁 식사 시간에 듣게 된 구주의 온화한 꾸짖음에 대한 유다의 분노의 반응이 직접적으로 그의 배반으로 이어지며, 야후슈아를 제사장들의 손에 넘겨주게 된다. 야후슈아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이 기록된 후, 바로 그 다음 구절에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그분을 배반하여 수제사장들에게 넘겨주려고 그들에게 가매, 그들이 그것을 듣고 기뻐하며 그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그가 그분을 배반하여 적절히 넘겨줄 방도를 찾더라.” (마가복음 14:10, 11)
시몬의 집에서의 그 저녁 식사가 그 달의 십일에 발생했다는, 환경상의 추가적인 증거가 그 다음 사건들이 시몬의 집에서 그 절기 후에 발생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
유다가 야후슈아를 배신하기 위해 주요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만난다. (누가복음 22:1-6 참조.)
-
시몬의 집에서의 잔치 다음 날 예루살렘에 환호의 입성이 있었다. (마태복음 21:1-11과 요한복음 12:12-15 참조.)
-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야후슈아는 상인들과 돈 바꾸는 자들을 꾸짖으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신다. (누가복음 19:45-48 참조.)
-
다양한 설교들과 논쟁들이 복음서들에 기록되었다. 그리스 사람들이 야후슈아를 뵙기를 요청하는 일을 포함하여, 그러한 것들이 예루살렘에 환호의 입성 후 이어지는 며칠 동안 발생했다. (요한복음 12:20-33 참조.)
만약 시몬의 집에서의 연회가 12일에 발생했다면, 불과 14일까지 이틀 전인데, 그 저녁 식사와 마지막 저녁 식사 사이에 발생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에 있는 설명들 사이에 일치성을 확인해준다.
그 퍼즐의 추가적인 조각이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유월절에 발생한 그 십자가 사건이 “예비의 날”이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한다는 사실과 함께 맞춰진다.
마태복음 27:59, 60 과62 - “요셉이 [야후슈아의] 그 몸을 가져다가 깨끗한 아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의 새 무덤에 그 몸을 두고 큰 돌을 굴려 돌무덤 입구에 놓고 떠나 가니라. . . . 이제 그 이튿날 곧 예비일 다음 날에 수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와서. . . .”
마가복음 15:42 - “그 날은 예비, 곧 그 안식일 전날이므로, 이제 저녁이 되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요셉이 와서 담대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야후슈아]의 몸을 간절히 구하니라.”
누가복음 23:53, 54 - “그리고 그 [아리마대의 요셉]가 그 몸을 내려다가, 아마포로 싸고, 결코 전에 사람을 둔 적이 없는 돌무덤 곧 돌 속에 판 돌무덤에 그 몸을 두니라.그 날은 예비일이며 안식일이 다가오더라.”
이것은 바로 네 복음서가 유월절과 무교절의 날짜들에 있어 일치한다는 최종적인 증거다. 성경적인태음태양력에서, 14일의 유월절은 언제나 그 주의 여섯째 날에 발생한다.
따라서, 그 다음 날, 무교절의 첫 날은 언제나 일곱째 날 안식일에 발생한다. 레위기 23:6이 확정해주며, 그 달의 15일이었다. 성경은 그 십사일/유월절을 “예비일”이라고 부른다. 많은 안식일 준수자들이 그 용어를 모든 여섯째 날에 적용하여 사용하는데, 그것이 일하는 한 날로서 여섯째 날을 가리키는 대로, 다음 날의 안식일을 준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용어를 이런 식으로 사용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히 가능하다. 그러나 성경 그 자체는, 그 명칭을 오직 무교절의 첫 날의 전 날인 십사일/유월절에만 적용한다.
무교절의 첫 날이 언제나 주간 안식일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그 날이 “큰 안식일”이라고 불렸다.
머리를 숙이신 뒤 숨을 거두시니라. 그런즉 그 날은 예비일이므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었기 때문이라)에, 그 몸들을 십자가에 남겨 두려 하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고 그 몸들을 치워 달라고 간청하니 요한복음 19:30, 31
그 예비일은 일하는 날이었다. 누룩이 집에서 제거되어야 하는 날이었다 (죄가 영혼의 성전으로부터 제거되는 것을 상징함). 유월절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는 때는 메시야가 세상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는 때를 가리킨다. 사실, 그 예비일의 시기는 복음서들 안에 기록된 하나의 사건에 의해 확인된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사건은 퍼즐의 또 다른 조각을 제공하며, 유월절의 십자가 사건의 시간에 관한 성경의 설명을 분명하게 해준다.
사형수들이 그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처형 장소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와 누가 모두 어떤 다른 이가 구주를 위해 그분의 십자가를 운반했다고 기록한다. 이것이 그 무죄한 사람에게 보여진 자비의 마지막 조치가 아니었다. 구주께서 지난 밤에 잠을 못 주무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받은 채찍질로 인한 출혈로 그분 자신의 십자가를 끌고 갈 육체적 힘이 없으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로마의 병사들이 다른 어떤 이에게 그분을 위해 그분의 십자가를 나르도록 시킴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
“그들이 나가다가 시몬이라는 이름의 구레네 사람을 만나 그에게 억지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마태복음 27:32)
-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에서 와서 지나가매 그들이 그에게 억지로 그분의 십자가를 지게 하고 (마가복음 15:21)
-
“그들이 그분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온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을 붙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주고 그가 [야후슈아] 뒤에서 그것을 지고 가게 하였더라.” (누가복음 23:26)
어떤 작가들은 “시골에서 온” 시몬에 대한 설명이 시몬이 들에서 일하고 있던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때가 매우 이른 아침이었v기 때문에, 시몬이 무교절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논리적으로 보인다. “시골에서 온”이라는 문구는 거룩한 날들에 허락된 짧은 “안식일의 여행”보다 더 긴 여행을 암시한다. 시몬이 들에서 일하고 있었든지, 아니면 여행하고 있었든지 간에, 그가 둘 중의 하나를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그 유월절이 일하는 날이어야 한다. 세 공관복음서들이 이 이야기를 포함시켰다는 사실은 “누룩 없는 빵의 절기”라는 문구를 그들이 초기에 사용할 때, 일반적으로 유월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누가복음 안에 있는 설명은 약간 다르다. “그때에 반드시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야 하는 때 곧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이 이르매.” (누가복음 22:7) 설명된 대로, “유월절”과 “누룩 없는 빵”이라는 용어들이 넓게 사용되며, 희생의 어린양이 십일에 선택되는 날부터 22일의 일곱째 날 안식일로 바로 이어지는 무교절의 마지막 날(21일)까지를 망라한다. 누가복음 22장에 이어서 나오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찬식으로 기념되고 있는 그 마지막 저녁 식사에 대한 자세한 묘사다. 세 공관복음서들과 요한복음 사이의 퍼즐 조각에 대한 연결이 마지막 저녁 식사가 구주께서 배반 당하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사실, 유월절 식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와 아람어와 그리스어에서, 영어에서와 마찬가지로, 빵이 이스트로 만들어졌는지(누룩이 들어간 빵) 아니면 이스트 없이(누룩 없는 빵) 만들어졌는지에 따라 단어들이 달라진다.
히브리어
누룩 없는 빵 =matzah(하나보다
많을 때는 matzot.)
누룩이
들어간 빵 =lekhem(하나보다
많을 때는 lekhemim.)
아람어
누룩 없는 빵 =patireh
누룩이
들어간 빵 =lakhma
그리스어
누룩 없는 빵 =azumos(또는azumon,하나보다
많을 때는azuma.)
누룩이
들어간 빵 =artos(하나보다
많을 때는arton.)
하나의 예외 없이, 성경에서 “누룩 없는 빵의 절기”를 말하는 모든 경우에,이스트 없는 빵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된다:matzah, patireh, azumos. 그러나, 마지막 저녁 식사의 빵에 대해 성경이 언급할 때마다,누룩이 들어간 빵에 해당하는 단어가 사용된다: lakhma, artos. 그러므로, 그 “마지막 저녁 식사”는 실제로 유월절 식사 전 날 발생했다.
설명된 대로, 요한과 마태는 그 마지막 저녁 식사가 유월절과 무교절 전에 발생했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1:23과 26-28에서, 마지막 저녁 식사와 그것의 영적인 의미에 관해 말하면서, 바울 역시 일관되게 이스트가 들어간 빵에 해당하는 단어를 사용한다. 요한이 마지막 저녁 식사에 관해 설명하지 않는 대신에 그 앞서 이루어진 세족식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마태와 마가와 누가 모두 그 마지막 저녁 식사에 사용된 빵이 누룩이 들어간 빵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유월절 식사일 수 없었다는 데에 일치한다. 이것은 요한의 설명에 의해 확인된다. 그는 반복적으로 십자가 사건의 날을 실제 유월절의 날이라고 말한다. 그 날은 무교절의 첫 날에 선행하는 날이다. (요한복음 18:28; 18:39; 19:14; 19:31과 19:42 참조.) 더 자세한 설명을 위해, 마지막 저녁 식사: 유월절인가? 아닌가?를 참조하세요.
네 복음서 모두 실제로 같은날짜들에 같은 사건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지지하는 마지막 진리의 조각이 그 나라 전체가 오순절을 기념하는 데에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다. 세 공관복음서들이 정말로 요한복음에 기록된 것과 다른 날짜에 유월절이 발생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분명히 그것은 오순절 날짜를 세는 데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구주께서 그분의 부활 후에 하늘로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확하게 지시하셨다: “또 그들과 함께 모이사,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그들에게 명령하셨느니라. 그분께서 이르시되, 그 약속하신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내게서 들었나니, 참으로 요한은 물로 침례를 주었으되, 너희는 이제부터 많은 날이 지나지 아니하여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 하시느니라.” (사도행전 1:4, 5)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들의 주께 순종했다. 그 다음 며칠은 마음을 살피고 회개하는 시간이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한마음이 되어 한 곳에 있더라.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 같은 소리가 나고, 그들이 앉아 있던 온 집안에 그것이 가득하더라.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그들이 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말하게 하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사도행전 2:1-4)
오순절은 신실한 연간 절기들 중 하나다. 그 절기를 거행하기 위해 독실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예루살렘이 먼 땅으로부터 온 이러한 순례자들로 가득 찼었다는 사실이 그 바로 다음 구절에 언급된다
독실한 자들 곧 유대인들이 하늘 아래 모든 민족으로부터 나아와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는데, 이제 이 일이 널리 퍼지매 그 무리가 함께 와서 그들이 자기 자신의 언어로 말하는 것을 각 사람이 들으므로 당황해하더라.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기며 서로 이르되, “보라, 말하는 이 사람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어떻게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우리 언어로 듣느냐? 우리는 바대 사람과 메대 사람과 엘람 사람이며 또 메소포타미아와 유대와 갑바도기아와 본도와 아시아와 브루기아와 밤빌리아와 이집트와 구레네 부근의 리비아의 여러 지방에 거하는 사람이고 또 로마에서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 개종자와 크레테 사람과 아라비아 사람이라. 그들이 우리 언어들로 [엘로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함을 우리가 듣는도다.” 하고. (사도행전 2:5-11)
그렇게 많고 다양한 나라들과 지역들에 살고 있던, 이스라엘 혈통의 이 놀라운 사람들의 목록이 그들도 역시 오순절이라는 연간 절기를 지킬 분명한 목적을 위해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준다.
만약 요한과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이 유월절 날짜에 관한 시간 계산에서 일치되지 않았었다면, 어떻게 모든 제자들뿐만 아니라 근동의 모든 지역으로부터 온 유대인들도 오순절을 같은 날짜에 지키며 온전히 일치할 수 있었는가. 만약 유월절 날짜에 대하여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면, 오순절의 날짜에 대해서 편차가 있었을 것이다.16
유월절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설명들이 상충되기는커녕, 네 복음서는 모두 일치를 이룬다! 그들의 설명들 안에 있는 차이점들은 그들이 상충되는 것 없이 모두 일치를 이룬다는 확증을 실제로 제공한다.
진리는 그 자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만약 외견상의 불일치가 있다면, 그것들은 단지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의심을 일으키는 모든 원인들이 제거되지 않은 것은 야후와의 지혜로 허락된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그들의 의지대로 그들이 믿을지 의심할 지 선택할 자유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며,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훈련할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그분을 기쁘게 하지 못하나니, 그분께 나아오는 자는 반드시 그분께서 계시는 것과 또 그분께서 부지런히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6)
믿음을 비평하는 사람들은 추측하기에 빠르며 그들의 추측으로 성경을 불신하는 데 사용하지만, 믿음의 학생들은 그들 스스로 주의 깊이 성경의 말씀들을 (그리고 침묵을) 분석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대부분의 (만약 모든 경우가 아니라면) 퍼즐들은, 성경의 말씀들 그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에 대한 우리 자신의 잘못된 해석에 기인한다.17
지식이 증가하고 하늘의 많은 진리들이 회복되는 이 때에, 모든 사람은 그들의 신념들의 모든 교리를 그들 스스로 연구하도록 권고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신념에 오류가 있다고 해도, 성령께서 진리를 찾는 모든 사람들을 그 진리의 지식으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분 [진리의 영]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요한복음 16:8)
1 성경의 모든 인용은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킹제임스버젼입니다.
2 #4413, The New Strong's Expanded Dictionary of Bible Words.
3 마가복음 14:1; 누가복음 22:1.
4 사도행전 12:3; 20:6.
5 마 26:17.
6 Ant[iquities], XVII.IX.3; B.II.I.3, etc.
7 B.V.III.1. 새커리: "When the day of unleavened bread came round on the fourteenth," etc.
8 그레이스 E. 아마돈, "The Johannine-Synoptic Argument," (공개된 글의 원문 원고), 앤드류스 대학, 제임스 화잇 총서, Collection 154, Box 2, Folder 1, p. 1, emphasis supplied.
9 그레이스 E. 아마돈, "Important Passover Texts in Josephus and Philo,"(공개된 글의 원문 원고), 앤드류스 대학, 제임스 화잇 총서, Collection 154, Box 2, Folder 1, p. 1, underlined original; italics supplied.
10 G. E. 아마돈에 의한 직역,ibid.,p. 2.
11 Barry D. Smith, “The Chronology of the Last Supper,”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53:1 (1991), pp. 35 & 36.
12 아마돈, "The Johannine-Synoptic Argument," op cit., p. 3.
13 아마돈, "Important Passover Texts in Josephus and Philo," op cit., p. 9.
14 Oun“언제나 엄격히 인과관계를 제공하지는 않지만, 이야기체의 연속과 재개에 있어 더 느슨하게 일시적 연결로 사용될 수 있다.” (신약 성경과 초기의 다른 크리스챤 글들의 그리스어 문법.F. Blass, A. Debrunner and Robert Funk. 시카고: 시카고 대학 Press, 1961, 234-5).
15 가룟 유다가 시몬의 아들이라는 것을 더욱 확실히 알기 위해, 요한복음 13:2-3과 13:26을 참조하세요.
16 아마돈, "The Johannine-Synoptic Argument," op cit., p. 9.
17 Kyle Pope, “Dating Passover and the Last Supper,” Ancient Road Publications.